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둣돌 멧돼지와 사자 안도현

사자는 호수에서 물을 마시고 나서 크르륵, 하고 트림을 했습니다.
그때 호숫가를 어슬렁거리는 멧돼지 한 마리가 눈에 띄었습니다. 멧돼지는 사자가 가까이 있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쳇, 배가 불러서 저 녀석을 잡아먹을 수도 없군. 오늘은 저 녀석을 피해 가야겠어.’
그때 사자를 본 멧돼지는 자기를 보고 겁이 나서 도망을 치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이놈, 겁쟁이 사자야, 너 오늘 잘 만났다. 자, 나랑 한판 붙어 보자꾸나!”
사자는 참으로 기가 막혔습니다.
“나는 오늘 너하고 싸우기가 싫다. 정말 나하고 맞붙고 싶다면, 앞으로 일 주일 후, 이 시간에 이 곳에서 다시 만나자.”
멧돼지는 사자가 겁이 나서 잔꾀를 부리는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흥, 시간을 벌어 보자는 속셈이군. 어쨌든 좋다. 사자야, 약속은 꼭 지켜라.”
사자와 멧돼지는 일 주일 후에 다시 만나기로 하고 헤어졌습니다.
멧돼지는 의기양양하게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저녁 때, 식구들이 모두 모인 자리에서 멧돼지는 자랑을 늘어놓기 시작했습니다. 일 주일 후에 사자랑 맞붙기로 했다는 말을 듣고 멧돼지 새끼들은 뛸 듯이 기뻐했습니다. 하지만 멧돼지의 아내는 잔뜩 겁에 질려 머리를 내저었습니다.
“아이고, 어쩌면 좋아. 인제 우리 식구 다 죽게 생겼네!”
멧돼지는 그때서야 정신이 퍼뜩 들었습니다. 사자하고 맞서 싸우겠다는 생각이 어림도 없는 착각이라는 걸 깨달았습니다.

한참 뒤에 울다가 지친 멧돼지의 아내가 겨우 말을 꺼냈습니다.
“살아날 방법이 아주 없는 건 아니지요. 앞산 너머 산골짝에 비어 있는 외딴집 알죠?
당신은 그 외딴집의 변소에 6일 동안 들어가 계세요. 그 변소에서 몸에 골고루 똥을 바른 뒤에 사자하고 싸우러 가는 거예요. 사자가 깨끗한 것을 좋아하는 것을 역으로 이용하는 거죠.”
살아 남으려면 정말 그 방법밖에는 없었습니다. 멧돼지는 당장 외딴집의 변소로 갔습니다. 똥 냄새가 코를 찔렀지만 6일 동안 변소에서 뒹굴었습니다.

마침내 사자를 만나기로 한 날이 다가왔습니다. 사자는 멀리서 멧돼지를 보자 입맛을 쩍쩍 다셨습니다.
그런데 코를 킁킁거리던 사자가 갑자기 얼굴을 찌푸렸습니다. 멧돼지의 몸에서 나는 역겨운 똥 냄새 때문이었습니다.
“너는 죽지 않으려고 발악을 하는구나. 가엾은 멧돼지야, 네가 똥을 뒤집어쓰고 있어서 너를 입으로 물 수가 없다. 내 털 끝에 그놈의 똥이 한 점이라도 묻을까 걱정이구나.”
그리고는 사자는 고개를 돌리고 풀숲으로 총총히 사라졌습니다.

집으로 돌아온 멧돼지는 식구들 앞에서 또 자랑을 늘어놓았습니다. 자기가 사자를 이겼다고 말입니다.
하지만 아무도 반가워하는 멧돼지들이 없었습니다.
멧돼지들은 이전보다 더 불안하게 두 눈을 힐끔거리고만 있었습니다.

멧돼지들이 온몸에 똥을 묻히고 다닌 것도 아마 그때부터라고 하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