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돗둘 도토리의 꿈 안도현


톡, 하고 소리를 내며 도토리 하나가 땅에 떨어졌습니다.
갈참나무 가지에서 땅으로 떨어진다는 것, 그것은 도토리의 새로운 삶이 시작되었다는 뜻입니다. 낙엽 속에 파묻힌 채 도토리는 몸을 움직여 보았습니다. 하지만 꼼짝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 하면 아주 단단한 껍질이 도토리를 감싸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껍질을 깨고 어서 밖으로 나가고 싶어.”

톡, 톡톡, 하고 소리를 내며 도토리들이 떨어지더니, 톡톡토 독, 토토토토토토톡토토토토톡톡톡토토토토톡톡토토톡, 갑자기 소나기 빗방울 쏟아지는 소리를 내며 도토리들이 떨어져 내렸습니다. 한 노인이 와서 장대를 휘두르며 갈참나무의 도토리를 마구 털어 대고 있었습니다. 한바탕 장대를 휘두른 다음, 노인은 가지고 온 자루에다 도토리들을 주워 담고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산을 내려갔습니다.
찍, 찍찍, 날이 어두워지자 이번에는 들쥐들이 먹이를 찾아 찍찍거리며 돌아다녔습니다. 찍찍찌찌찌찌직찍찍찍찌직찍찍찍찍찍찍찍찍찍찍찍, 낙엽들은 그들이 감싸고 있는 도토리가 들쥐들의 눈에 띄지 않도록 하기 위해 또 무진 애를 썼습니다.

“굳이 이렇게 숨어서 살아야 하나?”
도토리는 갑갑해서 머리를 흔들었습니다.
“아니야. 너 자신을 포기해서는 안 돼. 도토리야, 너는 살아 남아야 해. 그래서 이 세상하고 다시 관계를 맺어야 해.”
“…… 관계를 맺는다는 게 뭐지?”
“그건 마음속에 오래 품고 있던 꿈을 실현한다는 뜻이야.”
낙엽들이 아주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도토리를 에워쌌습니다.
“도토리야, 네 몸 속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아니?”
“글쎄.”
낙엽들이 바스락거리며 말했습니다.
“놀라지 마라, 도토리야. 네 몸 속에는 갈참나무 한 그루가 자라고 있어.”

앙상한 갈참나무 가지 사이로 흰 눈이 내리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런데 참 이상한 일이었습니다. 눈이 내려 쌓일수록 도토리는 몸이 자꾸 아늑해지는 것이었습니다. 도토리의 작은 몸은 불길에 휩싸인 것처럼 점점 뜨거워졌고 참을 수 없는 고통이 도토리를 집어삼킬 듯하였습니다.

봄이 되었습니다.
도토리는 자신의 단단한 껍질을 찢으며 껍질 밖으로 자기도 모르게 손을 뻗고 있는 또 하나의 자신을 발견하고는 몸을 떨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도토리는 햇볕이 내려오는 쪽으로 힘껏 손을 뻗었습니다. 그랬더니 도토리의 손끝에 연초록 싹들이 보란 듯이 돋아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도 아니고, 둘도 아닌, 수없는, 어린 갈참나무들이 숲 속에 출렁거리고 있었습니다.

글쓴이 안도현은 시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