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안의 참 평화 대화와 관용 김성수



나는 늘 사람들과 만나며 산다. 학교에 몸담기 이전에도 그랬지만 대학 총장으로서 매일 교수, 학생, 사회단체 관계자들뿐만 아니라 사회 각층의 인사들과 만나는 일이 빈번하다. 아마도 하느님께서 나를 사람들과 만나는 일을 위해 세상에 보내주셨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끊임없이 주변 사람들을 만나는 일에서 벗어난 때가 별로 없는 듯하다. 물론 나뿐만 아니라 세상 사는 모든 사람들이 수많은 만남 속에서 살아가는 모양은 다르지 않을 것이다. 어차피 인간은 관계 속에서 살아가도록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여러 다양한 사람들과 만나면서 드는 생각은 누구나 행복과 불행을 느끼는 원인이 비슷하다는 점이다. 그 가운데 가장 핵심적인 것은 아마도 관계가 아닌가 싶다. 관계 때문에 속도 상하고, 며칠을 눈물 흘리기도 한다. 또 반대로 관계 때문에 행복을 느끼기도 한다. 물론 아들이 좋은 대학에 진학을 했다거나 출세를 했다거나 하면 행복을 느끼기도 한다. 그러나 관계가 나쁠 땐 아무리 많은 재산이나 사회적 지위도 행복을 보장해주지는 않는다.

평화가 무엇일까? 세계 평화라는 거창한 것은 둘째 치고 내 안에 이루는 평화는 무엇인가? 나는 평화로운 사람인가? 참 어려운 일이다. 왜냐하면 그 누구도 이 세상 속에 몸담고 살아가면서 절대적이고 영원한 평화를 누리기는 힘들기 때문이다. 종교인들이 오랜 참선이나 관상 기도를 통해 자기 자신을 온전히 비우고 절대자의 은총의 빛 속에서 살아가지 않는 다음에야 절대적인 평화를 누리면서 살아갈 수 있을까? 또 일시적으로 그런 체험을 한다고 해도 그것이 과연 오래 갈 수 있는 것인가를 생각하게 된다.

평화는 평등과 조화라고 했다. 나는 내가 만나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행여나 조그마한 상처라도 주지 않기 위해, 그리고 내 자신의 평화를 지켜내기 위해 평정심과 조화를 유지하려고 한다. 물론 그것이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지만 나름대로 지닌 원칙이 있다면 대화는 평등하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대등한 관계 속에서 진실한 대화가 이루어지는 것이지 그렇지 않으면 대화가 아니라 보고 또는 훈시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진정한 대화는 관용을 바탕으로 한다.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이 존재할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독선과 아집에 사로잡히기 때문이다.

내가 머물고 있는 학교 교정 한 가운데에는 제법 큰 느티나무가 있다. 그 그늘 아래에서 학생들과 아이스크림 먹으면서 대화하는 것을 좋아한다. 나만의 착각일지 모르지만 이제는 20대 초반의 학생들과 거의 친구처럼 지낸다. 청년 실업이라는 넘어서기 힘겨운 큰 산 앞에서 고민하고 있을 학생들 나름대로 불안한 마음도 있으리라. 그것은 또한 총장으로서 내가 안고 있는 커다란 걱정거리이기도 하다. 그러나 대화 중에 까르르 한바탕 웃는 웃음 속에 그나마 안심과 위안을 얻게 된다. 고독으로는 절대 찾을 수 없는 평정심도 긍정적인 대화로 이룰 수 있다.

언제나 변함없는 산을 보면 우리가 이루어야 하는 평화가 무엇인지를 배우게 된다. 산 속에는 수많은 나무와 짐승과 벌레, 풀과 꽃들이 산다. 산은 무엇이 와서 살든지 다 수용한다. 그러나 산은 한 번도 그것들이 자신의 것이라고 주장하지 않는다. 살게는 하지만 소유하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관계 속에서, 그리고 내 안에서 이루는 평화의 비결이리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