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상일지 응급호출과 휘파람 정석원



‘♬~♬’
듣기 좋으라고 내 취향에 맞는 멜로디로 휴대폰 벨소리를 지정했음에도 불구하고, 병원 전화번호가 찍히는 벨소리는 반갑지 않다. 달갑지 않은 목소리의 주인공은 역시나 응급실 내과 전공의다.

“후두 종양으로 수술하고 나서 현재 완치 상태에 있는 환자입니다. 상부 위장관 출혈 증상으로 내원하셨습니다. 내시경으로 확인해야 할 것 같습니다.” ‘에구, 방금 퇴근해서 집에 왔는데’하는 허무함으로 가슴이 답답해 온다. 현재 혈압과 맥박이 안정적이고, 활동성 출혈도 없어 보이니 일단 약 쓰면서 기다리다가 다음 날 아침에 확인해보자고 할까 잠시 생각했지만, 혈색소 수치가 상당히 떨어져 있어 어디에선가 대량 출혈이 있었던 환자이기에 다음날 아침까지 기다리기가 곤란할 것 같았다. 다시 주섬주섬 옷을 입고 병원으로 향했다.

많은 경우가 그렇듯, 위나 십이지장궤양에서 생긴 출혈이겠거니 생각하며 내시경을 입 속으로 넣은 순간, ‘꺽’ 하는 환자의 구역질 소리와 함께 내시경 시야가 온통 빨간색으로 변하는 것이 아닌가? 입으로는 선홍색 출혈이 거의 펌프질 하듯 터져 나오고 있었다. 어떻게든 시야를 확보하고 출혈 부위를 관찰하려 애쓰는 동안, 환자의 의식은 점점 흐려져 가고 산소 포화도 및 혈압과 맥박은 급속히 떨어지고 있었다.

일단 내시경적 지혈 시도를 포기하고 심장 마사지를 하면서, 전공의 선생님에게는 기도 삽관을 하라고 한 후 하염없이 흘러나오는 피를 안타깝게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환자는 후두 종양의 절제 수술을 한 까닭에 후두부의 해부학적 구조가 상당히 변형되어 기관 삽관이 계속 안 되고 있었고, 산소 포화도는 계속 쭉쭉 떨어져 갔다.

‘아, 이렇게 환자를 잃어야 하나?’ 자괴감이 든 순간, 이전에 기관 절개를 했던 흔적이 환자의 목에서 드러났다. 전공의 선생님의 손에 들려있던 삽관 튜브를 빼앗아 환자의 목으로 꽂아 넣었다. 다행히 약간의 저항 후에 삽관 튜브는 기도 내로 빨려 들어갔고, 이후 멈출 줄 모르던 구강 내 출혈은 조금씩 잦아들었다. 아마도 혈압이 너무 많이 떨어져 구강 내로 더 이상 나올 혈액이 없었으리라.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부랴부랴 환자를 다시 응급실로 옮기고, 이후 수혈 치료와 추가적인 검사를 시행했다. 그 결과 환자의 출혈은 상부 위장관이 아닌 두경부 종양이 재발하여 그 혈관들이 구강 내로 노출되었기 때문에 그토록 심하게 출혈을 했던 것으로 판명됐다. 동기야 어찌되었건 간에 내시경 검사가 환자의 대량 출혈을 야기한 결과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이런 경우를 한 번이라도 겪어 본 내시경 의사들은 ‘긁어 부스럼’이 될만한 상황은 되도록 피하고 싶어진다. 더구나 내시경 시술 중 응급 상황이 발생했을 때, 의료진이 많은 낮과 그렇지 않은 밤 사이에는 아무래도 차이가 있기 마련이다. 내시경적 치료가 지금 꼭 필요한 상황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 경우 다음 날 아침에 검사를 하자고 하면, 다른 내시경 의사에게 당직이 넘어가게 되므로 이렇게 스트레스가 많은 상황은 피할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 병원에서는 이 같은 상황이 거의 없으리라 믿는다.

대부분의 상부 위장관 출혈 환자들은 내시경 검사를 시행한 후에 괜찮다는 것을 확인하거나, 출혈 부위를 치료할 때 까지는 비위관(코에서 위까지 넣는 제법 두꺼운 관, 수련의 생활을 시작하기 전에 한 번 동료들끼리 넣어 봤는데, 잠깐도 못 참을 정도로 엄청 괴로웠다)을 삽입하고 있어야 한다. 더구나 식도 또는 위정맥류가 의심되는 간 경변 환자들은 비위관보다 몇 배는 더 고통스러운 풍선 달린 비위관을 삽입하고 있어야 한다. 환자나 보호자에게 몇 시간은 며칠, 아니 몇 주에 해당하는 긴 시간이라는 것을 너무나 잘 알기에 우리는 시간에 관계없이 낮이건 밤이건 내시경 시술을 하게 되는 것 같다. 물론 예를 든 것처럼 식은땀이 흐르는 순간을 종종 맞게 되지만 말이다.

‘♩~♪’
또 다시 휴대폰이 울린다. 역시나 응급 호출이다. 그러나 오늘은 휘파람을 불면서 검사실로 내려간다. 왜? 나는 아직 퇴근 전이니까. 그 많은 호출을 받고 함께 일해주신 서울아산병원 소화기병 검사실 직원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