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험수기 스물세 해만에 첫 봄향기를 느끼며 김명하


저는 ‘크론씨병’이라는 희귀성 질환을 앓고 있는 딸아이의 엄마입니다. 저희 딸아이는 이제 아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커버린 스물셋 대학생이 되었답니다.
딸아이의 병을 처음 알게 된 것은 초등학교 5학년 때였습니다. 원인 모를 심한 복통과 설사로 종합병원에서 정밀검사를 받았습니다. 병명은 ‘궤양성 대장염’으로 판명되었고, 대장에 염증이 유발되어 누공이 생길 수 있으며, 심하면 대장암으로도 발전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중학교 3학년 때까지 입원과 퇴원을 반복하며 약으로 버텼지만, 결국 두 번에 걸쳐 대장을 모두 절제하는 대수술을 받았습니다. 수술 후 아이는 학교생활에 지장이 없을 정도로 건강을 되찾아 무사히 대학교도 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스물한 살이 되던 해 가을, 다시 배가 아프다고 호소했고 변을 제대로 볼 수 없다면서 괴로워하기 시작했습니다. 검진 결과 이번에는 ‘크론’이라는 난치병이었습니다. 혈액 수치는 날이 갈수록 떨어지고 심한 구토와 설사로 아이의 몸은 눈에 띄게 야위어 갔습니다. 얼굴은 하얀 백짓장 같았으며, 항문과 그 주위에 생긴 누공으로 인해 하루에 15번에서 20번씩 속옷을 적시게 되니 나중에는 아예 옷을 벗겨놓아야 했습니다. 또한 아이의 머리를 감겨줄 때마다 한 움큼씩 빠지는 머리카락들을 보며 조금씩 겁이 나기 시작했습니다.

입원과 퇴원은 또다시 반복되고, 저녁이면 어김없이 찾아오는 항문 주위의 통증으로 살려 달라는 딸아이의 울부짖음에 가족들은 곁에서 지켜봐주는 일 외에는 아무런 대책도 세울 수가 없었습니다. 아이는 항문 통증으로 앉지도, 걷지도 못하였으며, 변을 보는 것은 물론 밥 먹는 것조차 힘겨워하면서 천장만 바라보고 누워지내야 했습니다. 아이는 갈수록 삶의 의지가 없어졌습니다.

그렇게 계절이 10번도 더 바뀌는 동안 딸아이와 저희 가족은 꽃이 피는 것도, 비가 오는 것도 한번 느껴보지 못한 채 고통스러운 하루하루를 보내야 했습니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한번도 입어보지 못하고 다시 옷장 속에 넣어야 하는 딸아이의 옷가지들을 정리하며 얼마나 울고 또 울었는지 모릅니다.

결국 2003년 4월, 또다시 힘든 검사가 시작되었습니다. 검사 결과 항문을 막고 인공항문을 차게 하는 수술을 해야 한다는 것과 그나마 지금의 몸무게(26kg)로 수술할 경우 가망이 희박하다는, 기가 막힌 말을 들었습니다.

그러던 8월 18일 밤, 아이는 삶을 포기하려 했습니다. 아플 때마다 한 알씩 먹으라고 처방해 준 진통제를 수십 알이나 한꺼번에 먹어버린 것입니다. 새벽에 침대 밑으로 떨어져 있던 아이는 눈을 감은 채 신음소리만 내고 있었습니다.

26kg의 작은 체구로 그 많은 약을 먹고도 살아난 것이 기적이건만 감사해 하기는커녕 오히려 “엄마, 나 죽고 싶어. 너무 아파 죽고 싶어”라고 중얼거리며 쓰러졌습니다. 저는 “엄마도 같이 죽자”며 딸아이를 붙들고 오래도록 울었습니다.

8월 25일은 딸아이의 23번째 생일이었습니다. 저는 우리 딸 생일이니 아프지 않게 해달라고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단 하루만이라도 웃으며 지낼 수 있게 해달라고. 그러나 그날은 아침부터 유난히 통증이 심해 하루 종일 우는 것이었습니다.

“엄마, 나 너무 아파. 살기 싫어. 나 그냥 편히 죽게 도와줘” 라며 애원하듯 나를 쳐다보았습니다. 나중에는 아픈 것을 잊으려는 듯 ‘나는 23살, 꿈도 많고 희망도 많지요. 나는 23살…’을 반복하며 넋이 반쯤 나가 있었습니다. ‘그래, 이렇게 내 딸이 죽어가는구나’하는 생각에 마지막으로 딸아이의 소원이 뭔지 알고 싶어졌습니다.

“네 소원이 뭐야? 엄마가 다 들어줄게.” “엄마, 나 마지막 소원이야. 병원 옮겨줘. 죽어도 좋아.” 언젠가 딸아이는 저에게 서울아산병원에 데려다 달라고 했습니다. 서울아산병원에 자기와 같은 크론 환자가 많다는 것과 많은 환자들이 나아서 퇴원했다는 말을 들었던 모양이었습니다.

8월 26일, 딸아이의 소원대로 서울아산병원에 가게 되었습니다. 크론 가족 모임에서 이름만 들어보았던 양석균 선생님께서 병실로 오셨습니다. 선생님을 보자 딸아이는 죽어가는 목소리로 “저 좀 살려주세요. 살고 싶어요…”하며 울었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살 수 있어요. 일어날 수 있으니 용기를 가져요”하며 손을 꼭 잡아주셨습니다. 그때 선생님의 따뜻한 말 한마디는 후에 제 딸아이가 일어나게 된 정말 소중한 용기와 힘이 되었습니다.

다음 날 병실로 오신 선생님은 환자가 안정을 취하면서 체중을 늘리는 것이 우선이라며, 환자 상태를 보면서 검사를 차근차근 해나가겠다고 하셨습니다. 선생님이 다녀간 후 딸아이는 “엄마, 내가 매일 아파서 미안해. 하지만 선생님 말씀대로 반드시 좋아져서 내 발로 걸어서 집에 갈게”하는 것이었습니다. 얼마나 듣고 싶은 말이었던지, 처음으로 아이가 삶의 의욕을 보이며 희망을 갖고 있다는 것에 나는 감사했습니다. 딸아이는 체중이 조금씩 늘어갔습니다. 하지만 항문을 막는 수술을 해야 한다는 결과가 나왔습니다. 결국 인공항문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는 것과 지금 검사로는 다른 장기에는 별 이상이 없어 보여 다행이라고 하셨습니다.

수술일이 다가오자 저는 수술이 잘 되어 우리 딸이 걸어서 갈 수만 있다면 하는 생각과 이제 스무 살을 갓 넘긴 여자아이가 과연 인공항문이라는 장애를 잘 극복하며 살 수 있을지, 혹 살아가며 자신의 배에 찬 주머니로 인해 상처를 받지는 않을지, 엄마로서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 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수술만은 어떻게든 피하고자 노력했던 3년 동안의 시간들이 머릿속을 스쳐가며 그동안 참아왔던 눈물이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차마 아이 앞에서 울 수가 없어 화장실에서 엉엉 울었습니다. ‘그래, 우리 딸 수술해서 하루라도 사람답게 살 수만 있다면, 가족들과 함께 식사 하고, 계절에 맞게 옷을 갈아입고, 꽃이 피는 걸 보며 행복해 할 수만 있다면….’ 마음을 가다듬고 병실로 돌아왔습니다.

9월 9일, 딸아이는 수술실로 향했습니다. 마취에서 깨어나지 않으면 엄마가 꼭 깨워 달라는 말을 남기며…. 우리 가족은 모두 병실로 돌아와 그저 무사히 살아나기를 기도하며 기다렸습니다.

친구가 보고 싶다며 소리 내 울던 모습, 하루에도 열대여섯 번씩 보는 변으로 옷도 입지 못하고, 그래도 살아야 한다는 엄마 말에 누워서 억지로 밥을 떠먹던 모습, 몸이 아파 엄마 아빠의 속을 썩였다며 미안하다고 울던 사랑하는 딸의 모습을 생각하니 눈물이 났습니다.

오전 10시 50분에 수술실로 들어간 딸아이는 오후 6시 20분에야 병실로 돌아왔습니다. 감사하다는 말 밖에는 그 어떤 말도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너무나 많은 고통 속에서 살았던 딸이 3번째 대수술을 하고 이렇게 살아서 제 곁으로 돌아왔다는 것이 꿈만 같았습니다.

저녁이 되자 수술을 집도하셨던 유창식 선생님께서 병실로 오셔서 수술이 잘 되었다는 것과 소장과 항문을 연결했던 파우치 부분이 돌처럼 딱딱하게 굳어져 있어서 시간이 오래 걸렸다는 설명을 해주셨습니다. 마취에서 덜 깬 딸아이는 “엄마, 나 이제 산 거야?”라며 눈물을 흘렸습니다. 수술 후 딸아이는 조금씩 건강을 되찾기 시작했습니다.

2003년 10월 2일, 서울아산병원 응급실로 실려온 지 40일 만에 딸아이는 자신의 말대로 걸어서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이사 온 후 한번도 제 발로 돌아다니지 못했던 집안 구석구석을 둘러보고, 자기 방 침대에도 누워보고, 3년 동안 한번도 앉아보지 못했던 식탁 의자에도 앉아보았습니다. 그렇게 제 딸아이는 스물셋의 힘겨운 시간들을 보내고, 따뜻한 봄을 맞이했습니다.

제 딸아이는 이제 영원히 항문을 쓰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비록 항문은 잃었지만 소중한 인공항문을 얻게 되었고, 그보다 더 소중한 사랑을 배웠습니다. 저는 배에 차게 된 딸아이의 인공항문을 떼어내 소독해주는 일을 할 때마다 지난 10년간의 고통들을 잊지 않고 감사하려 합니다. 그리고 딸아이에게도 인공항문이 자신의 인생에 있어 걸림돌이 되기보다는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용기가 되어주기를 바랍니다. 눈물겨운 위로의 편지들로 딸의 아픔을 진심으로 같이 해주었던 ‘크론 모임’ 가족들과 민영일 교수님, 양석균 선생님, 유창식 선생님, 박정익 선생님, 박인자 선생님, 그리고 간호사님들 모두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저의 이 글이 지금 이 순간에도 이름 모를 병으로 고통 받고 있는 이들에게 작은 위로와 용기가 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김명하 / 이 글은 서울아산병원 체험수기공모전 장려상 수상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