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가르치며 임경희의 교단일기 임경희


겨울밤 , ' 해녀' 를 읽고

전사(戰士)처럼 일상을 씩씩하게 살아가다가 어느 순간 문득 ‘인생이 너무 팍팍하지 않은가’ 하는 질문에 사로잡힐 때가 있다. 그러면 하던 동작을 멈추고 한참 동안 고장난 인형처럼 정지된 자세로 멍하니 있게 된다. 정말 살아간다는 것은 무엇일까. 인간들의 영원한 화두(話頭).

부끄러움의 정체

어제도 이 감정의 수렁에 빠졌다. 수업 중 필기하는 학생들을 기다리다가 교실 창문 너머로 교정의 눈 쌓인 정경을 무심코 바라보다 그랬다. 퇴근길에 황폐한 내 영혼을 위로하기 위해 퇴근길 서점에 들러 책 한 권을 샀다.

책의 이름은 ‘해녀’. 작가는 이양지. 재일 동포 여성. 1955년생. 28세 때 쓴 작품이다. 이양지는 1992년 5월, 심근염으로 37살에 요절했다. 그녀는 생전에 일본에서 작가로서 가장 권위 있는 아쿠다가와상을 수상했고, 한국으로 건너와 서울대학교, 이화여대 무용대학원을 다녔으며, ‘나비타령’, ‘유희’, ‘돌의 소리’ 등 의식 있는 작품을 쓰면서 열정적으로 살았다.

이 책을 다 읽은 후 내가 갖게 된 감동을 분석해 보았다. 단지 그녀의 국내의 어떤 다른 작가도 경험하기 어려운 일본 거주 한국인이라는 지역적 상황에 따른 특이한 체험 때문인가. 그렇다면 이 ‘부끄러움’의 정체는 무엇인가.

‘이양지. 일본인도 한국인도 아닌 중간인 재일 동포 여자. 일본에서 나고 일본에서 자랐지만, 끊임없이 한국인임을 자각하고 한국인이고 싶어했던 여자’. 그녀의 그런 속성에 나는 당혹스러움을 느낀다. 이 땅에 사는 우리들은 어떠한가. 일본의 가전제품을 선호하며 우리 젊은 세대들의 일본문화에 대한 그 전폭적인 애정은 너무 지나친 나의 편견과 기우(杞憂)인가.

적당히 쉽게 살고 싶어하는 우리들은 일본어를 몰라도 일본의 패션 잡지, 영화 잡지를 갖고 있다. 읽을 줄은 몰라도 보는 것만으로도 만족하며, 빨리 어서 빨리 그들을 닮고 싶어한다.

그렇다. 우리는 분명히 한국인이면서 일본인이 되고 싶어한다. 이런 우리의 아이러니한 상황과는 대조적인 이양지의 순수한 용기가 내게 ‘부끄러움’을 주고 있는 것이리라. 끊임없이 일본인으로 동화되고 싶어하는 우리에게 자신은 틀림없는 한국인이라고 말하고 있는 그녀의 자각과 항변이 나의 의식을 흔든다.

'해녀' 로 살아간다는 것

작가 자신의 가정 환경이 불우했던 탓일까. ‘해녀’는 살아간다는 것은 고통의 연속이라고 말한다. ‘해녀’의 주인공인 그녀는 한국인 아버지와 이혼한 어머니를 따라 일본인의 가정으로 들어간다. 어린 나이로 의붓 형제들에게 느끼는 갈등과 국적이 다른 데서 오는 이질감으로 그녀는 참으로 일찍 ‘오시나이 도시요리’(애늙은이)가 되어 버린다.

초등학교 시절, 사회 과목에서 다루어질 ‘조국’에 관한 교과 내용이 두려워 공포와 고통으로 쓰러지는 이 작품의 서두는 복선을 깐 채 어둡게 시작된다. 고등학교 시절에는 의붓형제들에 의해 차례로 몸을 버리고 임신까지 경험한다. 그녀 엄마가 자궁암으로 세상을 뜨게 되자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집을 나와서 ‘술을 좋아하기 때문에 늘 술을 마시는 여자’가 된다.

하지만 그녀는 어떠한 상황에서 단순히 도망쳐 나와 술 취한 눈으로 모든 것을 몽롱하게만 바라보지는 않는다.

끊임없이 인간을 사랑하는 따뜻한 가슴을 가진 한국 여성이다. 늘 거리감을 두는 의붓여동생 게이꼬, 모든 학생들이 경멸하는 사또 선생, 그녀가 선택한 남자인 모리모또 등에게 순수한 애정을 바친다. 특히 모리모또에게 사랑을 고백하는 대목은 눈물겹다. 그녀는 이미 육체적 순결을 상실한 지 오래였고, ‘인간이 생명을 창조해 내는 일은 불가능하다고 믿기에’ 한때 자궁과 난소를 떼어 달라고 의사에게 매달리던 ‘여자’였다. 그러나 이들 모두는 그녀의 애정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일본인에 의해 언제 학살당할지 모른다는 공포를 갖고 있는 한국 여자. 죽음을 예비하며 양말을 신고 잠자리에 드는 여자. 밤길을 걸으면 등뒤가 두려워 혼자 잘 걷지를 못하는 여자. 칼이 무서워 요리하는 것을 싫어하는 여자. 이런 한국인 여자를 일본인이 어떻게 제대로 바라보고 사랑할 수 있겠는가. 부담스러워하는 모리모또 곁을 떠나온 그녀는 어느 날 밤길을 술에 취한 채 걸어 들어와 아파트 욕조에 물을 가득 받아 놓고 ‘코를 찌르는 스스로의 인간의 악취’를 씻어내기 위해 물 속으로 머리를 숙이며 죽어 간다.

“그녀의 귓전으로 제주도의 파도 소리가 들리고, 세상에서 한 번도 맛 본 적이 없는 편안함에 깊숙히 스며들며 그녀는 물 속에서 언제까지나 흔들린다.” 이 책의 마지막 문장이다.

어느날 새벽

그렇다. 상처 없는 영혼이 어디 있으랴.

사는 게 너무 재미있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과연 몇이나 있겠는가. 정신없이 허둥거리며 바삐 살아가다가 어느 날 새벽 갑자기 잠이 깨어 그 청회색 여명 속에서 뒤척이며 ‘살아간다’는 문제를 생각해 보는 것. 그것은 모든 사람의 심연에 앙금처럼 가라앉아 있는 의식이리라.

‘해녀’는 숨막히도록 바쁜 일상에서 조국이 무엇인지 잊어버린 나에게 “너희야말로 분명한 한국인이지 않은가”라고 말을 건넨다. 적당히 타협하며 살지 말고, 상황에 부딪히며 진실되게 살아가라고 나직한 목소리로 내 귓가에 속삭인다.

글쓴이 임경희는 충남고등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