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이란 4월이니까 김중혁


그래 좋다
몇 해 전에 있었던 일이다. 4월이었고, 봄이었고, 따뜻했고, 나른했고, 그래서 낮잠 자기에도 너무나 좋은 일요일 오후였는데 아내는 자꾸만 공원으로 자전거를 타러 나가자고 했다. 봄이 되었는데도 왜 자꾸만 곰처럼 겨울잠만 자냐는 것이다.
곰인 주제에, 그래도 곰이라는 소리는 듣기 싫었는지 나는 냉큼 옷을 집어들고 아내를 따라나섰다. 하지만 결국 곰이었기 때문에 아내를 따라나서면서도 계속 졸음이 왔다. 나는 얼른 자전거를 타고 와서 다시 낮잠을 청해 보리라 다짐했다.
호수가 있는 공원에 도착하자마자 아내는 2인용 자전거를 타자고 했다. 왜 거 있잖은가. 바퀴가 두 개인 것까지는 좋은데 안장과 발판까지 두 세트인, 누군가 한 사람은 컨베이어 벨트를 담당한 사람처럼 쉴새없이 페달을 밟아야 하는 산업사회의 상징물 같은 그 자전거 말이다.
어째서 아내는 2인용 자전거를 타자고 하는 것일까. 모르긴 몰라도 분명 게으른 곰을 부지런한 곰으로 만들기 위한 작전이었을 것이다. 나는 게으른 곰으로 남고 싶어서 1인용 자전거를 고집했다. 하지만 게으른 곰과 사육사의 싸움은 대개 사육사의 승리로 돌아가게 마련이어서 나는 어쩔 수 없이 2인용 자전거를 빌리고 대여료를 냈다. 대여 시간은 1시간이었다. 자전거 대여점 직원은 호수 주변을 천천히 두 바퀴 도는 데 한 시간이 걸린다고 했다.
그래 좋다. 두 바퀴만 얼른 돌고 다시 집에 가서 낮잠을 즐기는 거다.

게으른 곰의 자전거 타기
그런데, 의외로 기분이 괜찮았다. 호수 주변에 화들짝 피어 있는 봄꽃들을 보는 것도 재미있었고 아주 느긋한 바람이 내 귓불을 관통하는 느낌도 좋았다. 페달은 거의 나 혼자 밟고 있었기 때문에 힘은 들었지만 두 사람분의 체중을 앞으로 밀고 나가는 기분도 나쁘지 않았다.
공원 둘레는 역시 멀고도 멀었다. 밟아도 밟아도 목적지는 보이질 않았다. 3분의 1쯤 갔을 때 다리에서 힘이 빠지더니 자전거의 속도가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뒷좌석에서는 사육사가 큰 소리로 게으른 곰에게 힘을 북돋워 주고 있었지만 자전거는 전혀 앞으로 나아가질 않았다. 나는 자전거를 세워놓고 잔디밭에 드러누웠다. 하늘이 노랗게 보일 줄 알았는데 하늘은 참 파랬다. 아름다웠다. 나는 아름다운 하늘을 보면서 잠이 들었다.
나는 게으른 곰답게 40분이나 잠을 잤다. 4월이었고, 봄이었고, 따뜻했기 때문에, 그리고 잔디도 뽀송뽀송했기 때문에 기분이 상쾌해졌다. 호수 두 바퀴는 물론 열 바퀴라도 끄떡없이 페달을 밟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현실은 제법 가혹한 편이라서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고작 10분뿐이었다.
세상일이라는 게 그렇다. 얻는 게 있으면 잃는 게 있는 법이다. 추가요금을 내면 간단한 일이지만 그건 어째 좀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잠에서 덜 깬 눈으로 아내를 쳐다보았다. 화가 나 있을 줄 알았는데, 아내는 아주 평화로운 얼굴로 “와, 봄볕을 받고 누워 있으니까 참 좋다”며 잔디 위를 뒹굴고 있는 게 아닌가.
아내의 이야기가 맞았다. 봄볕을 받으며 누워 있으니 참 좋았다. 하늘도 아름다웠고 날씨도 아름다웠다. 아내와 나는 2인용 자전거에 올라타고 온 길을 다시 되돌아갔다. 그리고 2인용 자전거를 반납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추억은 사진기에 담기지 않는다
생각해 보니 나의 여행 스타일도 자전거 타기와 비슷하다. 게으른 곰이므로 당연히 여행을 좋아하지 않지만, 어쩔 수 없이 여행을 간다 하더라도 ‘꼭 가 봐야 할 명소 50곳’ 따위의 가이드는 대부분 무시하는 편이다. 그저 한곳에 푹 눌러앉아 지나가는 사람들을 구경하고, 걷기 좋은 산책로나 커피 맛이 끝내주는 카페를 찾아내서 즐기는 걸 훨씬 선호하는 편이다.
어느 여행지에서 박물관에 들른 적이 있었다. 처음에는 호기롭게도 박물관에 있는 모든 작품을 다 보리라 마음먹었다. 하지만 웬걸, 박물관은 넓고 작품은 많았다. 1백 미터 달리기를 하듯 숨가쁘게 뛰어다닌다면 그 작품들을 다 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알다시피 박물관에서는 달리기가 금지돼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사진기에다 작품을 담고 싶어하지만 역시 알다시피 박물관에서는 사진 촬영이 금지돼 있다. 만약 촬영이 가능하다 하더라도 사진기에다 그 작품을 담는 것이 과연 무슨 의미가 있을까?
돌아온 후 여행지에서의 추억을 곰곰이 되씹어보겠다? 장담컨대 그건 불가능하다. 모든 여행은 목적이 아니라 과정이며 기록이 아니라 체험이다.
나는 박물관의 모든 작품을 보겠다는 생각을 깨끗하게 접고 몇 작품 앞에 죽치고 앉아 하루를 보냈다.

따뜻하고 나른했던 4월의 어느 일요일 오후
봄이 되면 가끔 그 공원에서의 일이 생각난다. 그리고 이런 생각을 해 본다. 만약 내가 그때 자전거를 타고 한 시간 내에 공원을 두 바퀴 완주했다면 세상은 어떻게 변했을까? 공원길을 완주했다는 사실에 자신감을 얻어 연습에 연습을 거듭한 후 사이클링 선수로 변신한 다음, 국내는 물론 전세계를 제패하고 급기야 100연승이라는 세계 신기록을 기록한 후 명예로운 모습으로 은퇴하여 그동안 모아놓은 트로피나 구경하면서 여생을 보내게 되었을까? 아니, 그냥 한 조각의 햇볕이 모자란 채 평생을 보내게 되었을 것이다.
따뜻하고 나른하고 낮잠 자기에 너무나 좋은 4월 어느 일요일 오후의 한 조각 햇볕은 100개의 금메달을 획득하는 것보다 훨씬 행복한 일이다. 목적지에 도착하지 못하고 중간에 돌아오고 말았지만, 그래서 결국 금메달 같은 건 하나도 딸 수 없는 인생이 돼 버렸지만, 다행스럽게도 아직 쬘 햇볕은 충분하다. 게으른 곰에게 그보다 행복한 일은 없다.

글쓴이 김중혁은 소설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