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누는 행복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내 딸 수아에게 外 배은정 外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내 딸 수아에게

2003년 3월 23일에 첫 생일을 맞는 박수아를 축하한다. 무엇보다 네가 안 아프고 건강해서 너무 기쁘고 감사해. 엄마는 기적을 믿는 편인데, 넌 기적을 두 눈으로 확인시켜 주었단다. 항상 너에게 하는 말 있지! 외할아버지는 ‘예쁜 수아’, 외할머니는 ‘착한 수아’, 아빠는 ‘건강한 수아’, 이 엄마는 ‘대단한 수아’라고…. 서로들 내 말이 맞다고 한마디씩 하곤 한다. 너를 낳던 해에 기분좋은 일도 일어났단다. 경품 추첨에서 엄마 아빠는 각각 금 1돈이 당첨되었지. 그래서 우리 수아 생일 잔치 때 목에 걸어 주기로 했어. 너는 기적을 몰고다니는 아기인가봐.

너는 엄마 아빠에겐 세상의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단 하나의 보석이지. 임신 7개월에 임신중독증에 걸려서 병원에 입원해 있는 동안 엄마는 정말이지 힘들었단다. 복수 때문에 숨쉬기가 힘들고 계속적인 약물 투여로 음식물을 토했을 때에도 뱃속에 있는 널 생각하면서 용기를 내었어. 그러다가 복수가 폐에까지 차올라 어쩔 수 없이 널 세상 밖으로 내보내야 했을 때는 너에게 미안하고 안쓰러워서 참 많이 울었단다.

임신 30주만에 770g의 아주 작은 몸으로 태어나서 튜브와 주사 바늘에 꽂힌 채 인큐베이터에서 자라던 그때의 너는 지푸라기 같은 가느다란 희망이었어. 그런데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고 네가 72일만에 퇴원을 해서 내 품에 꼬옥 안겼던 순간, 꺼질 듯 피어오르던 희망의 불빛이 강렬하게 가슴에 점화되어 이 엄마를 감동으로 태워 버렸단다. 너의 몸은 신생아실의 어느 아기보다 작았지만 에엥 에엥 우는 소리는 제일 컸었어. 간호사들도 네가 똘망똘망하고 목소리가 우렁차다고 그러셨지.

아직 미완성의 몸이라서 산소 호흡기와 안대를 하고 세상 빛도 제대로 못본 채 인큐베이터에서 커가던 우리 아기…. 세상에 나와서 한참 후에야 마침내 망막이 다 자라서 엄마를 보고 방긋 방긋 웃는 걸 보면 그 기쁨과 감사함에 막 소리내어 기도하고 싶었어. 너무나 기특하다. 우리 아기…. 터미네이터 손처럼 각진 큰 손과 두터운 발 그리고 사내아이처럼 세차게 뻗대는 것도 엄마, 아빠, 할머니, 할아버지에게는 더없는 기쁨이란다. 부디, 쎄고 건강한 사람으로 큰다면 바랄 것이 없겠구나.

엄마는 하나님께 아직 지키지 못한 약속이 있어. 네가 무사히 건강하게 자란다면 너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들려 주기로 했거든. 그때는 너를 잃을까봐 진심으로 하늘에 매달렸었지. 하나님은 항상 너와 함께 계셔. 네가 이렇게 우리 곁에 있음이 새삼 꿈만 같아서 지금도 가슴이 뛰고 벅차오른다.

내 소중한 딸 수아야! 그런 네가 건강하게 1년을 보내고 첫 생일을 맞이하니 그저 감격스럽구나. 네가 이 세상에 놓여져서 살다 보면 그렇게 예기치 못한 일들이 있어. 하지만 그런 절망적인 환경 속에서도 꿋꿋하게 버티고 살았던 너의 의지와 기적을 스스로 믿고 세상을 살아갔으면 해. 엄마가 지켜줄께.

부디 엄마, 아빠의 마음을 헤아려 주어라. 이렇게 엄마, 아빠는 너를 무척 사랑하고 있단다. ‘박수~ 아~’라고 함성 속에 박수 받으라는 의미에서 네 이름을 선택했다는 아빠의 염원처럼 건강하고 밝고 예쁜 사람으로 자라나거라.
칠삭둥이 박수아에게 갈채를 보낸다.

글쓴이 배은정은 경기도 수정구청에서 근무하고 있다.

5분 할머니

그분은 팔순이 가까운 나이에 지하로 세 들어 오신 분이다.
같은 교회에 다니는 교인에게 소개받았을 때 곧 돌아가실 것만 같아 당장 대답을 못했다. 짐을 푸시고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 보니 전도사 생활을 오랫동안 하셔서 아는 것도 많으시고 심성도 착한 분이셨다. 이북에서 태어나 그 곳에서 여학교를 졸업하고 결혼까지 했으나 자식 못 낳은 죄로 이혼 당하셨다고 한다. 6.25 때 친정 가족들과 월남했으며, 친척이라고는 조카 둘만 있는 외로운 분이셨다. 신체도 크시고 성격이 호방하여 젊었을 적에는 들과 산을 좋아하고 뚝섬 경마장도 여러 번 찾았다며 그 때 얘길 들려 주곤 했다.

하루는 앓는 소리가 나서 들여다보았더니 침대에서 떨어져 허리를 다치셨다는 것이다. 병원에 입원시키고 여러 날을 간병했으나 나도 바쁜 몸이라 친정 조카가 모셔가게 되었다. 한 달도 못되어 조카며느리가 직장을 구했다며 다시 돌아오셨는데, 그때부터는 소리가 나도, 조용해도 걱정이었다. 이때는 시골에 사시는 시어머니께서도 당뇨가 심하여 병원에 다니고 계셨다. 시아버님도 같이 오셔서 시부모님께 밥상을 차려 드리고, 시부모님 몰래 다시 상을 차려서 3층에서 지하까지 하루 세 번씩 오르내리면서 근 한 달을 수발했다. 누가 도와 주지 않으면 움직이지도 못하는 처지라, 사서 이런 고생을 한다는 회의도 가졌지만, 시골에 혼자 사시는 친정 어머니 생각과 함께 하느님을 믿는 성도의 인연이라고 마음을 다잡곤 했다.

가끔 목욕도 시켜 드렸는데, 워낙 몸집이 크신 분이라 내가 쓰러진 적도 있었다. 나도 지쳐서 조카와 상의하여 인천에 있는 무료 양로원으로 모시게 되었다. 그때가 팔순이라 성도들과 식사를 나누고 떠나게 되었는데, 가기를 싫어하셔서 부둥켜안고 눈물바다를 이루었다. 며칠 뒤에 찾아 뵈었더니, 공동 생활에 적응이 안 되고, 왕초 할머니가 서러움을 준다며 울먹이셨다. 얼마 뒤에는, 전에 다친 허리가 악화되었다며 휠체어를 타고 계셨는데, 그 모습을 보자니 눈물부터 앞을 가렸다.

그 뒤로도 매달 한 번씩 정기 방문을 했다. 그분이 좋아하는 반찬과 과일, 과자들을 가져가면 초등학생이 소풍 온 것처럼 나누어 들면서 즐거워하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그 사이에 별명까지 얻어 ‘5분 할머니’로 통하고 있었다. 헤어질 때마다 두 손을 잡고 시계를 가리키면서 5분만 더 있다 가라고 애원했기 때문이다.
그러기를 5~6년, 지난 겨울에는 머지않아 돌아가실 것 같은 예감이 드셨는지 귀에 입을 대시고는 “그 사이 정말 고마웠다. 마지막으로 오리고기 한번 먹을 수 있겠니?” 하여 휠체어에 태우고 가까운 음식점까지 모셨는데, 2~3번밖에 못 드셔서 가슴이 아팠다.

이 할머니의 마지막 소원은 양지바른 곳에 잠드는 것이었다. 찾아줄 핏줄도 없어 여러 사람들이 화장을 건의드렸으나 막무가내였다. 그러다가, 지난 달에 부음을 접하였고 목사님과 나이 드신 권사들이 동참하셔서 조촐하나마 가족 공원에다 묘소를 차려 드렸다. 주위에서는 나를 두고 친딸처럼 보살폈다는 말들을 하지만, 마지막까지 모셔드리지 못한 게 못내 아쉬움으로 남는다.
전도사님, 이젠 하느님 곁으로 가셨으니 평안한 하루하루가 되시길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글쓴이 고순자는 서울 구로구 오류동에 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