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편지 겨울엔 편지를 쓰세요 전숙희



겨울 하면 온돌이 생각나고 겨울의 온돌에서는 따끈한 아랫목이 생각납니다. 편지는 주고받는 소식과 그리움이었습니다.

지금 신세대들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감정이겠지만 적어도 20세기를 함께 살아온 구세대의 감정은 거의 같으리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지금도 겨울이 되면 옛날의 온돌방 아랫목이 그리워지곤 합니다. 따끈한 아랫목에 이불을 펴고 그 속에 앉아 책을 읽기도 하고 그리운 사람들에게 편지를 쓰기도 하고 보내온 편지를 읽기도 하는 따뜻함과 기쁨은 진정 최고의 행복한 순간들이었습니다.

나는 참 편지를 쓰기도 좋아했지만 받아서 읽는 기쁨은 더할 수 없이 컸습니다. 나의 젊은 날에는 친구도 편지로 시작되었고 연애도 연필이나 철필로 쓴 편지로 시작되었습니다. 지금처럼 핸드폰이나 이메일도 없었거니와, 직접 손으로 쓴 글씨편지가 너무나 가슴에 스며오던 시절이었습니다. 나는 그런 편지를 가장 많이 받고 또 쓴 사람이라고 하겠습니다.

학생시절부터 연애편지를 받아 학교 담임선생님이나 집안의 부모님들께 혼이 난 일이 한 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1950년대 문단에 진출하고 난 이후부터는 문우들과 편지가 주로 오갔습니다. 내가 진작 세월과 역사를 짐작했다면 그 시절 문우나 선배들에게서 받은 편지들만 꼬박꼬박 간직했다 하더라도 지금쯤은 문단의 큰 보물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 귀중한 편지들을 읽고 답을 쓰고 나면 버리곤 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아까운 일이지요.

연애편지도 많이 받았습니다. 고등학교 시절부터 대학졸업 때까지 남학생들로부터 수없이 많은 편지를 받았습니다. 그 당시로서는 편지라는 매개체 이외에는 달리 이성간의 감정을 표현할 길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호기심과 떨리는 가슴으로 받은 편지를 뒷방이나 화장실에서 몰래 읽고 나면 내가 무슨 큰 죄나 저지른 것처럼 겁이 나 아궁이나 장작불 속에 태워버리곤 했습니다.

대학을 졸업하던 해, 스물두 살에 나는 편지를 주고받던 세브란스 의과대학 졸업생과 결혼을 하게 되었고 그 후로 나에게는 편지하는 남자가 없어졌습니다. 편지가 중매가 되어 만나고 사랑하고 결혼한 우리는 아들 낳고 딸 낳고 2남 2녀를 둔 부부가 되어 평범한 나날을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정이 좋은 부부라도 더러는 싸움이 있게 마련이지요. 그럴 때마다 열이 오르면 나는 속으로 그 옛날 애걸복걸하며 사랑한다던 편지 생각을 하곤 했습니다.

세월이 흘러 큰아들이 독일로 유학을 가게 되었습니다. 집을 떠나간 지 한 달이 지나자 아들에게서는 봉함엽서에 쓴 편지가 주말마다 부쳐오곤 했습니다. 서투른 독일어와 공부 이외에는 대화할 친구도 없고 이웃이나 가족도 없는 외국에서 외롭고 쓸쓸한 마음에 어머니를 향해 고국을 그리며 한국말로 편지를 쓰기 시작한 것입니다. 마주 앉아 이야기를 하듯 자상한 그 날 그 날의 생활을 깨알같이 써 보내곤 했습니다. 그 당시 독일과는 장거리 전화도 어렵고 단지 편지만이 소식의 창구였습니다. 얼마나 외로우면 그럴까, 나는 한 달에 두어 번이나 답장을 했을 뿐이나 그 편지들은 너무나 소중한 모자간의 사랑의 증거품이었고 그 시대의 한국과 독일의 시대상, 교육의 현상이기도 했습니다. 나는 상자로 하나 가득 되는 그 편지를 외로울 때마다 시간이 있을 때는 꺼내서 다시 읽곤 합니다.

아들 자신은 이 수많은 편지를 보며 그런 일이 있었던가, 내가 그렇게 외롭고 가난하게 장학금만을 의지하고 독일 사람들처럼 1전을 아껴가며 지독하게 살아왔던가 하고 자기가 살아온 지난날들이지만 스스로 감개무량해 하기도 했습니다. 나는 그 많은 편지들을 아들이 학위를 얻고 결혼을 하고 직장을 갖고 자녀들과 살아가고 있는 지금도 깊이깊이 간직하고 있습니다.

편지란 이렇게 주고받는 그때의 소식이요, 감정이기도 하지만 한 시대 어느 한 사람의 생애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21세기인 오늘에 와서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 오고 가던 순수한 편지라는 것은 사라져가고 있습니다. 단지 12월이나 1월이 되면 ‘근하신년’이라는 성탄절과 새해인사를 겸한 카드들이 대성황을 이루고 있습니다. 카드는 점점 더 화려해지고 그 안에 축복의 말들은 한결같이 아름답지만 그것은 모두가 내 말이, 내 글씨가 아닌 현란한 허상에 불과함이 쓸쓸하기도 합니다.

과거, 가을은 사색과 화합의 좋은 계절이고 겨울은 편지를 쓰고 받기에 가장 적당한 계절이었습니다. 그러나 현대의 겨울은 사람들의 마음을 안에서 밖으로 끌어내는 힘이 생겼습니다. 아파트 유리창 문밖으로는 흰 눈이 내리는 깨끗하고도 조용한 풍경이 아름다운 겨울 아침, 사람들은 따뜻한 내복에 두툼한 잠바나 외투를 차려입고 밖으로 나갑니다. 흰 눈을 밟으며 걷기도 하고 차를 타고 친구나 가족들과 함께 드라이브를 즐기기도 합니다.

겨울은 참으로 포근한 사랑의 계절입니다. 성탄절이 있고 설이 있어 친구들과 가족들이 화합하는 따뜻한 계절입니다. 이 겨울에 우리는 서로 더욱더 사랑하고 편지를 띄우고 인정을 나누는 아름다운 삶을 누리십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