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가르치며 우리 반의 창영이형 임경희


여자 담임
돌이켜 보면 행복한 한 해였다.
2월 22일, 부임 인사를 하기 위해 신동욱 교장 선생님을 뵈었다. 햇볕이 환하게 들어오는 교장실에서 녹차를 주시며 말씀하셨다.
“참 우리 학생들 좋은 아이들입니다. 만약 여러 선생님들이 그 동안 시도해 보고 싶은 것들이 있다면 이 학교에서 기꺼이 해 보십시오. 이 아이들은 다 따라 줄 것입니다.” 그리고 덧붙이셨다.
“우리 학교는 남자 학교라 여자 선생님들은 담임이 없습니다. 그저 교과만 열심히 맡아서 해 주시면 됩니다.”
그런데 며칠 뒤 학교에서 전화가 왔다.
“저희 학교에서는 처음 해 보는 모험입니다. 여러 가지로 어쩔 수 없는 상황이 되어 어려우시겠지만 담임을 맡아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느닷없는 교감 선생님의 전화였다.
나는 그렇게 얼떨결에 충남고등학교 40년 역사에 첫번째의 여자 담임이 되었다. 마치 장거리 오래 달리기에 선두주자가 된 것 같아 몹시 부담스러웠지만 최선을 다하겠다고 다짐했다.
“여러분은 여자 선생님이라 어쩌면 실망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선생님은 끊임없이 노력해서 그 실망을 없애도록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선생님은 앞으로 여러분과 모든 것을 같이 해나갈 것입니다. 단 체육대회에서 여러분과 함께 축구는 하지 못할 것 같습니다. 그것은 선생님이 여자라서가 아니라 선생님 자신이 체육에 워낙 소질이 없기 때문입니다.”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지켜보고 있는 36명의 학생들, 그리고 그 뒤에 서 계시는 학부모들 앞에서 한 약속이었다.

방문
어떻게 ‘행복한 교실’에서 만난 그 착한 아이들 36명을 다 이야기할 수 있겠는가. 그중 한 학생을 소개하겠다.
창영이, 학급을 맡으면서 가장 빨리 이름을 외었던 아이. 나이가 많아 학생들이 ‘창영이 형’이라고 부른다. 우선 검정고시 출신이라는 것, 긴 머리, 수업 태도, 아무 곳에나 침뱉는 모습 등등…. ‘저요. 이런 사람이에요’ 자기를 소개하는 편지에 ‘술을 마시고, 담배를 피우고 있고, 자신이 말썽을 피워 담임 선생님이 고생 좀 하실 거’라고 써 냈다. 퍽 신경이 쓰였다.
며칠 뒤 창영이 아버지의 전화를 받았다. 3월 둘째 주 토요일 오후, 창영이 아버지(46세)가 어머니와 함께 학교에 오셨다. 여러 가지 가정 환경을 말씀하셨다. 후배 빚 보증을 잘못 서서 다니던 직장과 집을 잃어버리고 아이들과 아르헨티나에 건너가 1년 살다 실패하고 돌아온 이야기, 채무 관계로 부부 사이가 서류상으로 이혼되어 있다는 이야기, 지금은 원룸에서 온 가족이 살고 있다는 이야기, 기초가 하나도 없는데 학원을 보낼 형편도 못 된다는 이야기, 모든 것이 엉망이니까 그저 선생님만 믿겠다는 말을 마지막으로 하신다. 말씀하시면서 두 손을 떨고 계시는 모습이 어쩐지 심상치 않게 여겨졌다.
다음날 창영이랑 이야기를 해 보았다. 가까이서 이야기해 보니 처음에 가졌던 선입견보다 훨씬 장점이 많은 것을 알았다. 우선 방과 후 학교에서 실시하는 학력증진반에서 수학과 영어를 듣도록 하였다. 열심히 해 보겠다고 한다. 다행이다.

창영이 아버지
8월 개학 후 창영이로부터 아버지가 두통이 심해 병원에 갔다가 뇌종양임이 판명되었다는 놀라운 소식을 듣게 되었다. 병원에서는 일단 뇌 수술은 하였으나 가망이 없어 앞으로 얼마 사시지 못할 거라는 진단을 내렸단다. 어디 계시냐고 물었더니 집에 와 계신단다. 퇴근 후 병문안을 갔다. 침대에 누워 계시다가 일어나시려고 하는 것을 제지하고 다가가 손을 잡아 드렸다. 손이 차갑다. 머리에는 수술 자국이 보인다. 체격은 반쪽으로 줄어드신 것 같다. 세상에 이렇게 변했을 수가. 누워 계신 아버지의 눈에서 눈물이 주루룩 흐른다.
“창영이가 학교에서 잘 하고 있으니까 창영이 걱정은 하지 마세요.”
내 목소리도 이상하다.
아버지가 턱을 끄덕인다. 창영이는 고개를 떨구고 있다.
반장 일형이와 부반장 호연이에게 창영이 아버지 이야기를 했다. 그랬더니 학급회의 후 학급 전체가 같은 반 친구로서 조금이나마 창영이 아버지의 병 간호에 도움이 되고자 정성을 모으기로 했단다. 이들은 며칠 뒤 용돈을 모아 성금 100만 원을 전달하였다. ‘창영이 형이 무엇인가 아버지를 위해서 써달라’고. 나는 창영이를 위해 무료 급식 지원 신청을 했다.
창영이가 학교에 오지 않았다. 무슨 나쁜 소식이 있을 것 같아 가슴이 철렁하다. 조금 있다가 헐레벌떡 달려오는 창영이를 본다. 이유를 물어 보았더니 창영이는 밝게 웃으며 대답한다.
“아침에 아버지가 싸셨거든요. 뒤처리 하느라 늦었어요.”
원룸에서 아버지의 병 간호하면서 학교에 다니는 창영이의 구김살 없는 말투이다. 흡사 어린 조카랑 조금 전까지 놀다온 즐거운 표정이다.
“그래. 아버지는 좀 어떠시니?”
“예. 이제 못 걸으세요.”
난 가슴이 저려 말없이 그냥 창영이의 어깨만 두드린다.

우정
12월 5일, 창영이 아버지는 돌아가셨다. 기말고사가 시작되는 전날이었다. 누구보다도 성적에 민감한 인문계 고등학교 아이들이 아닌가. 한참을 생각하다가 조회 시간에 이렇게 말했다.
“어젯밤 창영이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너희들이 성년이라면 달려가 함께 밤을 지새워야 할 엄청난 큰일을 당했다. 그러나 오늘 장례식장엔 일형이와 호연이만 데리고 갔다 오겠다. 창영이가 돌아오면 살아가면서 미안한 마음을 갚도록 해라.”
아이들은 일제히 소리를 질렀다. 모두 다 아우성들이었다.
그날 밤 모두들 그 쓸쓸한 장례식에 몰려갔다. 외아들이라 혼자서 상주 노릇을 하고 있던 창영이는 아이들이 문상을 마치자 어서 집에 가서 시험 공부하라고 밀어냈다. “아버지 살아계실 때 공부 못해 드린 것, 후회스럽다. 일분 일초가 아깝다. 어서 가서 공부해라.”
이 장례식의 광경에 목이 메었다. 어떻게 이 아이들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정말 이 아이들이 자랑스럽다. 아버지의 장례식에서 이들의 우정은 더 깊어졌다. 누군가 인생을 다 살아 보려면 세 가지를 해 보아야 한다고 말했다. 그 중에 한 가지가 돌아가신 부모를 산에 묻고 오는 것이다. 틀림없이 창영이는 이 아버지의 장례식 후 더욱 성숙할 것이다.

비결
며칠 전 수업을 마치고 교무실로 오는데 복도에서 조혜란 선생님이 등 뒤에서 부른다. 지금 막 9반 학생들이 영어 수업 중에 이런 말을 했단다.
“10반 교실에 가면 공기가 다르다. 우리들도 10반이 되고 싶다.”
조 선생님은 ‘비결’을 묻는다. 그러나 내가 그들을 가르친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서 많은 것을 보고 느끼고 배웠다. 하지만 굳이 학급담임으로서의 내 역할을 대답해야 한다면 그것은 ‘인정과 격려’이다.
나는 알고 있었다. 학생들은 야단치고 꾸짖는 대로 변해 가는 것이 아니라, ‘인정해 주고 격려하는’ 만큼 변해 간다는 것을.

글쓴이 임경희는 충남고등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