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과 수확 딸이 잠자고 있는 거실 문정희



그 해 가을을 잊을 수 없다. 끝없이 펼치어지는 옥수수 밭을 사가사각 지나서 나는 큰 도시에 당도했다.
내가 잠시 살고 있던 대학도시를 벗어나 3시간을 운전하여 찾아간 그 큰 도시의 이름은 시카고였다.
나는 한 그림 전시를 보러갔다. 얼굴이 희고 가냘픈 이 화가는 어린 시절 교육자인 아버지를 따라 잠시 한국의 전주에서 살았다고 하는 미국인 친구 팀 놀리였다.
그는 한국의 검정 고무신 신은 공장 소녀들과, 연탄가게와 이발소가 있는 땟국 저린 정겨운 변두리 골목을 아직껏 잊지 않고 그의 그림 여기저기에다 잘 묘사해 놓고 있었다.

그 날 저녁 팀 놀리의 저녁 초대를 받고 나는 그의 집을 방문하게 되었다. 정갈하기 이를 데 없는 가난한 살림이었다. 조용한 그의 아내가 정성껏 차린 샐러드 접시를 놓고 그는 모두를 위해 잠시 기도를 하고 싶어 했다.

“감사합니다. 무엇보다 먼저 우리의 아름다운 결실인 저 소중한 딸을 주신 신에게 감사합니다.”

나는 그가 결실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당연히 전시회에 걸린 그의 아름다운 작품들일 거라고 생각하고 있다가 “딸”이라는 말에 순간 정신이 퍼뜩 들었다.

비로소 그의 거실 한 쪽 긴 소파에 마치 담요를 뭉쳐놓은 듯 꼼짝 않고 누워 있는 한 물체를 발견하고 나는 깜짝 놀랐다. 8세 때부터 발병하여 지금 10년 째, 말 그대로 식물처럼 누워있는 딸이었다.

그래도 그는 분명 “감사하다”고 깊고 떨리는 목소리로 기도를 하지 않는가? 더구나 “우리의 아름다운 결실”이라는 말도 잊지 않았다.

나는 뭉클한 충격에 휩싸였다.

감사하다고? 아름다운 결실이라고? 나는 다시 한번 그의 딸이 누워 있는 소파를 쳐다보았다.

10년이라는 시간을 저런 모습으로 존재하는 이 집안의 저 아이를 두고 그들 부부가 치렀을 그 무수한 천국과 지옥을 상상해 보았다. 정말이지 감사는커녕 신과 운명을 수천 번을 원망하고도 남는 상황이 아니었을까. 아니, 신이 계시다면 당장 그의 멱살이라도 잡고 싶을 것 같았다.

진정한 감사란 도저히 감사할 수 없다고 생각되는 그런 것을 진실로 감사하는 마음이라고 한 말을 애써 떠올렸지만 그날 밤 팀 놀리의 집에서 받은 감동은 너무나 컸다. 결실이란 꼭 탐스럽고 자랑스러운 모습으로 오는 것이 아닐 수도 있구나. 나는 내내 그런 생각을 해보게 되었다.

그러고 보니 사방에 맺힌 자연의 가을도 그런 것이었다.

우리가 흔히 풍성한 결실이라고 표현하지만 기실 그 안에는 병충해를 입은 것들과, 반쪽 밖에 햇살을 받지 못한 것들과, 작고 빈약한 것들도 수두룩하다. 세상 어디에도 완성된 것은 없을지도 모른다. 다만 경건한 존재와 경건한 변화가 있을 뿐인 것이다.

그들은 누워 있는 딸이 초경을 했을 때, 신의 손길을 느꼈고 온 식구가 환호성을 질렀다고 했다. 원인도 모르는 병을 치르는 동안 이제는 몸이 너무 커진 이 이상비대의 그의 딸 곁으로 내가 다가가자 팀은 속삭이듯, 아니 한편의 시를 읽듯 “그녀는 지금 잠자고 있다”며 미소를 지었다. 그의 딸은 이렇게 10년 동안 한 자리에 꼼짝도 않고 누워서, 그의 가족을 성가족(聖家族)으로 만들어 놓은 것 같았다.

기실 나는 팀 놀리가 그의 집에서 저녁식사를 하자고 했을 때 조금 불만이었다. 그동안 내가 머물던 기숙사의 형편없는 메뉴에서 놓여나 오랜만에 멋진 레스토랑의 저녁식사를 꿈꾸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몇 잎의 야채만 차려진 그 집의 식사, 딱딱한 빵 한 쪽을 그들의 아름다운 결실인 딸 곁에서 조용히 먹고 일어섰을 때 나는 휘청 현기증을 느꼈다.

풍요한 것, 많이 소유하고 많이 소비하는 것, 빠른 것…. 적어도 인간의 삶이 이런 것을 목표로 할 수는 없는 것이 아닐까.

그 후 나는 가을바람이 코끝을 건드리면 뭉클하니 시카고의 그 가족을 떠올린다. 옥수수 밭으로 끝없는 아이오와 벌판과, 나의 생(生)이 휘청 현기증을 느꼈던 그 감동적인 순간을 떠올린다.

그 가을 끝없이 불던 들판의 바람, 내 영혼이 소독되는 듯한 가을 냄새, 얼굴이 하얀 화가 팀 놀리 가족의 한없이 겸허한 모습, 소중하고 아름다운 결실인 딸…. 그러고 보니 가을은 정말 풍성한 결실의 계절임에 틀림없다.

문정희 시인
1969년 (월간문학) 신인상에 작품 ‘불면’ 당선 등단. 시집 (남자를 위하여)(1996) (오라, 거짓 사랑아)(2001) (양귀비꽃 머리에 꽂고)2004) 외 다수. 소월시문학상, 정지용 문학상, 현대문학상 등 수상 동국대 석좌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