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야... 아이야, 저것이 오페라다 박현숙



호도분교 전교생 6명 초청
처음은 설렌다. 특별하다. 처음이 주는 싱그럽고 가슴 뛰는 체험은 우리의 삶을 꿰뚫는 길이 되며 지친 영혼에 따뜻한 위로가 된다. 처음의 힘이다. '아산의 향기'와 한국오페라단 박기현 단장(45)의 공동 초청으로 ‘오페라 이순신’을 보기 위해 서울 KBS홀을 찾은 희용이, 채민이, 현정이, 이슬이, 정아, 민혁이 6명의 섬마을 아이들은 오페라를 처음 보는 것이라고 한다.

부쩍 추위가 기승을 부리기 시작한 날씨, 눈발 휘날리는 칼바람을 뚫고 충남 보령시 오천면 녹도리 호도에서 서울 여의도까지 오페라를 보기 위해 아이들은 이틀 전에 섬에서 뭍 대천으로 나와 하루를 묵고 그곳에서 다시 기차를 타고 왔다. 먼 길이었으나 또한 가슴 설레는 길이었다. 볼과 콧망울이 발갛게 익은 아이들과 이들을 인솔해주신 호도분교 김문형 선생님(46)과 강인규 선생님(30)의 얼굴에는 피로감 대신 풋풋한 기대감이 어려 있다.

박기현 단장에게 자기소개를 할 때 자못 수줍었던 아이들은 다정한 박 단장에게 이내 마음을 열고 폭포수처럼 궁금한 것을 쏟아놓았다. “배우들이 그 많은 대본을 다 외우나요? 무대 어딘가에 배우만이 볼 수 있는 대본이 있지 않나요?” “오페라가 막이 오르려면 얼마나 연습해야 하나요?” “선생님 저는 노래가 장기인데요. 저도 오페라 가수가 될 수 있을까요?” 아이들다운 질문공세는 박 단장의 얼굴에 웃음을 피워 올린다. “오페라는 노래, 무용, 합창, 오케스트라가 한데 어우러지는 종합예술이란다. 한편의 오페라를 완성하기 위해 배우들은 1년 정도를 연습하거든. 무대 위에 배우가 볼 수 있는 대본은 없단다. 모두 외운 것이 맞아. 노래를 좋아하는 친구라면 오페라 가수가 될 수 있을 거라고 나는 생각해.”

막이 오르기 불과 20여 분 전, 아이들은 박 단장의 안내로 무대 뒤를 찾았다. 관객들에게 공개되지 않는 배우들만의 공간을 엿본다는 것 또한 특별한 체험이다. 박 단장은 아이들에게 그것을 선물하고 싶었던 것이다. 이순신 장군 순국 407주기와 한국과 러시아가 수교한지 15주년을 맞아 제작된 한·러 합동 오페라인 만큼 분장실에서 만난 배우들은 푸른 눈의 러시아 성악가들이다. 외국인이 조선시대 장수의 옷을 입고 상투를 튼 모습은 낯설기도 하고 이색적이다. 통역이 호도분교 아이들을 소개하자 연출가 알렉산더 페도로프 씨는 두 손을 올려 하트를 그리며 환한 웃음을 짓는다. 통하지 않는 말 대신 잘 통하는 몸짓과 웃음에 아이들은 수줍은 웃음으로 답한다.

이제 곧 막이 오를 시간, 총총걸음으로 객석에 돌아와 앉으니 막이 오른다는 신호의 종이 울린다. 붙임성 좋은 막내 1학년 민혁이는 일찌감치 박 단장 옆에 앉았다. 방금 전까지 박 단장의 무릎에 앉아있었던 살가운 아이다. 그새 채민이는 궁금한 게 생겼나보다. “야, 강이슬! 배우들 영어로 말하니? 영어로 말할 것 같은데?” 대답은 이슬이 대신 선생님이 한다. “러시아어와 우리말이 같이 나온단다. 저쪽 커다란 스크린에 우리말 대사가 나오고.” 곧이어 막이 올랐다.



무대의 배경은 1592년에서 1595년까지 임진왜란 당시 조선이다. 병사들이 웅장한 합창으로 한산대첩의 승전을 축하하는 가운데 적에게 포로로 잡혀 있다가 살아난 여인 초희와 도공이 군사들 앞에 끌려나오면서 시작된다. 첩자일 수 있으니 죽여야 한다는 원균과 백성의 목숨을 가벼이 여겨서는 안 된다고 맞서는 이순신 장군. 이윽고 여인과 도공은 장군의 도움으로 목숨을 구하나 이순신 장군에 대한 원균 장군의 반감은 커져간다. 이순신 장군은 자신의 신념과 백성들의 안위를 위해서는 그 무엇에도 굴하지 않았고 그것은 윗사람들의 오해와 모함을 샀다. 뻔한 적군의 함정에 부하들을 내보낼 수 없어 진격하라는 어명을 어긴 이순신 장군은 반역죄에 처해져 모진 고문을 받는다. 장군은 혹독한 고문 속에서도 신념을 굽히지 않고 선조를 설득하나 왕의 노여움은 더욱 커진다. 그러나 진실은 언젠가 오해의 장막을 뚫고 나오는 법, 해전의 명장이었던 이순신 장군의 생각은 정통했고 적의 함정에 빠진 원균은 목숨을 잃고 만다. 그는 마지막 순간 부하 우치적에게 자신의 장검을 주며 이순신에게 전해달라고 유언을 남긴다. 위태로운 조선을 구하기 위해 선조는 이순신을 다시 복권시킨다. 12척의 배로, 구름같이 몰려드는 왜구와 맞선 이순신 장군과 조선 병사들의 사기는 하늘을 찌르고 마침내 적들은 도망을 가며 최후의 발악을 한다. 최전선에서 진두지휘하던 이순신 장군은 적의 총에 맞는다. 병사들의 동요를 막기 위해 방패로 가리라고 하는 이순신 장군. 전쟁은 승리했으나 병사들은 장군을 잃는다.

4막 2장의 막이 내리자 객석은 잠시 숙연해지더니 환호성이 이어진다. 2개의 웅장한 합창곡(1막의 승전합창곡, 4막의 영원하리라)과 이순신의 서정적인 아리아(1막의 한산섬 달 밝은 밤)와 원균의 다이나믹한 아리아(3막의 조국을 맡아 주오), 러시아 풍 저음역의 선조 아리아(2막의 나의 권세로다), 영혼의 노래 박초희 아리아(1막의 장군을 도우소서), 무대를 가득 채웠던 거북선의 위용….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감동을 만들어낸 배우들에게 관객들은 열정적인 박수갈채를 보낸다.

호도분교 아이들도 상기되어 있다. 이슬이는 현정이 언니에게 뭔가 말하고 싶었나보다. “언니, 난 아까 마을 여자들이 다 같이 나서서 싸우는 장면이 좋았어. 참 용감한 여자들이야!” “나도! 막 따라 부르고 싶었어.” 남자 아이들은 아무래도 거북선이 나오는 장면을 잊을 수가 없단다. 언젠가 거북선 같은 발명품을 만들고 싶다며 눈빛을 빛내는 아이들을 바라보는 박기현 단장의 마음도 흐뭇하다. “얘들아, 무엇이 너희들 마음을 움직였을까. 배우들의 노래에 숨죽이고 귀 기울이게 한 것은 무엇일까? 그 느낌을 오늘 집에 가서 이 도화지 위에 크레파스로 그려보렴. 그리고 우리 10년 후에 다시 만나 내게 그 그림을 보여주는 거야. 어때?” “좋아요!” 이순신의 후예들은 눈빛을 반짝인다. 처음이 주는 감동, 특히 어린 시절의 그 특별한 느낌이 이후의 삶에 얼마나 값진 거름이 되는 지 아는 박기현 단장은 아이들에게 스케치북과 크레파스를 선물했다. 아이들은 오늘의 벅찬 감동을 그림으로 남길 터이다. 그림은 아이들에게 말이 노래가 될 수 있고 노래는 감동이 된다는 것을 가르쳐줄 터이다.

* 박기현 단장은 1989년 창단한 민간오페라단 한국오페라단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그동안 15편의 오페라를 30여 회에 걸쳐 공연했으며, 특히 창작오페라 ‘황진이’는 베이징, 도쿄, LA, 모스크바 등에서 공연해 한국적 오페라의 진수를 보였다는 평을 들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