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과 수확 개마고원 감자꽃밭에서 맡은 통일의 향기 박인숙



“감자꽃 향기를 아세요? 끝없이 펼쳐진 감자밭에 송이송이 하얀 감자꽃이 눈처럼 피어났는데, 고운 향내가 얼마나 은은한지…. 감자꽃이 통일꽃이 될 수 있겠다는 설렘에 가슴이 마구 뛰었어요.”

지난 여름, 북한 개마고원에서 감자를 캐고 온 월드비전 긴급구호팀장 한비야 씨(47)는 드넓은 감자꽃밭에서 풍겨 나오던 아름다운 향기를 잊을 수 없다고 했다. 줄기를 뽑을 때마다 주렁주렁 매달려 나오는 감자를 보면서 동포의 배고픔을 덜어줄 희망의 결실이라는 감동에 손이 떨렸다고도 했다.

어릴 적 지리시간에 배웠지만 사진조차 본 일이 없는 ‘백두산 아래 한반도의 지붕 개마고원’. 북한 지명으로 양강도 대홍단인 개마고원의 해발 1,000m 지대에는 무려 2,000 헥타르, 약 600만 평 규모의 감자 재배단지가 조성돼 있다. 그 중 120만 평은 소비용이 아닌 씨감자 증식용 채종포. 100여 개 나라에서 긴급 구호사업을 펼치고 있는 월드비전이 2000년부터 북한 농업과학원과 함께 개발한 ‘바이러스 없는 씨감자’를 키우는 밭이다.

“북경을 거쳐 평양에 도착해서 먼저 농업과학원에 들렀어요. 북한 식량난 해결의 기대주인 씨감자 공장이죠. 멸균복을 입고 조직배양실에 들어가니 비커마다 가느다란 줄기에 연두색 씨감자 수정란이 좁쌀처럼 다닥다닥 자라고 있더군요. 500㎖들이 비커 하나에 든 수정란은 육모장과 온실수경재배 등 5년 동안 여러 생육과정을 거쳐 3만평에 심을 수 있는 씨감자가 됩니다. 이번에 대홍단에서 캔 대추알 만한 씨감자는 바이러스 없는 감자 원종을 노지에 심어 수확한 것으로, 일반 농가에서 밭에 심어 먹을 수 있는 감자 씨죠.”

눈을 반짝이며 미끄러지듯 빠르게 이야기하는 한비야 씨와 마주하노라면 그 열정과 내용의 무게에 눌려 좀처럼 말을 자르기 어렵다. 그렇지만 북한의 식량난을 어떻게 감자로 해결한다는 것일까?

북한에는 쌀농사 짓는 논 면적은 절대적으로 부족한 반면 산악지역이 많다. 고산지대에서 잘 자라는 감자는 기후 영향도 덜 받고 일년에 두 번 심을 수 있다. 무엇보다도 수분이 많아 오래 저장할 수 없어서 군수용 보다는 일반 농민 식량으로 적절하다. 문제는 수확량. 감자는 의외로 병을 잘 타고, 병든 감자는 수확량이 형편없다. 생산량을 획기적으로 높이려면 병 없는 씨감자가 필수적. 그래서 월드비전이 물자와 기술을 지원해 무(無) 바이러스 씨감자 생산을 돕고 있다. 3~5년이면 400만 톤의 감자를 생산해 쌀 부족분을 메울 수 있다는 계산이 나온다. 이번에 수확한 감자는 지난 5년간 지원의 결실. 이 씨감자를 밭에 심어 농민들 양식이 되게 하려면 비료와 농약 지원이 꼭 필요하다. 하지만 그것은 월드비전 같은 구호단체가 도울 수 있는 규모를 넘어선다. 민족적, 국가적 관심이 필요하다…. 또박또박 이어지는 설명에 동포의 배고픔을 덜어주고픈 열망이 가득하다.

하기야 그의 열정은 (바람의 딸, 걸어서 지구 세 바퀴 반)이라는 세계일주 여행기를 통해 이미 온 나라의 감탄을 자아내지 않았던가. 어린 시절, 지도를 벽에 붙여 놓고 식구들과 나라 위치 알아맞히기 놀이를 하며 세계일주에 대한 열망을 키우고, 수 년 동안 번 돈을 몽땅 투자해 한 발 한 발 꿈을 이뤄낸 여성. 영어는 물론 스페인어까지 4개의 외국어를 배우고 (중국 견문록) 등 6권의 베스트셀러를 내면서 지구촌 곳곳을 신명나게 모험하던 오지 여행가. 그 한비야 씨가 4년 전 세계 최대의 기독교 구호단체 월드비전에 들어가 긴급구호가로 변신한 까닭도, 전쟁과 가난에 가슴 미어지도록 찌든 파키스탄 난민촌 푸른 눈빛의 소녀를 잊지 못해 도움이 절실히 필요한 이웃을 위해 팔을 걷어붙이고 나선 것임에야.

그러고 보니 북한은 그가 93번째로 찾은 나라다. 1993년 서울을 떠나며 시작된 세계일주는 중국 쪽 압록강변에서 끊어진 구간이 한반도 땅 북한에서 다시 이어져 12년 만에, 마침내, 대장정의 마무리를 지었다.

“네팔이며 몽고에서 쌀을 나눠주면서 북녘의 내 동포들은 굶주리는데 나는 여기서 뭘 하나, 안타까운 생각이 들었었지요. 어쩔 수 없잖아요? 나는 한국 사람이고 함경도 정평에서 태어나신 우리 아버지는 가자미 식혜 같은 고향 음식을 얼마나 잘 드셨는데요. 지프차로 1시간을 달려도 끝없이 펼쳐지는 대홍단의 감자꽃을 보면서, 병 없는 씨감자를 키워내고자 온갖 노력을 다 하는 광경을 접하면서, 그동안 북한 사람들을 뭐든 달라기만 하는 염치없는 사람들로 여겼던 것이 너무나 미안했어요. 감자꽃이 활짝 활짝 피어야 북한의 형제자매들이 배고픔을 덜 테니 감자꽃을 우리의 소원인 통일꽃으로 불러도 좋지 않을까요?”

하늘을 향해 쭉쭉, 전나무들이 키 자랑을 하는 개마고원에서는 날씨가 좋으면 백두산이 손에 잡힐 듯 보인다고 한다. 우리 땅으로 밟아 오르는 백두산 관광도 이제 손에 잡힐 듯 가까이 왔다. 거기, 한반도의 정점 백두산에 선 채 개마고원에서 풍겨오는 감자꽃 향기에 흠뻑 취해보고 싶다.

글·박인숙 (객원 편집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