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누는 행복 "좋은건 기다려야지!" 옥명호

며칠 전 책장 정리를 하는데, 한켠에 찌부러져 있던 수첩이 하나 툭 떨어졌습니다. 벌써 6년도 더 지난, 예전 직장에서 쓰던 메모용 수첩이었습니다. 신문을 읽거나 책을 읽을 때, 흥미로운 대목을 만나면 짬짬이 적어놓곤 하던 그 수첩을 펼치자 당시 <뉴스위크>에서 읽은 기사 한 토막이 튀어나왔습니다.

미국 캘리포니아 주의 한 주부가 CD를 개발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CD라는 게 다름아니라 어린아이들을 대상으로 하는 ‘잔소리 모음 프로그램’이라는 거였습니다. 이 CD에는 모두 스물세 가지 명령을 담았는데, 그 대표적인 명령 몇 가지를 읊어 보자면 이렇습니다.
“시끄러워!” “소리 좀 그만 내라!” “말대꾸하지 마!” “내가 니 친구냐?” “숙제는 다 했니?” “한 번 시키면 즉시 하라는 대로 해!”
이 주부는 어린 아들을 타이르고 야단치는 데 이골이 나, 30초간 되풀이하여 쏟아내는 잔소리들을 CD에 수록했다는 것이었습니다. 게다가 여기서 그치지 않고, 고장 난 전축처럼 똑같은 말로 떠드는 데 진력 난 부모들을 상대로 한 개당 11.95달러에 팔기까지 했다고 합니다.
그땐 그저 ‘햐~, 이런 사람도 다 있네’ 싶은 생각에 적어 둔 기사였지만, 그 내용을 되읽는 지금에는 그저 웃고 넘길 수만은 없습니다. 다섯 살 난 딸아이와 세 살배기 아들아이를 둔 부모가 되고 보니 말입니다. 아마 모르긴 해도 저도 꽤나 저희집 아이들에게 잔소리를 하지 않나 싶습니다. 만일 제가 미국의 그 주부처럼 ‘잔소리 CD’를 만든다면, 아마도 “기다리세요~!”가 1위를 차지하지 않을까 합니다.

영락없이 외가쪽 기질을 타고 난 딸아이는 성격이 꽤나 급한 편이어서, 그 급하기가 또래를 훨씬 앞지르고도 남습니다. 고슴도치도 제 새끼는 이쁘다곤 하지만, 그 고슴도치도 저희 딸아이 같은 새끼(?)를 낳는다면 금세 돌아앉아 “내 새끼 아닌디!” 할 것만 같습니다. 자기 마음에 안 들거나 원하는 게 바로 안 이뤄지면 거의 공중부양(?)의 내공으로 방방 뛰어오르고 악을 써대며 소릴 지르거나 아예 드러누워 버릴 정도니 저희 부부도 기가 질리곤 하지요.
매사에 그러다 보니 저나 아내나 쉬지 않고 딸아이에게 하는 말이 “기다리세요!” “기다려야 하는 거야!”입니다.
역설적이게도 딸아이에게는 ‘기다림’을 주문처럼 읊어대는 저 자신이 ‘삶에서의 기다림’에 몹시도 서툴고 미숙하다는 사실을 배운 건 바로 저희집 ‘방방 공주’에게서입니다.

“내 선무~울, 내 선무~울! 빨리, 빨리…, 잉~, 아빠 나빠!”
어느 날 딸아이 앞으로 온 선물이 어찌나 단단히 포장돼 있던지 쉽사리 뜯기질 않아 끙끙거리는데, 아니나다를까 그새를 못참고 “빨리, 빨리!”를 외치다 그예 골을 내고 떼굴떼굴 구르는 모습에 어이가 없어서 혼을 내려는 마음을 지그시 누르고 낮은 목소리로 달랬습니다.
“의진! 뭐든지 좋은 건 기다려야 되는 거예요. 알겠어요?”
잔뜩 부어 찌푸린 딸아이의 표정을 보며 이 말을 하는 순간, 뒤통수를 내리치는 한 마디. ‘딸아이한테는 기다리라고 하면서, 넌 왜 그리도 기다릴 줄을 모르냐?’
부끄러웠습니다. 사실이 그랬으니까요. 사소한 일이건 중요한 일이건, 단시일에 바라는 결과가 나오지 않거나 계속 늦어지면 쉽사리 부정적 생각과 판단을 내리고 마는 제 삶의 행태가 딸아이의 방방거리는 모습에 겹쳐지고 있었습니다. ‘삶의 내공은 기다림에 있다’는데, ‘기다림을 배우지 못하고 인생을 말할 수 없다’는데, 제 인생 공부의 수준이란 게 겨우 다섯 살 난 딸아이와 무어 다를까 싶어 오래오래 그 무안함이 사라지지 않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