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편지 ‘찌르릉 찌르릉’ 최일남



‘갓 쓰고 자전거 탄다’는 말이 있다. 벌거벗고 환도를 찬 것처럼 모양새가 영 어색하다는 뜻인데, 예전에는 그런 촌로가 심심찮게 눈에 띄었다. 갓은 또 바깥출입의 상징이므로 바지저고리는 어울리지 않는다. 두루마기 정장에 점정(點睛)을 하듯 얹어야 제격이다. 때문에 축지법이기에 다름 아닌 자전거의 속도 이미지와 동떨어져 행색이 더욱 희화적으로 비쳤을 게다.

체인에 말리지 않도록 두루마기 자락을 허리에 동여매고 신작로를 달리던 노년의 풍경이 그렇게 우스꽝스러웠거늘, 본인들은 달리는 자전거 위에서 짐짓 점잔을 뺐다. 손수 지은 손자 이름을 호적에 올리기 위해 관청을 찾고, 집으로 되돌아가는 석양녘 미루나무길이 출출하여 주막 앞에 자전거를 세우기 쉬웠다.

음주 운전의 뒤끝이 그 시절인들 무사하랴. 개굴창에라도 삐끗 구르는 날이면, 계절이 마침 여름이면, 세모시 두루마기를 망친 변고가 까진 정강이보다 더 심란하지 말란 법 없다. 안식구들의 골을 빼먹기 알맞은 것이 모시옷 수발이라는 걸 잘 아는 까닭이다.

집에서 가까운 탄천(炭川)으로 자전거를 끌고 나갔다가 마수걸이를 하듯 고꾸라진 나라고 별다를까. 실로 60년도 넘는, 까마득한 소싯적 가늠만 믿고 자전거 전용 도로에서 비틀비틀 시운전을 하다가 여러 번 당했다. 긁힌 무릎에서 당장 피가 흘렀으나 목격자가 없는 것만이 다행스러워 얼른 매무새부터 고쳤다.

5~6년 전쯤 되나 본데 그 뒤로도 자잘한 사고를 쳐 말라붙은 딱지가 떨어질 날 드물었다. 요새는 아니다. 솜씨가 많이 늘어 ‘노 프라블럼’이다.

우리 동네에서 북쪽인 서울까지의 왕복 거리는 40km. 서울 땅에 들어서면 영동대교와 패밀리 타워로 빠지는 개포천이 나온다. 그 지점이 오십 리. 유턴해서 되짚어가면 딱 백 리다. 힘에 부쳐 자주는 못 간다. 춘추로 가일(佳日)을 택해 각각 서너 차례 주마간산의 원행을 마음먹는다. 최근에는 남쪽 이웃인 용인시가 길을 잇대어 그쪽으로도 나간다. 서울보다는 훨씬 짧다.

속도야 느리다. 일부러 기어(gear) 장치가 아예 없는 여성용을 샀기 때문이다. 핸들 앞에 달린 쇼핑 바구니는 남자 체면에 관한 문제다 싶어 떼어 버렸다. 그래서인가. 제비형 헬멧을 쓴 날쌘돌이들이 산악용 자전거를 타고 뒤에서 바람같이 다가와 화살같이 곁을 스칠 적마다 깜짝깜짝 놀란다. 중년 여성들로 이루어진 헬멧부대 역시 내 차를 시삐 보기는 마찬가지다. 눈만 빠끔히 남기고 안면 전체를 마스크로 가린, 몸에 착 붙는 바지로 탱탱한 다리를 뽐내는 라이더들이 핑핑 앞지르기를 한다.

그러거나 말거나 독야청청 페이스를 지키며 2인용 자전거를 타고 가는 한 쌍의 남녀와, 자기 안방인 양 누운 자세로 페달만 열심히 돌리는 청년을 덤덤히 바라본다. 그 누구보다도 뇌일혈 등으로 쓰러졌다가 다시 일어선 것이 분명한 이의 혼신의 보행 연습에 감복한다. 땀을 뻘뻘 흘리는 더딘 걸음에 무언의 박수를 보낸다.

넓은 시냇가를 달리든가 걷는 목표도 그토록 여러 가지다. 찌는 살을 털어내고자 기를 쓰는 사람 또한 많다. 하여 일몰의 여울에 꼿꼿이 서서 저녁거리로 피라미를 끈질기게 기다리는 백로에게 묻고 싶어진다. 너는 다리가 길어서 좋으냐고. 모가지마저 길어 슬프지 않으냐고.

젊어서는 전국의 온갖 산을 헤매다가 늘그막에 자전거를 끌고 다니는 나야말로 운동을 통해 임도 보고 뽕도 따려는 욕심쟁이로 갈데없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것이 다 아니라고, 방에만 처박힐 때는 짧던 생각이, 조금 높이 앉아 먼 곳을 전망하면 길어지는 듯한 착각이 싫지 않아 길을 나선다고 의뭉을 떤다.

백로와 하직하고 일어서는데 빨간 고추잠자리가 이마에 탁 부딪힌다. 불의의 충돌이다.

“자전거가 한 쪽으로 기울 때는 핸들을 굳이 반대쪽으로 꺾으러 들지마. 하자는 대로 따라가다가 슬그머니 바로 잡으라구.”

공터에서 남편이 아내에게 운전의 기본을 가르친다. 어느새 초승달이 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