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불어 사는 삶 웃음으로 통일을 꿈꾸는 림 일씨 김지영



자기의 그릇이 아니고는 음식을 먹을 수 없는 여우와 두루미의 우화가 있다. 올해로 분단 55년. 남과 북의 동포들은 다른 성장환경과 경험세계에 오랜 시간 놓여짐에 따라, 점차 서로의 언어를 이해하지 못하고 먹을거리를 나눌 수 없는 여우와 두루미가 되고 있는지도 모른다. 국민가수 조용필 씨가 이러한 ‘벽’을 허물기 위해 평양에서 ‘돌아와요 부산항에’를 부르던 그 시간, 새터민 림 일 씨는 ‘평양청년의 서울살이 8년’을 유쾌하게 풀어낸 책을 내고 ‘평화의 전령사’를 자처하고 있다.

친구를 통해 세상을 알아 가는 평범한 15세를 지나던 그는, 아버지가 외교부에 근무하는 동무 집에서 갖가지 진귀한 물건들과 음식을 접하며 문화적 충격을 경험한다. 뿐만 아니라 88올림픽 개최국이 남한이고, 공식 국호가 ‘대한민국’이라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된다. 그 날 이후, 새로운 세상에 대한 막연한 동경을 품은 채 성장한 림 일 씨는 ‘대외건설기업소’에서 최고급 노동자로 일하게 된다.

“일종의 당 외화벌이 차 러시아로 파견근무 다녀온 동무들에게 현대자동차가 일제차에 비해 결코 뒤지지 않더라는 얘길 들었습니다. 이런저런 사실로 볼 때 남한의 경제가 발전되었을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했지요. 그렇다면 사람이 한평생 사는 것, 더 좋은 곳에서 더 멋지게 살아보자고 결심했습니다.”

림 일 씨는 “태어나고 자란 어머니 품 같은 고향, 평양이 싫어서가 아니라 보다 나은 삶의 질을 찾아”서, 시대가 부여한 무거운 짐을 진 채 사선을 넘는다. 쿠웨이트 주재 조선광복건설회사에 자원해서 일하던 1997년 3월, 마침내 한국으로 망명한 것. 스스로를 막다른 곳에 세울 수 있었던 그의 주도면밀함과 용기는 그의 관심이 ‘삶’ 자체이지 결코 ‘이념’의 문제가 아니었음을 말해준다.

“무엇보다 자유로운 것이 좋았습니다. 일하고 싶으면 하고 하기 싫으면 안 해도 되는 거요. 물론 응분의 대가는 따르지만 자기가 선택하고 책임지면 된다는 게, 조직 위주로 살던 저에게는 가장 숨통 트이는 일이었습니다.” 자유의 땅을 밟은 그의 첫 소감이었다.

하지만, 숨을 막히게 하는 차이점들도 많았다. 우선 ‘공원 속 도시’로 불리는 평양에서 살던 그가, 서울에서 피부로 느낀 소음 수치는 엄청났다. 도로는 항상 막히고 어느 곳이나 사람으로 북적대고, 뉴스에서는 정치인들의 몸싸움과 삿대질이 오갔다. 게다가 아내가 남편의 뺨을 때리는 TV 드라마의 한 장면은 점입가경이었다. 놀란 나머지 방송국에 전화를 했을 정도다. 이 밖에도 평양에서는 ‘조국 해방 기념일’이 서울에서는 ‘광복절’이고, 그가 가장 좋아하는 ‘햄버거’는 평양에서 ‘고기 겹빵’이었으니, 알아듣지 못하는 말이 많아서 한 동안은 통역이 필요했고, 외국인처럼 서울말을 배워나갔다고 그는 하소연했다.

북녘의 아이들도 우리의 미래

이렇게 두 체제 간의 이질성이 갈수록 심화되는 상황, 그리고 새터민이 조선족이나 동남아인보다도 못한 존재로 여겨지는 냉담한 사회적 시선 등 전반적인 문제의식을 느끼던 중, 림 일 씨는 역사적인 장면을 지켜보게 된다.

2000년 6월 15일 평양에서 분단 사상 최초로 남북 두 정상이 뜨거운 악수와 포옹을 나눈 것. 더구나 김대중 대통령의 비행기가 도착한 ‘평양 순안 국제공항’은 3년 전 림 일 씨가 부모님과 친지들의 환송을 받으며 고향을 떠나왔던, 만감이 서린 장소였던 것이다. 누구보다 남다른 감회에 젖어 하루를 보냈을 그는, 가슴 싸한 아픔 속에서 작은 희망을 움틔운다.

“바로 그날, 남북이 함께 웃을 수 있는 책을 하나 써 보자고 생각했습니다. 체제, 이념, 사회문제 등 ‘색깔’은 모두 배제한 채 평양의 30대 청년 눈에 비친 서울의 모습을 재밌게 그려보자는 거였죠.”

하루 6시간을 컴퓨터 앞에 매달려 가까스로 탈고한 원고를 들고 출판사를 직접 찾아다니기를 수개월. 마침내 ‘평양으로 다시 갈까’라는 역설적인 제목의 책을 냈다. ‘웃음이 곧 평화’라고 믿기에 자신의 책을 ‘웃음 도서’라고 이름 붙이고, 김정일 국방위원장도 이 책을 보고 활짝 웃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한다.

이 책의 판매 수익금 1%는 북한동포 돕기 운동을 하는 한 단체와 그의 공동제안에 따라 북한 최대 규모의 산부인과 전문병원인 ‘평양산원’에 기부할 예정이다. “북녘 아이들도 우리 민족의 미래인데 소홀히 하는 것은 죄”라는 그의 소신에 따른 것이다. 6,000여 새터민에 대한 멋진 이미지를 세우고 싶다는 림 일 씨. 현재, 자신의 전공인 CI 제작 분야에서의 성공과 미국 유학의 꿈도 갖고 있다. 현실에 안주하기보다는 언제나 ‘길을 잃는 즐거움’을 택하는 그이기에, 우리는 그를 진정한 ‘자유인’이라 부를 수 있겠다.

글·김지영(자유기고가) 사진·이내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