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누는 행복 내 어린 날의 새 책 박인자



아이 책꽂이에 가지런히 꽂힌 새 책을 보니 제 어린 시절이 떠올랐습니다. 새 교과서를 받으면 부모님은 장롱 위에 잘 보관해 놓았던 해 지난 달력을 꺼내 교과서 겉표지를 정성스레 싸 주셨죠. 당시 달력은 지금처럼 도톰하고 하얀 것이 아니라 얇아서, 아이들은 서로 좋은 달력을 차지하려고 싸움이 나기도 했습니다. 그러면 아버지의 불호령이 떨어졌지요.

“이 놈들, 책 보고 훌륭한 사람 되라고 책 싸주니까 벌써부터 싸움질이여, 엉?”

잠시 침묵이 흘렀고, 그래도 언제 그랬냐는 듯 서로 교과서 잘 싸달라고 아버지께 매달렸습니다. 저는 지금도 활동하는 탤런트 노주현 씨와 이영하 씨를 좋아했는데, 아버지 어깨를 주물러드리며 경쟁자인 언니를 물리치고 두 사람이 멋진 양복을 입고 있는 달력으로 교과서 겉표지를 쌀 수 있었습니다.

초등학교 시절 선생님은 새 교과서와 함께 한두 권 헌 교과서를 끼워주셨습니다. 주로 음악이나 미술 교과서였던 것 같습니다. 줄을 서 순서대로 헌 교과서를 받았는데, 제발 헌 교과서라도 새 것 같은 것으로 받았으면 하는 바람으로 차례를 기다렸지요. 그러다 잘 아는 동네 언니가 썼던 책이 걸리면 왠지 그 언니가 가까운 선배로 다가왔고, 공부 못하기로 소문난 개구쟁이 오빠들 책이 걸리면 왠지 새 학기에 공부를 못할 것 같은 예감에 속이 상하곤 했습니다. 아버지는 헌 교과서를 싸 주실 때는 더 신경을 쓰셨습니다. 그렇게 교과서를 다 싸면 아버지께서는 앞면에 국어나 산수라고 검은색으로 크게 글자를 써주신 뒤, 우리를 빙 둘러 앉히고 말씀하셨습니다.

“얘들아, 공부 열심히 혀서 훌륭한 사람 되어야 헌다. 알아들은 겨….”

그러면서 우리들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셨고 등도 토닥여 주셨습니다. 그 아버지의 손길이 얼마나 부드럽고 따스했던지 지금도 또렷이 남아있습니다.

그 무렵 저는 비 오는 날이 참 싫었습니다. 우산이 별로 없어 둘이 한 조가 되어 학교에 가곤 했지요. 갑자기 소나기라도 만나는 날엔 책가방 사이로 들어간 빗물 때문에 책이 젖기 일쑤였습니다. 그럼 저는 검정 가마솥이 걸린 부뚜막 한 옆에 책을 세워 말리곤 했는데, 잘못해서 책을 태울 뻔한 적도 있었습니다.

아! 그리고 보니 많은 세월이 흘렀네요. 지금은 흔한 게 책이고, 교과서도 잃어버리면 다시 구입할 수 있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세상이 좋아지다 보면, 어느 순간 종이 교과서가 아닌 인터넷을 통해 책을 보며 공부하지 않을까도 싶습니다. 그러나 저는 정말 반대입니다. 모든 것이 발달해 편해진 세상이라 좋다고 하지만 교과서만큼은 양 손을 쭉 뻗어 소리 내 읽기도 하고, 가끔 엄지 손가락에 침을 묻혀 책장을 넘겨가며 읽는 것이 교과서를 읽는 참맛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오늘처럼 봄꽃 향기가 은은하게 바람을 타고 불어오는 날 교과서의 추억으로 인해 저는 참 행복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런 추억은 가끔 지친 일상에 단비 같은 역할로 제 가슴을 촉촉이 적셔 주기 때문이죠.

바람이 순한 오늘 같은 날에는 어릴 적 살구꽃이 환하게 피던 봄날 다같이 입 모아 국어 교과서를 읽던 아담한 그 교실 풍경 속으로 떠나보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