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누는 행복 친구가 없으니까 외로움이지 外 옥명호 外


“아빠아~, 죽었어요! 물고기가, 제브라가 죽었어요!”
몇 달 전 롯데월드 지하상가에서 개운죽이 꽂힌 자그마한 어항 하나를 사왔습니다. 그 안에는 은빛 줄무늬가 난 쬐그만 물고기 두 마리가 헤엄치고 있었습니다. 우연히 판매대를 지나치다 그 은빛 몸짓으로 헤엄치는 물고기를 보는 순간, 딸아이에게 보여 주고 싶단 생각이 굴뚝같이 피어올랐습니다.
“참, 그런데 얘네들 이름이 뭐예요?”
사들고 돌아서다가 물고기 이름이 뭐지 싶어 물어봤습니다.
“아, 제브라요, 제브라!”
“얼룩말처럼 줄무늬가 있어서 제브란가 보죠?”
집에 돌아와서 딸아이에게 안겼습니다. 그날부터 딸아이는 제브라 밥 주는 날만 기다렸습니다. 뭐든 자기가 손수 하기를 좋아하고 때로 우기기까지 하는 딸아이에겐 일주일에 한 번 제브라 모이 주는 날이 제일 기다려지는 날이었습니다. 그런데 한 달이나 지났을까요, 두 마리 가운데 한 마리가 숨을 쉬지 않는 거였습니다.
“여보, 아롱이가 죽었어요!”
어느 날 퇴근하여 집에 들어서자, 딸아이에게 안 들리게 숨죽인 목소리로 아내가 말했습니다. 이름을 딸아이와 함께 아롱이 다롱이로 지었는데, 그 중 조금 작은 녀석이 무슨 일인지 숨을 놓고 말았던 거지요. 왜 그랬을까, 밥을 너무 많이 주었나, 병이 들었을까… 알 수가 없었습니다. 남은 한 마리마저 죽을까 봐 매일 어항 속을 지켜보곤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보름이 지났을까요. 다롱이마저 숨을 놓았습니다. 그제서야 딸아이에게 숨길 수가 없었습니다. 엄마가 말을 겁니다.
“의진아…, 아롱이가 죽었잖아. 그런데 다롱이도 죽었어…. 어떡하지? 다롱이가 왜 죽었을까? 외로워서 죽었을까?”
엄마 말에 쿨쩍쿨쩍 눈물을 비치려던 딸아이가 냉큼 대답합니다.
“응! 외로워서 죽었나봐….”
딸아이의 대답을 들었을 때, 네 살짜리가 외로움이 뭔지나 알구 저러나 싶어 되물어 보았습니다.
“의진! 근데 외로움이 뭐예요?” (우리집 언어법은 엄마와 딸은 말을 놓고, 아빠와 딸은 말을 높입니다.)
“으응…, 친구가 없으니까 외로움이쥐―.” (장난기가 아빠를 초월하는 딸은 장난기가 동하면 말꼬리가 달라집니다.)
“아하―, 친구가 없으니까 외로운 거구나. 친구가 없으니까 다롱이가 죽은 거구나!”
맞장구를 쳐주면서도 속으로 적이 놀람을 감출 수 없었습니다. 아직 외톨이가 된 경험이 없는 딸아이의 대답을 삶에서 나온 말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겠지요. 여지껏 읽어 준 동화책 속에서 들은 표현이나 상황이 기억에 남아 그저 ‘말대답’한 것에 지나지 않겠지요. 그럼에도 그 말이 오래 가슴에 남았습니다.
가상의 디지털 공간인 인터넷에서 생겨나는 여러 모임 중에 ‘자살 동호회’에 관한 보도 기사를 접하고 많이 놀랐던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인터넷 자살 동호회를 통해 만난 회원끼리 함께 목숨을 내던졌다는 기사를 접했을 때, 자살 자체의 의미는 다음에 논하더라도, 곁에 아무도 없이 홀로 맞이하는 죽음이, 그 순간이 얼마나 외롭고 두려웠으면 자살을 ‘동호’(同好)하는 모임까지 생겨났을까 싶은 생각이 들어 마음이 칼에 벤 듯 아리고 시려왔습니다. 스스로 자기 목숨을 끊을 만큼 깊이 절망했을 사람들이, 그토록 독한 마음을 곱씹었을 사람들이 죽음의 순간을 ‘함께 할’ 친구를 필요로 했다는 사실에 하염없이 아파했습니다.
딸아이의 ‘말로서의 대답’이 오래도록 가슴에 남은 건 그 때문이었습니다.

글쓴이 옥명호는 딸 의진(4), 아들 우겸(2), 아내 신혜진 씨와 함께 서울 동작구에 살고 있다.


‘어? 어디서 개구리 소리가 나지?’
한참 동안 소리의 출처를 찾아보려 두리번거려도 찾을 수가 없다.
매미와 새소리가 들리는 숲 아래에 위치한 집이긴 하지만 개구리 소리가 들려올 리는 만무하기 때문이다.
‘어디서 이리 우노… 이상하네’
그러다 소리가 들려오는 세탁기 쪽으로 향했다.
‘어! 세탁기 안에서 개구리 소리가 나네? 어느 녀석이지?’ 하고 들춰보기가 무섭게 짜릿짜릿 전기가 손을 놀라게 하였다.
세탁을 마치고 한 놈 두 놈 들춰보기 시작했다.
‘이 녀석이 범인이구만?’
그 범인은 바로 작은 개구리 인형.

점심이 다가오는 무렵인 12시 30분께 집으로 향하던 길에 쓰레기 종량제 봉투 안에 큰 인형이 매달려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아니 웬 쓰레기 봉투에 인형이 있지?’
의아해하며 뒤적여보니 인형들이 그 안에 빽빽하게 들어차 있었다. 눈짐작으로도 적지 않은 개수일 것 같아 보인다. 난 쑥스럽지만 그것을 집으로 가져가기로 결심하였다.

정장 차림에 하이힐과 꽃무늬 모자를 눌러쓴 아가씨가 뭘 잔뜩 넣은 쓰레기 봉투를 들고 도로를 거닐고 있나,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바라보는 주민들의 눈길을 애써 무시하고 쑥쓰러워 하며 그 애물단지를 집으로 데려온 것이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봉투 안 인형들을 끄집어내기 시작하였다.
‘어? 이거 새 인형이잖아?’
대형 피카츄 인형, 한아름 되는 마시마로 인형, 큰 곰돌이 인형 두 개, 잔잔한 인형들, 디즈니 유아용 가방, 호빵맨에 병아리 인형까지 모두 갓 나온 것처럼 모양 좋은 것이었고, 때묻지 않고 닳지도 않은, 사람 손길도 접하지 않은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무슨 쓰레기를 가져와서 그래? 빨리 갖다버려!”
집에서 기다리는 것은 20분 정도 쏟아지는 노모의 꾸중과 호통이었다.

말 안 듣는 딸이 미웠던지 큰 방에서 화를 삭이며 주무시고 계실 무렵 땀나게 하는 애물덩어리, 나는 그것을 세탁기를 돌려 빨기 시작하였다.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런 좋은 인형들을 버릴까 하는 생각과 한국이 점차 쓰레기 공화국으로 돼가는 것은 아닐까, 쓰레기 수출을 차기 인기 품목쯤으로 아는 선진국의 약소국에 가하는 횡포들까지 온갖 생각들이 교차하였다.

세탁기 속 인형들은 새롭게 탄생하였다. 그리고 여름 불볕에 잘 마르고 있다. 이 인형들은 인근 고아원 아이들 품에 안겨지게 될 것이다. 간밤 어둠 사이로 외롭고 춥고 기다림에 지쳐갈지도 모를 우리 아이들. 그 어린 유년의 가슴에 작고 귀여운 인형들이 친구가 되어줄 수 있을 터.
버림의 문화, 소비의 문화, 그 습성이 너무 일상적이다. 이제는 그 무엇을 버리기 전 누군가에게는 가장 필요로 하는, 간절히 원하며 꿈꾸는 소유일 수 있다는 사실들을 기억했으면 하는 소망을 담아본다.

글쓴이 우윤숙은 대구 달서구에 살고 있다.


1년 동안 한 푼 두 푼 모았던 학급비를 의미 있게 쓰자는 나의 제안에 아이들은 뜻밖의 반응을 보였다. ‘선생님! 자장면 시켜 먹어요?’라고 말할 줄 알았던 아이들이 예상외로 긍정적인 반응을 보인 것이다. 몇몇 아이들은 준비를 제대로 해가자는 말까지 했다.

아이들과 함께 봉사활동 할 곳을 찾아보았다. 곧 근처에 장애인 복지시설이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이번에는 무엇을 어떻게 준비해야 할지가 문제였다. 그냥 아이들을 끌고 가자니 마음이 놓이지 않았고, 그런 곳에는 사람의 손길뿐만이 아니라 물질적인 도움이 필요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생각다 못하여 그곳에 전화를 걸어서 봉사활동을 제의했고,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조심스럽게 물어 보았다. 담당하시는 분이 아이들에서부터 어른들까지 다양한 계층의 장애인들이 있고, 가장 필요한 것은 1회용 기저귀라고 일러 주었다.

함께 준비를 하면서 아이들은 내가 생각하지 못했던 것까지도 일깨워 주었다. 이왕에 봉사를 하려면 제대로 하자는 것이다. 집에서 쌀 한 봉지씩을 가져와서 쌀 몇 말을 준비했다. 어떤 아이는 부모님에게 말씀을 드려서 떡을 몇 상자 해 왔다. 처음에 계획했던 학급비 수준이 아니라 아이들의 정성을 모아서 최선을 다해 준비했다.

그리고 아이들에게 간단한 주의 사항을 이야기했는데, 아이들은 몹시도 걱정이 되는 듯했다. 사실은 내 자신이 더 걱정이 되었는지 모른다. 장애인을 겪어본 적이 없는 나로서는 아이들까지 데리고 가서 어떤 태도를 보여야 할지 막막하기만 했다. 아이들에게는 “마음으로 가까이 해야 한다”고 하면서 정작 나는 자신감이 생기질 않았다. 평소에 장애가 있는 사람을 접해 보지 못해서겠지만 그러한 나 자신이 참 한심하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준비했던 것들을 차에 차곡차곡 실으면서, 그곳에서 보내 준 승합차 두 대에 아이들을 태워 보내면서도 내 마음은 부담스럽기 그지없었다. ‘괜히 이런 일을 추진했구나’ 하는 후회와 아이들 앞에서 정작 내가 그분들과 마음으로 나누지 못하면 어쩌나 하는 우려가 뒤섞여 혼란스러웠다.

그러나 나의 우려는 기우일 뿐이었다. 스스럼없이 다가가서 함께 어우러져 웃고 떠드는 아이들…. 아이들의 모습을 보면서 나의 마음도 덩달아 따뜻해졌다.

봉사활동을 다녀온 뒤로 아이들은 공동체적인 삶이 어떤 것인가를 마음으로 느끼고 있는 듯하다. 말로 하지 않아도 남을 조금이라도 생각하는 아이들의 모습이 대견하기만 하다. 아이들과 또 2월에 가기로 약속을 했다. 그리고 준비를 한다. 무엇이 필요한가를 알아보고 아이들과 함께 성심껏 준비를 해야겠다. 올해 함께 갔던 아이들은 아니지만 같은 마음이리라 생각한다.

글쓴이 조광기(kwnggi_jo.yahoo.co.kr)


아침에 도시락 반찬을 싸다가 문득 친정에서 가져온 마늘 장아찌 생각이 났다.
‘바쁜데 뭘, 이거라도 반찬으로 가져가지 뭐.’
문득 5년 전 배낭여행 때 마늘 장아찌를 먹던 추억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허기가 져도 이국의 음식들이 입에 맞지 않아 고생하던 때, 배낭 안 반찬통에 가져온 간장 절인 통마늘과 마늘 장아찌는 큰 위안이요 행복이었다.

그러나 이렇게 고마운 마늘 장아찌가 기겁을 할 정도로 혐오 식품이었던 때가 있었다. 초등학교 시절 가을 운동회 날, 웬만한 친구들은 다들 부모님이 오셔서 김밥에 삶은 계란 등을 놓고 푸짐한 점심 시간을 보낼 때, 나는 운동장 구석에 홀로 앉아 잡곡밥에 마늘 장아찌 반찬으로 눈물의 점심을 먹곤 했다. 분명 같은 찬의 도시락이었을텐데 그 반찬으로 푸짐하게 차려온 친구들의 반찬과 대적(?)하며 먹는 두 살 터울의 동생이 그저 신기할 따름이었다. 행여 누가 볼까봐 얼른 먹고, 사람들 안 보는 곳으로 가 이런 특별한 날까지도 마늘 장아찌 반찬을 싸 준 어머니를 원망하며 눈물을 훔치곤 했다.

지금 생각컨대 비록 나에겐 볼품없는 반찬이었지만, 새벽 일찍 시장에 가느라 분주하셨던 어머님에겐 정성이 가득 담긴 반찬이었으리란 생각이 든다. 6남매를 돌보느라 새벽 일찍 시장에 가서 밤 늦게야 퉁퉁 부은 다리를 주무르며 집에 오곤 하던 어머니…. 운동회 날까지도 김밥 한 번 싸 줄 형편과 여유조차 갖지 못했던 어머니의 심정은 얼마나 안타까우셨을지….

장아찌를 볼 때마다 아직도 나는 부끄러울 따름이다.

글쓴이 유은경은 대전시 중구에 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