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텃밭 유럽 배낭여행기 남은옥


길 위에서 길 찾기 - 여행에서 챙겨온 화두 셋

여행을 하기까지 모든 일이 순조로웠던 것은 아니다. 부모님의 허락을 받기도 쉽지 않았고, 비용도 만만치 않고, 여러 날 가야 하는 일정도 걱정되었다. 또 여권이 여행 전날까지 나오지 않아 애가 타기도 했다. 그렇지만, 무사히 여행을 마치고 일상으로 돌아온 지금, 생각해 보면 그 때 어렵게 내린 결심은 나의 지경을 넓혀준 에너지였다. 그 여행길에서 나는 몇가지 보물들을 캐어 가지고 돌아왔다.

"찾는 사람에게 길은 보인다" - 고민이 있거나 진퇴양난일 때 이 말처럼 믿고 의지할 수 있는 말은 없다.

잃었다 찾은 가방 : 로마에서 니스로 가는 기차 안에 중요한 짐이 잔뜩 담긴 가방을 고스란히 두고 내려서 앞으로 여행이 말짱 꽝이 될 뻔한 상황, '길은 찾으면 돼' 하는 생각으로 기차 안으로 뛰어들어가 정신없이 헤맨 후에 다시 가방을 되찾아왔다. 네덜란드 암스텔담에서 길을 잃고 헤매고 다니다가 뜻밖에 오스트리아 역사 박물관을 찾아내 기막힌 구경까지 한 후였다.
이탈리아 철도 파업 : 하지만 이번만은 어쩔 수 없을 것 같았다. 이탈리아 철도 노조가 파업을 해서 열차가 정상 운행을 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이대로는 숙소로 돌아가는 것은커녕 다음날 여행 일정도 포기해야 할 만큼 상황이 좋지 않았다. 어떻게든 숙소로 돌아갈 방도를 찾아야 했다.
다행히 직통 국제선과 국철로 한번 갈아타야 하는 기차가 남아 있다기에 볼로냐까지 가서 국철을 타기로 했다. 그러나 볼로냐에서 들은 대답 역시 '국철 파업'이었다. 후회할 틈도 없이 다시 길을 찾아다녔다.
고민 끝에 버스편을 알아보러 찾아간 역무원실은 길을 찾는 사람들로 말 그대로 아수라장이었다. 차례가 되어도 영어가 능숙하지 못한 역무원은 우릴 봐 주지 않았다. 그래도 꿋꿋이 기다린 끝에 숙소로 가는 마지막 열차가 운행한다는 천금 같은 소식을 들었다. 천국의 나팔 소리도 이처럼 반갑지는 않을 듯했다.

끝까지 방법을 찾으려고 애쓰고, 한 마음으로 길을 찾아 나섰기 때문에 그날 밤 해피엔딩을 맞을 수 있었던 것 같다. 앞으로 인생을 살아가면서 순간 순간 도무지 길이 보이지 않는 상황을 맞이한다 하더라도 그때처럼 침착하게, 그리고 대범하게 대처해 나간다면 해결 못할 문제란 없을 것 같다.

낭만은 살아 있다 - "낭만에 대하여~ 잃어버린 것에 대하여~" 어느 가수가 이런 노래를 불러 인기를 모은 적이 있다. 어쩌면 가사말대로 우린 낭만을 잃어버리고 사는지도 모른다.

오스트리아 빈의 시청 앞 필름 페스티벌 : 문화 속의 노년의 낭만을 느낄 수 있었다. 빈에서는 매년 뮤지컬 공연을 필름에 담아 시청사 전면에 대형 스크린을 걸고 무료로 시민들에게 공연하는 필름 페스티벌 행사를 하고 있다. 황혼녘의 아름다운 노을을 배경으로 황혼의 노부부가 많이 참여하는 필름 페스티벌은 음악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서로를 아껴 주는 방법도 보여 주고 있었다. 미리 준비해 온 방석을 서로의 의자에 놓아 주고, 쌀쌀한 저녁 바람을 막기 위해 서로에게 숄을 걸쳐 주는 모습이 그렇게 정겹고 아름다울 수 없었다. 낭만이 살아 숨쉬는 곳, 음악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는 곳, 그곳에 행복한 노년이 함께 하고 있었다.
스위스 인터라켄 : 한여름에도 눈 구경을 할 수 있는 만년설의 고장, 알프스 소녀가 금방이라도 요들을 부르고 달려올 것 같은 초원이 펼쳐진 곳, 눈이 녹아 만들어진 두 개의 거대한 호수를 끼고 있는 그곳. 이 호수를 건너면서 동화 속에 들어와 있는 듯한 착각을 하지 않을 사람이 과연 있을까? 야간 열차에서 맞이하는 밤이 그렇게 낭만적이고 행복하기는 앞으로도 없을 것 같다. 내 눈을 가득 채워 버린 별자리, 까만 밤을 가득 수놓은 북두칠성과 카시오페아…. 힘겨운 야간 열차도 행복하게 만들어 주는 자연의 힘…. 그 속에서 낭만은 살아나고 숨쉴 수 있다.

낭만은 그렇게 우리 주변에 있었다.

사람만이 살길이다 - 역시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여행 도중 만났던 사람들이다.

빈에서 만난 할아버지 : 호텔을 찾지 못해 도움을 청했더니 다른 호텔에 물어서까지 직접 인도해 주시고 어느 나라에서 왔느냐면서 즐거운 여행하고 가라는 인사를 잊지 않으시던 빈의 할아버지는 여행의 피로에 지친 여행자에게 자기 나라를 여행하는 듯한 편안함을 느끼게 해 주었다. 지금도 호텔 문을 나서며 "휴~" 모자를 벗고 이마의 땀을 닦아 내시던 백발의 인자한 할아버지가 생각나곤 한다.
독일인 부부 : 맥주의 본고장 독일에서도 제일 오래되고 유명한 호프브로이라는 맥주집에서 만난 독일인 부부와의 만남은 인종 차별이 심하다는 독일인에 대한 선입견을 벗게 해 주었다. 처음에 우리를 일본인으로 오인하기도 했지만 한국인인 것을 알고 한국에 관해 관심을 갖고 이것저것 물었다. 자동으로 열리는 한국의 지하철과 손으로 여는 독일 지하철의 차이를 이야기해 주었더니 무척 흥미있어 했다. 역을 쉽게 찾는 법을 친절하게 가르쳐 주기도 했다. 우리는 자국의 지폐에 축언을 적어 교환했다. 독일의 마지막 밤은 세상 누구나 어떤 언어를 사용하고 어떤 생김새를 하고 있거나 모두 친구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시간이었다.

결국 기억에 남는 것은 사람뿐이다. 아무리 좋은 음식을 먹어도, 좋은 그림을 보아도, 그림을 함께 본 사람, 음식을 함께 먹은 사람이 기억에 남는다. 어떤 사람과 함께하고 있느냐가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지보다 중요한 법이다. 함께하는 사람이 좋은 사람이라면 힘들고 고통스런 상황이라도 즐거운 시간으로 기억될 테니 말이다.

글쓴이 남은옥은 아산재단 장학생으로, 현재 본지 기자로 활동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