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사는 세상 유니세프 친선대사 안성기 박인숙



고귀한 사랑, 소중한 나눔
“유니세프에서 그만 두라고 할 때까지 계속할 겁니다. 이웃에 대한 사랑과 관심만큼 소중한 게 또 어디 있을까요. 처음의 순수한 마음보다는 진행되는 일 자체에 점점 함몰되는 것 같아 핵심을 비껴가지 않으려고 가끔 첫 마음을 떠올립니다.”

사람들 뇌리에 새겨진 이미지란 참 묘하다. 2003년 우리나라 영화 흥행사상 처음으로 천만 관객을 돌파한 영화 ‘실미도’. “주석궁에 침투해 김일성 목을 따오라”며 훈련병들을 혹독하게 몰아붙이는 김중위(안성기)를 보면서도, 그가 끝까지 악독하지는 않으리란 걸 관객들은 다 알았다. ‘착한 남자’ 이미지 때문이다.

‘고래사냥’‘만다라’‘남부군’‘투캅스’같은, 한국 영화가 새로운 기록을 세워나가는 영화에 출연해 오면서 안성기 씨는 ‘국민 배우’라는 영예로운 타이틀을 얻었다. 하지만 착한 역할만 한 건 아니다. 그런데도 팬들에게 그는 ‘미워할 수 없는 남자’다. 다섯 살 때부터 영화에 출연하면서 한국인의 다양한 삶을 한 몸에 녹여내 온 깊고 넓은 연기와 더불어, 스크린에서 비롯된 이미지를 그의 삶이 배신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20여 년 전, 80년대 중반이었다. 가난한 이웃을 돕는 일에 대한 관심이 싹을 틔우면서 안성기 씨는 이런 저런 바자회에 자원봉사자로 초대됐다. 좋은 일이다 싶어 몇 번 참여했는데 나중에 보니 투명성에 문제가 있었다. 그에게 돈을 쥐여주기도 했다. 이런 건 아니다 싶을 때 마침 유니세프에서 요청이 왔다..

유니세프? 아, 유엔의 그 어린이 지원기구! 느낌이 좋았고, 무엇보다도 단체의 성격이 확실했다. 한 번 두 번 자원봉사를 하면서 가난하고 병든 어린이를 어머니 같은 마음으로 돌보는 유니세프가 참 고맙게 여겨졌다. 영화가 촬영에 들어가면 예정에 없던 일이 복잡하게 꼬여 짬을 내기 쉽지 않다. 그래도 요청이 있을 때마다 참가하기를 수년. 92년 한국유니세프위원회는 그에게 ‘특별 대표’라는 명예 직함을 줬다. 그리고 1년 뒤 ‘친선대사’로 승진(?)시켰다.

“후원 회원들에게 보내는 편지 쓰고, 이런 저런 행사에 봉사자들과 함께 하면서 홍보 모델로 촬영도 해왔지요. 93년 소말리아와 에티오피아를 시작으로 베트남, 캄보디아, 부탄 그리고 쓰나미 피해가 엄청났던 인도네시아까지 8개 나라의 구호현장을 직접 살펴보기도 했습니다.”

국제연합아동기금 Unicef
United Nations Children's Fund, 국제연합아동기금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직후인 1946년 굶주리고 병든 어린이들을 돕고자 유엔총회 결의에 따라 창설된 특별기구다. 굶는 어린이들에게 긴급히 먹을 것을 전하고, 예방주사 접종으로 질병에서 보호하며, 물이 귀한 곳에 맑은 물을 공급하고, 글 모르는 어린이를 교육하고, 엄마 젖먹이기를 권장하는 등 다양한 활동을 펼친다.

어린이 생활개선에 기여한 공로로 1965년 노벨 평화상을 받은 유니세프는 20년 동안 예방접종을 통해서만도 2천만 명의 생명을 구했다. 창설 이래 만 60년간 꾸준한 노력을 해왔지만 아직도 지구촌 어린이의 행복지수는 그리 높지 않다.

“93년 에티오피아에 가서 말로만 듣던 내전과 가뭄의 엄청난 비극을 직접 봤지요. 너무 충격적이었어요. 난민촌에서 방금 아기가 죽었는데 부모는 울지도 않았어요. 작은 난민촌에서만도 하루 대여섯 명씩 죽으니까요. 너무 말라서 죽도 제대로 못 넘기는 아기를 안았을 때 그 가벼움이라니….”

농촌에서도 놀라움은 여전했다. 대여섯 살 아이들이 맨발로 먼 길을 걸어가 물 긷는 일로 하루해를 다 보내고 있었다. 그렇게 길어온 물조차 누런 흙탕물이다. 더러운 물을 마시는 등 열악한 위생환경은 설사를 일으키고, 매일 4,500명의 어린이를 죽음으로 이끈다. 설사는 전 세계 5세 미만 어린이 사망원인의 두 번째 순위. 첫 번째 원인은 잘 먹지 못해 몸의 저항력이 떨어져서 걸리는 여러 가지 질병이다.

현재 유니세프의 최대 숙제는 에이즈다. 1분 마다 어린이 한 명이 에이즈 관련 질병으로 사망하고, 또 그만큼 감염된다. 한해 약 1,500만 명이 에이즈로 엄마나 아빠를 잃는다. 가난한 아이들에게 특히 어머니의 죽음은 치명적이다. 건강하지 못한 것은 물론 교육받을 기회도 잃은 채 거리에서 떠돈다. 그러다가 어른들에게 납치돼 매춘이나 농장일 등 혹독한 노동에 시달리는 어린이만도 840만 명에 달한다.

“아이들은 자기가 죽는 지 어떤 지 상황을 잘 모르잖아요. 조금만 기운이 있어도 천진하게 웃으며 놀아요. 캄보디아에는 지뢰를 밟아 다리를 잘린 아이들이 특히 많은데, 같이 사진 찍자고 하니까 목발을 짚은 채 얼마나들 밝게 웃으며 모여드는지 가슴이 미어지더라고요. 우리 엄마 젖이 모자라서 저 어렸을 때 유니세프에서 보낸 우유 먹었대요. 성당을 통해서 옷도 많이 얻어 입었고요.”

아이들이 뛰노는 모습을 전하며 훌훌, 털털 웃던 안성기씨 목소리가 착 가라앉는다. 몸이 아픈 사람은 안 아팠을 때가 얼마나 고마운 건지 알게 된다. 비록 작은 것일 지라도 절박한 형편의 이웃에게는 큰 도움이 된다. 도움을 줄 수 있는 마음과 환경을 누린다는 게 얼마나 큰 축복인지. 때문에 자신이 오히려 더 많은 도움을 받는 것으로 여겨진단다.

현재 유니세프 회원국은 194개 나라. 157개 개발도상국가에 설치된 대표사무소는 자기나라 어린이 구호를 위한 각종 지원사업을 펼친다. 37개 나라의 국가위원회가 이를 지원하면서 자국민에게 세계의 아동문제를 알린다. 우리나라도 6.25 동란이 일어났던 1950년부터 43년간 유니세프 지원을 받았다. 94년부터는 다른 나라 어린이를 지원하는 국가위원회로 활동 중이다. 도움을 받는 대표사무소에서 도움을 주는 국가위원회로 바뀐 예는 한국이 처음이자 유일하다.



함께 사는 마음으로
유니세프 한국위원회에서 안성기 씨는 성실한 봉사자로 이름 높다. 회의에도 잘 참가하고, 약속 시간도 어김이 없다. 두 아들 또한 가끔 함께 하는데, 행사가 끝날 때까지 방해 안 되도록 먼 발치에서 기다렸다가 데리고 갈 만큼 마음씀이 자상한 아버지다. 가족들이 외부에 드러나는 것을 삼가는데도, 신발 한 켤레 못 신고 자라나는 아이들을 생각하며 남산을 맨발로 걷는 행사에 온 가족이 참가한 일도 있다고 관계자는 귀띔한다.

“요즘 대부분의 한국 아이들은 크게 부족한 것 없이 자라지요. 내 아이들부터라도 자기만 생각하지 말고 남도 돌아보면서 함께 사는 자세를 가져줬으면 합니다. 피부색이 각양각색인 어린이들이 등장하는 팸플릿을 만든 적이 있어요. 큰 아들(다빈. 18)이 다섯 살 때였는데, 내가 하는 일이 어떤 것인지 이해를 해줬으면 하는 마음으로 그림을 좋아하는 그 애를 작업에 참여시켰죠. 그 후 자연스레 유니세프와 함께 하더군요. 몽골 국제캠프에도 보냈었죠. 스스로 가겠다고 하니까요, 허허.”

아들 이야기를 전하며 환히 미소 짓던 그가 순간적으로 고개를 떨구더니 한동안 그대로다. 다시 얼굴을 든 그는 양극화 이야기를 꺼냈다.

“스크린 쿼터 반대집회를 하면서 우리 안의 양극화 얘기를 많이 했습니다. 영화계에도 상대적인 빈곤 문제가 크지요. 막연히 생각은 해왔는데, 실천 의지는 부족했던 것 같아요. 다행히 영화계는 여러 직분의 스태프들이 같이 일하는 동안은 즐거움을 나눌 수 있어요. 그런 반경을 자꾸 넓히는 쪽으로 노력을 해나가야죠. 서로 나 몰라라 하면서 섭섭한 마음만 쌓아가면 더 큰 일이겠지요.”

인터뷰를 마치고 거리로 나섰다. 손에 든 팸플릿에 자꾸 눈길이 간다. ‘☆ 1만원: 영양실조 어린이 15명에게 고단백 분말영양식 한 끼 ☆ 2만원: 어린이 130명에게 홍역 예방접종 ☆ 3만원: 난민 어린이들의 추위를 막아주는 따뜻한 담요 10장…’. 1만원, 2만원이라는 글자가 가슴을 파고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