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하루 그대가 되어 “좋은 일을 꿈꾸면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이인영



서울 혜화동 로터리에 일요일 오후마다 필리핀 장터가 열리는 건 많이 알려졌다. 하지만 ‘라파엘클리닉’이 바로 옆 동성고등학교 강당 4층 비좁은 복도에서 일요일마다 불법체류 이주노동자를 삼사백 명씩 무료로 진료하는 건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여기가 아픈 거죠?”라며 간이침대에서 환자를 진찰하던 신경외과 고영초 교수는 어느새 한 손엔 주사기를, 또 한 손엔 소독약 묻힌 거즈를 들고 있다. 그리고 봉사자를 찾는다. “거즈, 여기 거즈 좀 더 갖다 주세요!” 신경외과 옆으로 작은 창이 하나 있다. 플라타너스 가로수 잎이 늦가을 바람에 흔들리는 게 보인다. 햇살도 비집고 들어와 엑스레이 필름을 비껴 의사의 얼굴을 비추건만 그는 너무 바빠 그 사실도 모르나 보다. 아래층에서 들려오는 성가만 낮게 깔리며 많은 사람들로 북적대는 이곳의 소란스러움을 감싸준다. 3층에서 필리핀어 미사가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클리닉을 찾은 날. 봉사자, 학생, 교수들은 또 다른 미사로 그 날을 이미 열었다. 시험이 코앞에 있는 의대생들이 두 손을 모으고 자신들의 의미 있는 시간들을 내 놓았다. 신부님의 강론이 잔잔하게 스며든다. “일의 위대함은 크기에 있지 않고 사랑의 깊이에 있습니다.” 순간 앞의 여학생이 가지런히 모은 손에 힘을 준다. 뒷모습에도 신뢰의 빛이 생겨나고 있다. 미사가 끝나자 뿔뿔이 제 몫을 찾아간다. 4층 계단을 오르기 힘들어 수도 없이 멈추는 이방인 노부부를 본다. 그들 중 누군가 발길을 멈춘다. ‘엘리베이터가 있음 얼마나 좋을까’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그들의 그날 손길에는 남다른 실력이 첨가된다. 사랑이라는 이름을 가진.

라파엘클리닉은 이주노동자를 대상으로 의료진료, 인권문제 상담과 쉼터 알선 등을 하는 의료봉사단체다. 1958년부터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가톨릭학생회(CaSA)와 졸업선배, 교수회가 빈민을 대상으로 했던 무료 의료봉사에 그 기반을 두고 있다. 90년대 초 우리나라 의료보험이 확대 실시되면서 빈민의료봉사의 의미가 퇴색될 즈음 많은 외국인 노동자들이 국내에 들어왔다. 의료보험이 적용되지 않는 외국인 불법체류자들이 의료 사각지대에 속수무책으로 방치되어버렸던 것이다. 서울대 가톨릭교수회는 천주교인권위원회로부터 참담한 실상을 전해 들었다. 그 한가운데에 내과의 안규리 교수가 있었다.

현재 라파엘클리닉 진료소장을 맡고 있는 생리학교실 김전 교수가 미국에서 막 귀국했을 때 안규리 교수가 찾아와 “불쌍한 외국인 환자들을 도와야 하지 않겠습니까?”라며 안타까워했다. 꾸준히 봉사활동을 해온 그녀는 마더 데레사와 함께 미국 ‘사랑의 수도회’에서 멕시코 빈민을 위해 일한 경험이 있었다. “당연히 해야 하지 않겠냐?”며 뜻을 같이한 김전 교수의 합류는 큰 동력이 되었고 고찬근 신부, 현재 라파엘클리닉 김유영 대표도 단단한 기둥이 되어 주었다.

1997년 4월, 마침내 대한적십자사와 공동으로 혜화동 성당 백동관에서 30여 명의 환자를 대상으로 첫 무료진료를 펼쳤다. 지금은 그 뜻이 확산되어 고려대 이화여대 연세대 등 타 대학에서도 동참하게 되었고, 의정부 지부인 녹양동 성당에서도 진료소를 열고 있다.



라파엘은 성서에 나오는 ‘치유의 대천사’다. 라파엘클리닉에서는 현재 220여 명의 의료진과 250여 명의 일반 봉사자가 매주 일요일마다 돌아가며 봉사한다.

첫 진료 후 10년 가까운 세월. 30여 개국의 8만 명이 넘는 환자에게 무료진료와 약 처방을 해왔다. 요즘은 연간 1만 2,000여 명을 진료한다. 정밀검사 및 입원이나 수술이 필요한 환자는 40여 개 협력병원에 의뢰하고, 극빈환자는 200만원까지 의료비를 지원하기도 한다.

IMF로 이주노동자들이 무더기 해고됐을 무렵인 1998년부터는 구호사업도 시작했다. 머물 곳이 없는 환자를 위한 쉼터 알선은 물론, 임금체불과 체벌 같은 인권침해 사항은 천주교 인권위원회나 외국인노동자 상담소에 의뢰해 도움을 주고 있다. 2003년 이주노동자 강제단속 추방 때에는 농성하고 있는 명동성당으로 직접 찾아가 이동 진료를 했다.

“마더 데레사가 ‘좋은 일을 꿈꾸면 하느님께서 반드시 이루어 주신다’고 하셨어요” 라는 라파엘클리닉 상임이사 안규리 교수. “진료 환경이 열악합니다. 치과, 이비인후과에선 물을 많이 쓰는데 상하수도 시설이 멀어서 물을 길어다 쓰고 갖다 버려야 해서 고생이 심해요.” 제 18회 아산상 대상 수상 소식과 상금 얘기를 전하자 어린아이처럼 좋아한다.

“1965년 여자 선배가 서독에 간호사로 있다가 자궁암 진단을 받았습니다. 독일에서 무료로 수술해주고 뤼브케 대통령 방한 때 그 비행기로 선배를 한국 가족에게 데려다 주었습니다.” 김전 교수의 말이다. 이 일은 그의 인생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라파엘클리닉의 많은 의료진과 봉사자들은 다가온 일들을 하느님의 뜻으로 이해하고 신앙을 다져나간다. 그들은 이곳에서 의학적인 어려움을 풀어주는 좋은 진료를 후배들과 함께 하겠다는 의지로 한결같은 시간들을 보내고 있다. 라파엘클리닉은 아산상 상금 1억원 전액을 진료소 개선 자금 등으로 활용할 예정이다.

동성고등학교 강당 4층 허름한 복도는 자신들이 봉사해야 하는 까닭을 알고 체험해 가며 일요일을 헌납하는 사람들, 좋은 의술과 체계적인 운영으로 봉사의 질을 높여가는 사람들이 사랑을 나누는 푸근한 장소다. 라파엘클리닉은 환자들의 아픔을 보고 돕겠다고 결심한 교수, 의대생, 그리고 수많은 숨은 봉사자들이 오랜 세월 서로 부추기면서 이뤄낸 아름다운 마음들의 결정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