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누는 행복 인터넷 글쓰기 外 황태식 外


인터넷 글쓰기
어릴 적부터 마음 한구석에 글쓰기의 꿈을 간직하며 살아오고는 있었지만 대학 졸업한 지 25년 가까이 흐르기까지 마음껏 글써 볼 기회를 갖지는 못하고 있었다. 마음껏이라면… 이를테면 회식 때 흔히들 ‘허리띠 풀어놓고 포식하듯’이라고 할 수 있는 느낌이랄까?
그러다가 지난 3월말 참석한 한 마라톤 대회 수기 모집에 응모한 글들을 읽다가 인터넷 글쓰기를 하시는 분의 체험을 접하게 되었다. 쉰줄에 접어 드신 한 어머니가 서산에 지는 해같이 시들하게 사시다가 자기 따님이 권한 인터넷을 알게 되어 글도 쓰고 나중에는 이 속에서 마라톤 동우회까지 가입하게 되어 활기찬 삶을 새롭게 시작하신 과정인데, 어찌나 차분하고도 재미있게 전개하셨는지 읽는 이들로 하여금 침을 꼴깍 삼키게 할 정도가 아닌가?
그에 큰 감동을 받은 나는 컴맹임을 가리지도 못하고 고등학교 2학년인 딸따니(딸의 애칭)와 가인의 도움으로 걸음마를 시작했고, 급기야는 귀찮아 죽겠다는 눈총까지 받아가며 억척스레 하나씩 배워 익혀 차츰 인터넷 글쓰기에 빠져들게 되었다. 이 대목을 쓰다 보니 아빠 때문에 숙제에 지장을 받고 기가 막혀 했던 아들의 한숨소리마저 귀에 생생하게 다시 들려오는 듯하다. 그땐 다 자란 아들과의 첨예한 대립에 ‘이거 내가 뭐하는 건가’ 약간 아찔하기도 했었다.
그만큼 인터넷 글쓰기에는 할수록 좋아지는 몇가지 매력이 있었다. 우선 글을 쓰는 이의 신분을 얼추 가릴 수 있어서 눈치볼 필요없이 솔직히 써 볼 수 있다는 점, 적당한 사이트를 선택할 경우 분량이나 횟수에 구애받지 않고 그야말로 한도 끝도 없이 글을 펴 보일 수 있다는 점, 그리고 비슷한 취향을 가진 사람들의 즉각적인 반응을 접할 수 있어 많은 격려와 자극을 덤으로 받을 수 있다는 점이다.
물론 유해 사이트도 있다고 듣긴 했지만 구태여 찾아나서지 않고 조금만 신경 쓴다면 크게 문제될 것은 없을 것 같고, 일반적인 동호인 사이트에서 만나게 되는 미지의 사람들은 대개 따뜻하고 여유있는 마음씨의 소박한 이웃들이어서 특히 내겐 열심을 내게 하는 동기가 되었다.
때로는 무심히 혹은 가볍게 던지는 듯한 꼬리글 한 줄로 퍼뜩 깨달음을 주어 서로의 부족함을 메워주고, 새로운 아이디어까지 샘솟듯 나오게 해 주니 이렇게 고마울 데가 있나? 뭐 쌍방향 커뮤니케이션이라는 것의 장점이며 또 다른 행복 나누기가 아닐지 모르겠다.
그래서인지 온 밤을 꼬박 새며 글을 쓴 적도 한두 번이 아니다. 요즘 십대들의 유행 같은 야행성으로 딸 아들이 컴퓨터를 다 쓰고 난 밤 2시 이후라야 컴퓨터가 내 차지 되기가 일쑤였고, 또 조용한 밤에는 여러가지 생각들이 잘 떠오르기도 하고, 그것들을 차분히 음미하기도 십상이며, 맞춤법이나 어법에 어긋나는 경우를 최대한 줄여보고자 하는 나의 결벽성도 한 몫해서 글 다듬는 시간까지 자꾸 길어졌기 때문이다. 고추장 타법으로 자판을 두드리다 보면 이윽고 신문배달 소년의 기척이 들리고, 새벽이 붐하고 밝아오며 가슴은 뿌듯함으로 차 오르는 것이다.
이렇게 시간을 돌보지 않고 불과 두어 달 만에 묵직한 책 한 권을 묶어내도 좋을 분량의 자작글들을 생산해 내게 되었으니 내가 생각하기에도 대견한 꿈의 성취가 아닐 것인가?
하여간에 선무당이 사람을 잡는다거나 무식하면 용감하다는 이야기가 딱 들어 맞는 경우가 아닐지 모르겠다. 그래도 여기서 말로만 알았던 자아 발견이랄까 자아 실현 비슷한 감정을 경험하기도 했고 만만찮은 행복감을 누리기도 했으니 늘그막에 이만한 호사도 쉽진 않을 것이다.

글쓴이 황태식은 서울아산병원 이영선 팀장의 남편이다.

손버릇
몇년 전의 일이었다. 그 당시 살던 집에는 우리 가족 외에도 두 가구가 더 세들어 살던 한 지붕 세 가족의 집이었다. 많은 가족들이 모여살다 보니, 예기치 못한 에피소드들도 많이 생겨나곤 한다. 물론 대부분 즐겁고 얼굴에 웃음 가득한 일들이지만, 간혹 서로간에 얼굴 붉히고 마음 상해 하던 일들은 지금 생각해도 마음 아프기만 하다. 그중에서도 건넌방에 세들어 살던 한 꼬마아이를 손버릇이 좋지 않은 아이로 지목했던 나의 경망스러웠던 기억은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 내 인생 최대의 황당 사건이 아니었을까 한다.
그 당시 늘상 저녁때만 되면 대문 앞 우유 주머니엔 우유가 담겨 있곤 했다. 식구들 모두 직장과 학교에 가서 저녁 늦게야 들어오기 때문에 주머니에서 우유를 빼오는 일은 항상 내 몫이 되고 만다. 그런데 며칠 전부터 우유 주머니에 있어야 할 우유가 자꾸 없어지는 것이었다. 처음엔 배달 아저씨가 깜박했거니 생각했지만, 나흘이 지나도록 계속 우유가 배달이 되지 않자 보급소에 전화를 걸어보기로 했다. 보급소 아저씨께선 “아니 무슨 말씀이시죠 ? 계속 우유를 배달해 드렸는데….”
상황이 이쯤 되다 보니, 건넌방 세들어 사는 일곱살짜리 꼬마아이를 의심해보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시간대에 집안에 있는 사람이라곤 그 아이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무조건 아이를 데려다 나무랄 수는 없었다. 부모님 모두 일터에 나가시고, 어린 나이에 홀로 집안에 남아 얼마나 먹고 싶은 게 많았을까라는 측은한 마음이 없었던 것도 아니다. 하지만 그렇게 좋지 않은 손버릇을 고쳐 주지 않으면, 아이 장래나 부모에게도 좋지 않을 거라 생각해서, 대신 아이 엄마에게 자초지종을 이야기하는 선에서 사태를 마무리짓기로 했다.
그 다음날 저녁, 이제 아이가 우유에 손을 대지 않겠지 생각하고 주머니를 확인했지만, 역시 주머니속엔 아무것도 들어 있지 않았다. 아이 부모에게도 그렇게 타일렀건만 여전히 고쳐지지 않은 아이의 손버릇을 생각하니 마음 한구석이 씁슬해지려는 찰나, 대문 주위의 바닥에 뿌려진 우유 흔적들이 눈에 들어오는 것이었다. 그 흔적을 따라 가본즉슨, 세상에 이럴 수가…. 지금껏 벌어진 우유 사건은 바로 집에서 기르는 강아지의 소행이었다. 개집 안에는 지금껏 강탈(?)해간 우유팩들이 갈기갈기 찢겨져 있었고, 경악을 금치 못하는 주인의 눈초리에도 아랑곳없이 강아지는 우유를 홀짝홀짝 빨고 있었던 것이었다.

글쓴이 조효순은 대전광역시 중구에 살고 있다.


빗살무늬 와이셔츠
지금은 교통문화가 많이 성숙해져 운전자와 조수석 탑승자들이 안전띠 단속 유무와 관계없이 스스로들 잘 맨다. 그러나 내 남편의 빗살무늬 와이셔츠 해프닝이 있었던 그 시절만 해도 그렇지 못한 경우가 거의 다반사였다.
10년도 더 지난 사연인즉, 남편의 직장이 시 외곽으로 발령이 났었다. 차가 없던 남편은 당장 출퇴근이 제일 고역이었는데, 한 달여를 고생하던 중 궁하면 통한다고 남편 친구의 친구 중에 같은 방향이 있어 요즈음 말로 카풀을 하게 되었다.
남편의 직장은 늘 정장을 입어야 했고 그때가 여름이었기에 거의 매일 와이셔츠를 갈아입어야 했다. 그런데 카풀을 하고 첫날부터 매일 와이셔츠에 대각선 방향의 때를 묻혀 오는 거였다. 빨래를 해야 하는 내가 까닭을 물었더니 남편도 이상하다고만 했다. 서로 이상하다 하면서도 며칠이 흘렀고, 때의 위치가 조금씩 바뀌면서 농도가 점점 옅어져가고 있던 어느 날, 퇴근해 들어온 남편이 빗살무늬 범인을 잡았다며 호들갑을 떠는 거였다. 그때 마침 우리 집에 와 계시던 시어머니와 자초지종을 다 듣곤 얼마나 웃었던지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결론부터 말하면 범인은 조수석의 안전띠였다. 남편은 평소 ‘안전띠는 생명띠’ 신봉자였는데, 문제의 그 카풀 차량의 조수석 안전띠는 매는 사람이 거의 없다 보니 6~7년 동안의 묵은 때가 끼여 있었고, 따라서 늘 안전띠를 매는 남편이 앉은 위치에 따라 대각선의 묵은 때가 조금씩 위치를 달리해가며 와이셔츠에 빗살무늬를 찍어내고 있었던 거였다. 아쉬웠던 건(?) 범인을 잡았을 때에는 그 문제의 묵은 때가 거의 다 지워져 가고 있을 때라는 것이었다. 남편은 내 와이셔츠로 안전띠를 깨끗하게 해줬으니 세탁비를 톡톡히 받아야겠다며 농담을 했다.
고의는 아니었지만 미안했던 그분은 뒷날 당장 안전띠를 깨끗하게 세탁하기에 이르렀고, 다가온 주말 그분 가족과 우리 가족은 빗살무늬 와이셔츠 이야기를 안주 삼아 단합주를 마셨다. 터져나오는 웃음 때문에 배꼽을 잡으면서 말이다. 그분과는 그 시절 그 사건으로 인해 지금에 이르러서 남편과는 친구의 친구가 아닌 십년지기 친구로 자리매김하기에 이르렀다.
여러분! 어떠세요. 안전띠 생활화 꼭 필요한 거 맞죠?

글쓴이 김은주는 경남 진주시에 살고 있다.

언니와 여름
칠월이 되면, 아니 여름이면 으레 떠오르는 생각이 있어 빙그레 웃게 되는 요즘입니다. 시골에서 자란 나에게는 여름이면 수영도 잘 못하지만 강가를 떠나지 못하고 여름방학 내내 수영을 하러 동네 앞개울에 가곤 했는데…. 그날도 언니랑 함께 수영하러 가면서 있었던 작은 에피소드입니다.
수영을 하고 나서 물에서 나오게 되면 젖은 옷을 갈아입어야 하기에 팬티를 하나 가지고 간다는 것이, 들고 가기가 귀찮아 입은 속옷 위에 팬티를 하나 덧입고는 강으로 향했습니다. 그런데 강에 도착하자마자 물을 본 나는 너무 좋아서 입고 간 속옷을 벗어놓아야 한다는 것도 잊고 물속에 들어가서 정신없이 놀았지 뭡니까.
한참 후에야 그 사실을 알게 된 나는 언니에게서 찬찬하지 못하다는 꾸중을 듣고 말았어요. 그리고 돌아오는 길에 언니와 저는 젖은 옷을 강에서 집에 오는 거리 중간까지 번갈아 들고 가자고 했는데…. 내가 먼저 들고오다 집 가까이 다 온 것 같은데 언니는 들고 갈 생각도 않고 먼저 집으로 가더군요. 너무 약이 오른 나는 들고 있던 젖은 옷 보따리를 큰길 중간에 버리고 집으로 갔지요. 한참 후 옷 걱정이 된 나는 다시 길 중간에 있는 옷을 가져와 세탁을 한 후 언니가 못보는 곳에다 널어 놓고 다시 빈손으로 유유히 들어갔지요.
언니는 내가 가지고 올 것을 기대하고 있었다가 빈손으로 돌아온 저를 보더니 옷 안 가지고 왔냐며 막 뛰어나갔구요, 잠시 후 옷이 없어졌다며 울상으로 돌아왔어요. 전 누가 가져갔나 보다며 시큰둥한 표정을 지었고, 오후 내내 언니 애간장을 태우고 저녁이 되어서야 마른 옷을 가져다 주었답니다.
지금 언니는 두 아이의 엄마가 되었고, 저는 올 삼월에 결혼을 했어요. 같은 양구에 살고 있고, 늘 좋은 언니이자 친구로 살고 있어요. 요즘도 가끔 수영하러 갔던 일 얘기하면 언니는 잘해 준 게 더 많은데 꼭 그거 하나만 기억한다며 웃네요. 결혼해도 가까이 사니까 참 좋아요. 오늘도 놀러가야지.

글쓴이 안경자는 강원도 양구군에 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