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누는 행복 마을 청소년 축구단의 꿈 황호민

김복돌, 차범근, 수문장, 마라도나… 서재 한 쪽 화분 옆에 오각형 무늬가 있는 축구공이 놓여 있는데, 굵은 글씨로 요란스럽게 장식되어 있다. 글씨체로 보나 장난스런 이름으로 보나 이름난 선수들의 사인볼이 아닌 것은 분명하다. 그래도 거기에 적힌 이름들 하나하나를 되짚어가며 주인공을 떠올리는 것이 즐거움일 뿐 아니라 가물가물거리는 의지에 불길을 살려주는 격려이기도 하다.

주유소 총무로 일하고 있는 나는 가끔 지난 날 농촌지역에서 학원을 운영할 때 모습을 떠올린다. 초등학생들 조금하고 중학생들이 대부분이었는데, 무서워하면서도 무척 나를 잘 따랐다. 아이들이 얼마나 깍쟁이들인데 그렇게 지극정성으로 나를 따라다녔겠는가? 한 달에 한 번 일요일로 날을 잡아 축구시합을 열 때만 그랬다. 축구를 워낙 좋아하는 터여서 축구동호인 모임에도 들어있는데, 아이들과의 시합도 매력적인 면이 많다.

언뜻 보기에 커다란 사람이 애들하고 놀이하는 모습이 우스꽝스러울지 모르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선수 배치부터 작전 지휘까지 감독으로서의 재능을 맘껏 발휘하며 열정을 쏟았다. 그렇게 한참 축구를 한 다음 모두 땀범벅이 되었을 때 아이들을 나무 그늘로 불러 모아 근사한 성찬을 마련해 준다. 초코파이와 요구르트 하나씩이면 아이들 인기를 모두 끌어모을 수 있다.

아이들과 한마음이 되어 축구경기를 하던 그 짜릿한 추억을 뒤로 하고 도시로 나와 사업에 손을 댄 지도 어언 10년이 넘는다. 물론 여기서도 새벽에 축구로 운동경기를 하며 몸과 마음을 단련하고 있다. 워낙 목소리가 크고 말이 많은 성격이라 경기 내내 최고로 설치고(?) 다니지만 누구 하나 드러내고 불평하지 않는 것을 보면, 내가 출중한 리더십을 가지고 있거나 다른 선수들이 점잖은 신사들이리라. 주유하고 배달하고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하루 일과 중에 생기는 스트레스를 아침 일찍 운동장에서 미리 풀고 나서는 지혜라고 할 수 있다.

호락호락하지 않은 세상살이에 놀라운 정도로 잘 적응하여 내가 ‘넘버 투’로 있는 여기 주유소에서도 좋은 수완을 보이고 있다. 통이 크다는 말과 지독한 구두쇠라는 말을 동시에 듣는데, 일을 하다보면 예기치 못한 일도 많으므로 주변의 한 마디 한 마디에 귀 기울일 틈은 없다. 또 이렇게 바삐 지나가는 일과를 은근히 즐기는 편이니 양조장을 운영하셨던 할아버님 기질을 닮기는 한 모양이다.

이렇게 야심만만한 내가 농촌지역에서 학원을 운영할 때부터 키워 온 꿈을 더 어렵게 생각하는 것은 묘한 일이다. 학원 문을 닫으며 정든 축구 선수들에게 받은 사인볼을 추억에 젖은 눈빛으로 바라볼 때마다 아이들에게 한 약속을 마음에 새긴다.

“선생님이 돈 많이 벌어가지고 와서 우리 마을에 청소년 축구단 하나 만들 것이니, 다시 만나도록 하자. 그때는 너희들이 수석 코치로 뛰게 될 것이니 운동을 게을리 하지 않기 바란다. 이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