귀를 기울이면 가장밝게, 그러나 너무짧게 타올랐던 귀도칸델리 박종호


잊혀졌던 사람
음악에 있어서 지휘자만큼이나 큰 영향력을 가지는 인물도 없다. 지휘자는 백여 명의 음악가들을 말 그대로 ‘지휘’해야 한다. 그는 자신의 분명한 음악적 해석과 예술적 견해로 다른 음악가들을 설득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지휘자는 음악가들이 가장 나중에 도달하는 영역이기도 하며, 한 사람의 예술가가 자신의 세계를 가진 진정한 지휘자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많은 경험과 시간을 필요로 한다.
최근에는 그 동안 한 세대 이상 우리가 즐겨 들어왔던 많은 낯익은 지휘자들이 세상을 떠났다. 그들은 카라얀, 첼리비다케, 번스타인, 솔티, 시노폴리 등이다. 따라서 세계 지휘계에는 많은 변동이 일어나, 이제 젊은 지휘자들이 21세기를 맞아 새로운 날개를 펼칠 준비를 하고 있다.
이런 변화의 시점에 우리는 이미 반세기 전에 세계인들을 흥분시킨, 그리고 일순간에 물거품처럼 사라져 잊혀졌던 한 사람을 떠올린다.

젊은 정복자
1956년 11월 24일, 세계의 음악팬들은 충격적인 소식을 아침 신문에서 접하게 된다. 전날 파리 오를리 공항에서 이륙하던 항공기가 추락하여 탑승자 전원이 사망했다는 뉴스가 나온 것이다. 그런데 승객 중에는 나이 36세의 젊은 지휘자 귀도 칸텔리의 이름이 있었다.
이렇게 젊은 나이에 하늘에서 사라진 귀도 칸텔리는 1920년 이탈리아 북부 밀라노 부근의 소도시 노바라에서 태어났다. 그는 아버지가 작은 오케스트라의 지휘자였던 덕분에, 어려서부터 음악과 친숙한 환경에서 자라났다. 특히 피아노에 두각을 나타낸 그는 불과 14세 때에 공개 리사이틀을 하고, 음악적 자질을 공식적으로 인정받는다. 그리고 그는 밀라노의 베르디 음악원에서 피아노와 함께 지휘를 전공하게 된다. 여기서 그는 대지휘자인 안토니오 보토에게 지휘의 모든 것을 전수받는다.
베르디 음악원을 졸업한 칸텔리는 1943년 불과 23세의 나이로 자신의 고향 노바라의 코치아 극장의 상임지휘자 겸 예술감독의 자리에 오른다. 그곳은 비록 작은 도시였지만 세계 음악의 중심지 밀라노와는 불과 1시간도 되지 않는 거리여서, 그의 활약은 음악팬들에게 화제가 되고 있었다. 그러나 2차대전의 발발로 그는 얼마 가지 않아 더 이상 그 자리를 지킬 수가 없게 되었다.
전쟁이 끝나자 이제 세계 음악계는 그의 정복을 기다리는 듯이 보였다. 우연히 그의 지휘를 들은 당시 최고의 지휘자 아르투르 토스카니니는 “그의 지휘는 나와 같은 수준이다”라는 유명한 발언으로 세계의 언론을 그에게 집중시켰다. 그리고 그는 토스카니니의 초청으로 미국으로 건너가서, 토스카니니가 만든 NBC 교향악단을 지휘하였다. 미국에 칸텔리의 선풍을 일으킨 그는 이어서 20대의 나이로 뉴욕 필하모니를, 다음 해에 런던 필하모니를 지휘하여 센세이션을 일으킨다.


푸르트벵글러의 후임자
한편 베를린 필하모니는 빌헬름 푸르트벵글러의 후임으로 당시에 떠오르는 세 명의 신예를 놓고 다음의 제왕 자리를 준비하고 있었다. 모두 젊으며 명확한 음악적 해석에 카리스마가 넘치고, 또한 모두 미남이었다. 그들은 이탈리아의 칸텔리를 위시하여, 루마니아의 세르쥬 첼리비다케, 그리고 오스트리아의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이었다. 그중에서 특히 인물과 스타일로는 칸텔리가 가장 출중하였으며, 그의 인기를 따라갈 자는 없었다. 사실 당시 카라얀은 가장 가능성이 밀리는 후보였다.
칸텔리의 지휘는 토스카니니처럼 명확하고 예리했다. 그리고 이탈리아의 열정처럼 또한 격렬하고 생동적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뛰어난 분별력으로 자신의 정열을 억제할 줄도 알았다. 그의 지휘하는 모습도 너무 강렬하여 그를 한 번이라도 본 사람은 그의 열광자가 되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한다.
1956년 세계 오페라계의 메카인 밀라노의 라 스칼라 극장은 드디어 다음 해인 1957년부터 라 스칼라의 예술감독으로 칸텔리를 임명한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불과 며칠 후에 그는 영원히 우리 곁을 떠난 것이다.

글쓴이 박종호는 신경정신과 전문의이며, 현재 음악전문 칼럼니스트로도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