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옛 것이 좋아? 김종성




찰톤 헤스톤이 그립다
1960년대 영화 스파르타쿠스나 엘시드를 생각나게 하는, 모처럼 보는 큰 스케일의 서사극 글래디에이터가 몇 년 전 개봉되었다. 여러 모로 뛰어난 영화였으므로 아카데미 상을 다섯 개나 탄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한 가지 문제가 있다. 남우 주연상을 타긴 했으나 주인공 러셀 크로우의 어깨는 충분히 넓지 못하다. 게다가 살집이 많다. 그저 퉁퉁한 이웃집 아저씨 같은 그가 근육질의 우람한 검투사들을 손쉽게 물리치는 장면은 아무래도 작위적인 느낌이 든다. 뿐만 아니다. 크로우의 눈빛은 사려 깊고 부드럽다. 하지만 결코 강렬하지는 못하다. 영화를 보는 내내 나는 벤허(1959년 작)에 나오는 찰톤 헤스톤의 강인한 어깨, 그리고 고뇌에 찬, 진지한 눈빛을 그리워하지 않을 수 없었다.
미국의 영화 평론가 로저 에버트가 50편의 위대한 영화 중 하나로 선정한 쇼생크 탈출(1994년 작)도 마찬가지다. 여기서 팀 로빈스와 모건 프리맨은 빼어난 연기를 보여 주었다. 하지만 감방에서 뼈를 깎는 고생을 한 사람치고는 두 사람, 특히 팀 로빈스의 뺨은 너무나 부드러웠다. 고통과 증오로 단련되어 눈빛이 펄펄 살아 있는 빠삐용(1973년 작)의 스티브 맥퀸과 더스틴 호프만을 도저히 따를 수 없다.
영화를 찍는 기법이 많이 향상되고 특수 효과의 발달도 눈부신 요즈음인데, 아직도 왕년의 명화가 더 깊은 감동을 주는 이유는 무엇일까? 오히려 발달한 기술 때문에 연기의 치열함, 진지함이 상대적으로 부족해진 것은 아닐까? 브람스 교향곡 4번 제1악장, 인생의 쓸쓸함을 한껏 한탄하는 선율 끝에 터져 나오는 웅장한 북 소리가 없기 때문은 아닐까?

머리가 숙여지는 이유
이런 생각을 하게 된 동기는 얼마 전 대한의학회로부터 내게 분쉬 의학상을 수여하겠다는 통보를 받았기 때문이다. 나는 뇌졸중 환자의 감각장애, 혹은 뇌간 뇌졸중 환자의 증세를 분석하고 이를 MRI를 사용하여 알아낸 병변과 연관하여 해석했다는 공로로 영예로운 상을 받게 되었다. 하지만 MRI가 개발되기 거의 백 년 전인 20세기 초, 유럽 학자들은 이미 이런 연구를 하고 있었다.
영상 기술이 없어 도저히 손상된 뇌 조직의 위치를 알 도리가 없었기에, 그들은 셀 수 없는 시간을 쏟아 부어 환자들의 신경학적 이상 징후들을 공들여 기록해 두었다. 그리고 이를 기초로 뇌의 해부, 생리적 기능에 관한 상상의 날개를 폈다. 끈질기게도, 그들은 환자가 사망할 때까지 기다리고, 보호자를 설득하여 시체를 해부했다. 그리고 그제서야 깊디 깊은 의학의 동굴 속에서 한 가닥 지식을 발굴해 낼 수 있었다.
마치 아무런 장비 없이 맨손으로 에베레스트 산을 오르듯 그들은 오직 피와 땀으로 의학을 발전시켰다. 나도 연구를 하느라 늘 진땀을 흘리는 사람이지만, 분쉬 의학상은 아마도 그 노력에 대한 상징적인 보상이겠지만, 이러한 옛 선배 학자들의 수고, 그리고 혜안에는 저절로 머리가 숙여질 수밖에 없다.

하늘 아래 새 것은 없나니
영화든 학문이든, 21세기에 들어 첨단 장비로 무장한 우리들이지만, 이 세상의 진보를 위해서 끝없는 피와 땀이 요구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하긴 수십만 년 전 우리 조상 호모사피엔스가 지구상에 출현한 이후 세상은 줄곧 그래왔다.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

글쓴이 김종성은 서울아산병원 신경과 교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