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이란 가난한 사랑 장명수


해피
12년간 키우던 개 해피를 잃고 많은 생각을 하고 있다. 한 달이 지난 지금도 해피 생각에 눈물 흘리고, 못 견디게 보고 싶을 때가 많다. 생후 3개월의 애기를 데려다가 12년 동안 애지중지하며 정이 흠뻑 들었으니 슬픔과 상실감이 심한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나의 상태는 내가 보기에도 좀 비정상인 것 같다. 사랑하던 개를 잃고 슬퍼하는 정도가 아니라 절대적으로 의존하던 상대를 잃은 어린애처럼 어쩔 줄 모르는 상태가 계속되고 있다.
해피는 시추종 숫놈으로, 건강하고 성격이 강해서 15살까지는 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척추 노화로 두 다리가 마비되어 말할 수 없이 고통스러워 했고, 병원에서 물리치료를 받았지만 효과가 없었다. 해피는 집에 와서 죽기 위해 온 힘을 다해 버틴 듯 퇴원한 다음 날 새벽 눈을 감았다.
해피의 죽음을 하루하루 실감하면서 나의 슬픔은 점점 더 깊어 갔다. 그 동안 내가 해피를 돌 본 게 아니라 해피가 나를 돌봐왔다는 것을 나는 깨달았다. 남편도 같은 상태여서 우리 부부는 마치 어린 고아가 된 것 같았다. 외출에서 돌아 온 우리를 미칠 듯 반가워 하며 맞아주던 해피가 없는 집은 텅 빈 집 같았다. 나는 집에 들어가는 게 두렵고 싫어서 퇴근 무렵 이리저리 서성거리곤 했다.

내 사랑은 왜 이렇게 가난한가?
그러면서 나는 깨달았다. 내가 가졌던 사랑은 왜 이렇게 가난한가. 해피가 나에게 그렇게 절대적인 존재였나. 해피 이외에, 제한된 가족 이외에, 또 어떤 사랑이 내게 있었나. 개 한 마리의 죽음으로 휘청거릴 만큼 내가 맺고 있던 사랑의 관계가 허약했었나.
나는 그 동안 내가 얼마나 사랑에 대해 이기적이고 게을렀으며 무관심했던가를 돌아보았다. 사랑을 부담스러워하고 도피적이기까지 했다는 것도 깨달았다. 해피에게 그토록 의존했던 것은 사람들에겐 마음을 닫고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해피는 고집이 세고 제 멋대로 하는 성격이어서 결코 만만치 않은 개였지만 사람을 사랑하는 것보다는 해피를 사랑하는 게 쉬웠을 것이다. 저녁에 해피를 안고 “엄마 피곤해 죽겠다”든가 “엄마가 오늘은 슬프구나”라든가 “엄마가 너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고 있니?” 등등의 말을 하는 시간이 나에겐 가장 행복한 시간이었다. 그러는 동안 하루의 스트레스가 눈 녹듯 풀렸다. 어느 누가 그렇게 말없이 은근하게 나의 온갖 쓸데 없는 말을 들어줄 수 있겠는가.

마음이 풍요로운 부자들
사랑에 대해 어떤 태도를 갖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생이 달라진다. 지금까지 맺은 인연들만으로 충분하다, 더 이상의 사랑은 필요없다고 생각하면서 새로운 사랑에 대해 마음을 닫는 사람들은 나처럼 생이 가난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한평생 적극적으로 사랑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마음이 풍요로운 부자일 것이다.
나는 적극적으로 사랑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생각해 보았다. 신문, 방송에서 알게 된 사람들만 꼽아 보더라도 사랑을 나누고 실천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나는 새삼 놀랐다. 그런 사람들 앞에서는 세상이 각박하다는 한탄을 할 수 없다.
치매 노인들을 위해 자원봉사 하는 한 주부는 넉넉하지 않은 살림을 꾸려 나가며 정기적으로 양로원을 찾고 있다. 노인들을 목욕시키고 손톱 발톱을 깎아 드리는 그의 얼굴은 햇볕처럼 환하다.
부모에게 버림받고 시설에서 자라는 어린이들을 돌보는 자원봉사자들도 있다. 결혼도 안 한 처녀들이 아이들의 대소변을 즐겁게 치우는 걸 보면 놀라지 않을 수 없다.
그 아가씨들의 마음 속에서 사랑이 샘솟게 하는 힘은 도대체 어디에서 오는 걸까. 항상 감동을 받는 스토리 중의 하나는 장기 기증 릴레이다. 신장이 나빠 고생하는 한 여성에게 누가 신장을 기증했다. 그 여자의 남편이 자기도 누군가에게 신장을 주겠다고 나섰다. 그의 신장을 받은 남자의 아내가 다시 누군가에게 신장을 기증했다… 이렇게 이어지는 신장 기증 릴레이가 다섯 명, 여섯명으로 이어지는 감동적인 기사를 우리는 신문에서 자주 읽고 있다.

개척하는 것
해피를 잃고 나는 더욱 가난한 사람이 되었다. 내가 가난하다는 사실을 깨닫자 주변의 부자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부자들이 부럽다. 적극적으로 사랑하며 살아가는 사람들, 사랑하는 개를 잃어도 휘청거리지 않는 사람들이 부럽다. 행복은 당연히 그들의 것이다. 행복이란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개척하고 만들어 가는 것이라고 그들은 우리에게 말한다.

글쓴이 장명수는 한국일보 이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