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의를 찾아서 갈수록 열정이 솟는다, 나는 행복한 의사 박미경



그에게는 이른바 ‘직업병’의 그림자가 없다. 웃음기 가득한 눈매는 재미난 상상에 빠진 사람의 그것처럼 천진하고, 바리톤에 가까운 목소리는 좋은 일이 생긴 사람의 그것처럼 유쾌하다. 하루하루 힘겹게 암세포와 싸우는 환자들. 매일같이 그들을 상대하는 사람으론 보이지 않는 것이다. 비결이 뭘까 궁금해질 무렵, 의문은 저 혼자 풀린다. 누가 부르든 웃는 얼굴로 돌아보는 일, 누굴 만나든 유쾌한 목소리로 말을 건네는 일. 그거야말로 절망에 빠진 환자들과 오랜 세월 함께 해온 사람의 ‘진짜 직업병’인지 모른다.

말기 위암환자들에게 건네준 희망뉴스 한 가지
말하자면 그는 ‘밝히는 사람’이다. 암을 치료하는 신약이 나오면 임상시험을 통해 그 약의 효능을 밝혀내는 것이 그를 비롯한 임상연구가들의 일. 제 아무리 뛰어난 치료제가 개발돼도 그들의 ‘증명’을 거치지 않으면 그림의 떡이 되고 만다. 그의 양 어깨에 내려앉은 자부심과 책임감은 여기서 비롯된다.

지난 6월 5일 그는 말기 위암환자들에게 희망을 주는 ‘증명’ 한 가지를 미국의 임상종양학회에 보고했다. 말기 위암치료약인 먹는 항암제 ‘젤로다’가 항암주사제인 ‘5-FU’와 효능이 동등하거나 그 이상의 항암효과를 보인다는 연구결과를 발표한 것. 이번 연구로 환자들은 항암주사를 맞기 위해 며칠씩 병원에 입원해야 하는 불편과 비용을 줄일 수 있게 됐다.

“제약회사가 아니라 우리 연구자들의 주도로 시작된 임상시험이었어요. 그동안 우리가 자체적으로 해온 젤로다의 임상연구 결과가 좋아서 (젤로다의)제약회사인 로슈사에 기본 데이터와 연구방향을 제공했습니다. 그게 받아들여져서, 2003년부터 한국 중국 러시아 남미를 포함한 12개 나라의 위암환자 316명을 대상으로 젤로다와 5-FU의 효능을 비교하는 임상시험을 시작할 수 있었어요.”

세계적 제약회사의 임상시험을 국내 연구진이 책임진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하지만 3년간의 고투 끝에 먹는 항암제의 효능이 항암주사제의 효능에 뒤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밝혀냈을 때, 우리나라의 임상시험 실력을 세상에 알렸다는 것보다 전 세계 말기 위암환자들의 고통을 조금이라도 덜어줄 수 있게 됐다는 사실이 그는 더 기뻤다.

“임상시험 중에 병을 고친 60대 여자 분이 계세요. 위암 수술을 하고 2년 뒤 암이 재발한 분이었는데, 먹는 항암제만으로 8개월 만에 암세포가 사라졌습니다. 2년 넘게 발견되지 않고 있으니 사실상 완치인 셈이죠.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으로 임상시험에 응하시는 분들이에요. 그들에게 던져줄 희망의 밧줄을 더 부지런히 만들어야죠.”

풀어야 할 숙제가 아직 많다. 먹는 항암제의 부작용을 줄이면서 효과를 높이는 방법을 찾아내는 일. 구내 체육관에서 운동하는 것을 그토록 즐기던 그가 요즘 통 체육관에 발을 들이지 못하는 이유다.

암으로 돌아가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가 종양내과를 선택한 건 간암으로 돌아가신 아버지의 영향이 크다. 일제강점기 대학에서 광산학을 전공한 그의 아버지는 한 시대 대한민국의 대표산업이었던 광산업의 핵심인력이었다. 광업소 소장으로 줄곧 현장에서 생활했던 아버지와는 함께 산 시간보다 떨어져 지낸 시간이 더 많았다. 그래서 더 그랬을까. 어쩌다 한 번 씩 만나는 아버지는 태산처럼 크고 바위처럼 단단해보였다. 그런 아버지를 데려간 게 바로 암이었다. 당시 중학생이던 그는 그 괴물 같은 질병에 복수하고 싶었다. 의사가 돼서 자기 손으로 그 병을 정복하는 일. 사춘기 소년의 가슴에 꿈이 생겨났고, 소년은 자라 그 꿈을 이뤘다.

“어릴 때 꿈은 과학자였어요. 왜 있잖아요. 만화영화 ‘아톰’에 나오는 머리 하얀 우주선과학자 같은 사람이요. 꿈이 의사로 바뀐 뒤에도 과학자의 꿈은 여전히 남아서, 이왕이면 가장 과학자 같은 의사가 되고 싶었어요. 흔히들 의사를 꿈꿀 때 슈바이처 같은 인물을 꿈꾸잖아요. 근데 난 환자들 한 사람 한 사람을 사랑으로 치료하는 의사보다 더 나은 치료법을 연구해서 더 많은 환자를 돕는 의사가 되고 싶었죠. 그 생각엔 지금도 변함이 없어요. 임상시험을 통해 더 많은 암 환자들을 살려낼 치료법을 연구하고 있으니, 그 꿈도 이룬 셈이네요.”

레지던트를 마치고 그가 종양내과 전임의가 된 것은 1988년의 일이다(당시만 해도 종양내과를 선택하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마땅한 항암제가 없어 환자들이 죽어가는 걸 맥없이 지켜봐야 했던 그 때를 그는 요즘도 가끔 떠올린다. 환자들의 고통을 곁에서 지켜보면서도, 자신이 도울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어 절망해야 했던 시절. 새내기 의사다운 열정을 꽃 피우기는커녕 희망 잃은 노인처럼 곧잘 한숨을 쉬어대던 무렵이었다.

그 때에 비하면 새로운 항암제가 앞 다투어 쏟아지고, 그 약들이 완치율과 생존율을 높여가는 걸 눈으로 확인하는 지금이 그는 너무 행복하다. 가족처럼 만나온 환자가 숨을 거두는 걸 보는 일이 여전히 잦지만, 그럴 때마다 처음인 듯 가슴이 아프지만, 임상시험을 통해 효능을 밝혀야 할 신약들이 생겨날 때마다 언제 그랬느냐는 듯 그의 가슴엔 다시 희망이 샘 솟는다. 나이가 들수록 일에 대한 지혜가 늘어가는 대신 일에 대한 열정은 줄어드는 법. 지혜는 물론이고 날이 갈수록 열정이 커지는 스스로가 그도 무척 신기하다. 그의 나이 올해 쉰. 이대로라면 십년 후쯤 그는 거꾸로 청년이 될 가능성이 높다.

“전국 위암환자의 8~10% 가량을 우리 아산병원에서 돌보고 있어요. 단일기관으로선 세계 그 어느 나라에서도 유례를 찾기 힘든 엄청난 숫자죠. 마땅한 치료제가 없는 것으로 여겨졌던 결핵을 불과 몇 십 년 만에 정복했듯, 우리 병원에 있는 암 환자들 모두가 완치돼서 집으로 돌아가는 날이 그리 멀지 않았다고 믿어요.”

앞날을 얘기하다 말고, 일곱 살 난 늦둥이 아들의 사진을 그가 불쑥 내민다. “나랑 닮았나요?” 컬러사진만 아니라면 그의 어린시절 모습으로 착각할 만큼, 사진 속의 꼬마는 그를 닮았다. 녀석이 어른이 될 때쯤이면 암이 정복될 거라는 그의 믿음이 현실이 될까. 장밋빛 미래를 그리며 돌아오려는데, 그가 또 불쑥 옷자락을 잡는다. “시간 괜찮으면 밥 먹고 가요.” 흰 가운만 아니라면 내 집 사정을 훤히 아는 동네사람으로 착각할 만큼, 밥 때를 챙겨주는 그의 목소리가 정겹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