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상일지 강아지 돌보는 여인 조명선



물기 어린 나뭇잎 사이로 눈부신 햇살 한줌이 쏟아져 내린다. 꽃향기 묻어나는 이 시기의 바람을 맞을 때쯤, 내게는 꼭 바람처럼 불어와 가슴을 조금씩 흔들어 놓고 가버리는 이야기가 있다. 그리고 그 이야기는 마치 기다렸다는 듯 나를 깨워 지친 마음을 다독이며, 더 많은 사람들을 사랑할 수 있는 힘이 되어 주곤 한다.

아마 한 이삼 년 전쯤의 일일 거다. 반복되는 고된 병원 생활에 조금씩 지쳐가고 있을 무렵, 나에게 참 좋은 친구로 다가온 아이가 있었다. 그 아이는 중학생이었고, 이름은 민호였다. 골육종 환자였던 민호는 아프기 전에 필드하키 선수를 했을 만큼 건강한 아이였다. 대부분 열 살 미만의 조그마한 아이들 틈에서 키가 180센티미터가 넘는 민호는 참 의젓한 환자였다. 부모님이 맞벌이를 하셔서 거의 낮 동안은 혼자 지내던 민호였기에 나는 출근하자마자 그 아이의 안부를 확인하는 일로 하루를 시작했다. 그 아이는 외아들로 형제가 없어서인지 나를 무척 잘 따랐다.
‘우리 동생 같은 아이가 참 힘이 들겠구나.’
나는 아무것도 모른 채 고통스런 상황을 견디는 꼬마친구들도 안쓰러웠지만, 생각의 양이 많은 사춘기의 그 아이가 참 힘들 것 같아 가슴이 많이 아팠다. 그래서 틈틈이 얘기도 많이 해 주고, 가끔은 편지를 써 주었다.
부모님의 선택으로 한동안 뜸하던 민호가 다시 병원을 찾았을 땐, 이미 몸 여기저기에 암세포가 전이된 상태였다. 그래도 아무런 원망없이 자신은 괜찮다며 주위 사람들을 위로하며 애써 미소짓던 그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그런 안타까운 마음이 채 가시기도 전에 민호의 병은 점점 악화되어 갔다. 자신의 삶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알게 된 후, 민호는 주위의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자신이 아끼던 물건을 나눠주고 싶어했다. 민호엄마는 생각할수록 끔찍한 일이라 말렸지만, 민호의 의지를 꺾기가 어렵다며 나에게도 인형을 선물해 주었다. 나는 눈물로 그 선물을 받았던 걸로 기억한다. 민호가 엄마에게 특별히 부탁해서 선물한 그 인형은 청동으로 만들어진, 손에 강아지를 한 마리씩 데리고 서 있는 두 여인이었다.
그 선물을 받은 지 얼마 안된 어느 날, 그렇게도 눈부신 아침을 맞이하지 못한 채 늦은 새벽녘에 민호는 하늘나라로 갔다. 그날 아침, 나는 밤 근무의 고단함도 잊은 채 멍한 기분으로 성내역 꽃길을 걸으며 많이 슬퍼했다. 그곳의 바람소리가 그렇게 나를 위로했던 것 같다. 괜찮다. 괜찮다고….

나는 나의 소중한 물건들에 큰 의미를 부여하는 버릇이 있다. 민호의 인형은 나에게 그런 것들 중 하나이다. 아직도 민호의 인형은 나에게 간호사로서 나태함이 밀려오려고 할 때면, 기운을 내라고 말한다. 잠깐 쉬어가고 싶다는 생각에 주저앉아 있는 나에게 인형은 슬며시 손을 내밀어 일으켜 주곤 하는 것이다. 그럴 때면, 나는 또다시 일어나 내게 주어진 길을 향해 달리고 싶은 마음으로 가득 차게 된다.
한 손에 강아지를 든 저 여인은 어디로 가는 것일까. 그녀는 지금 발걸음을 재촉해, 그녀의 따뜻한 손길을 기다리는 사람들에게로 갈 것이다. 강아지보다 더 귀엽고 사랑스런 아이들에게로.

글쓴이 조명선은 서울아산병원 61병동 간호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