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의를 찾아서 서울아산병원 신경외과 이정교 교수 박미경



그는 아직 가을을 느끼지 못하고 있다. 바람이 달라진 지 한참 되고 하늘이 파래진 지 여러 날이건만, 계절이 어디까지 와 있는지를 여태 알지 못한다. ‘전에는 이렇지 않았다’는 말로 자신의 무감각이 타고난 것이 아님을 그는 밝히지만, 언제부터 그렇게 됐는지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 것 같다. 그가 ‘철모르는’ 사람으로 살아온 시간은 그대로, 이 땅의 간질환자들을 위해 그가 연구실과 수술실에 불을 밝혀온 시간. 속도의 시대를 살면서 계절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 그만은 아닐 텐데도, 마주 앉은 사람의 마음엔 왠지 모를 미안함이 구름처럼 낀다.

수술로 앞장서온 ‘간질치료’ 한 우물

애써 아닌 척하지만, 방금 수술을 마치고 연구실로 돌아온 그의 얼굴에는 피곤한 빛이 가득하다. 평일 닷새 가운데 수술이 있는 날은 이틀에서 사흘. 말이 이삼일이지 사람의 목숨을 다루는 수술을 하루건너 한 번 꼴로 한다는 것은,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피로의 무게와 우리가 알고 있는 긴장의 질량을 훨씬 웃도는 일일지도 모른다. 의사로서 걸을 수 있는 길이 이 길만은 아닐진대, 어쩌자고 그는 가시밭길을 자처한 것일까.

“제가 레지던트 생활을 하던 80년 대만해도 수술로 간질을 치료한다는 건 상상도 못할 일이었죠. 약간의 관심이 있긴 했지만, 그 때만 해도 전공하려던 건 뇌종양이었습니다. 간질에 대한 관심이 커진 건 뇌종양을 공부하러 떠난 미국 유학길에서였어요. 하버드 의대에서 2년 간 공부한 뒤 6개월 동안 미국의 메이저 병원들을 돌며 견학을 했는데, 한 대학병원에서 간질환자를 수술하는 걸 처음 보게 됐죠. 국내 간질환자들을 수술로 치료하겠다는 꿈이 그 때 내게로 왔어요.”

이후 고국으로 돌아왔지만, 간질을 수술로 치료하는 그의 소망이 곧바로 이뤄지지는 않았다. 그가 처음으로 간질수술을 한 것은 93년, 아산병원에 자리 잡은 지 3년째 되던 해였다. 평소 간질에 관심이 많던 신경외과 동료의사에게 ‘같이 한 번 해보자’고 제안하면서 수술은 시작됐고, 결과는 성공이었다. 해부학 교실에서 표본과 씨름하며 혼자서 연구해온 날들이, 국제학회라도 가게 되면 세계의 간질 대가들에게 자문을 구하고 그걸 자기 것으로 만들어 온 숱한 밤들이 결코 헛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 즈음부터다. 뇌종양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던 그는 간질 수술이라는 ‘한 우물’ 속으로 깊이깊이 들어갔다.

한 우물일 뿐 아니라 국내에서 그 우물을 파는 사람이 거의 없는 터였으므로, 그의 자취는 내내 주목을 받아왔다. 세계적으로 채 몇 번 시도된 적 없는 내량절개술에 성공했을 때도, 뇌의 절반을 없애야 하는 대뇌반구절제술에 성공했을 때도 눈부신 조명이 그를 따랐다. 최근에는 감마나이프를 이용한 국내 무혈뇌수술 분야의 선두에 그가 있다. 이 즈음이면 남들보다 언제나 한 발 앞서 걸어온 자신의 행적에 적잖은 자부심을 가질 법도 한데, 그는 정작 그렇지 않은 모양이다. 2002년 월드컵 당시의 히딩크 같은 표정으로, ‘아직 목이 마르다’고 하는 걸 보면.

“솔직히 제가 해온 건 남의 나라에서 처음 시도된 것을 재빨리 습득해 남들보다 빠른 시간 안에 국내에 정착시켜온 것 뿐이에요. ‘좋은 임상가’였는지는 몰라도 자신만의 창의적인 의료기술을 고안해 낸 적은 없죠. 거기에 참을 수 없는 갈증을 느껴요. 정년이 이제 12년 남았는데, 그 시간 동안 그걸 하고 싶습니다.”

갈증이 크다고는 해도, 환자에 대한 애정 이상은 아니다. 우리나라의 간질환자 수는 어림잡아 30만 명. 발작을 일으킬 때를 제외하고는 지극히 정상적인 생활을 해나감에도, 간질환자라는 병력이 알려지면 이마에 주홍글씨를 새긴 듯 세상으로부터 부당한 시선을 받게 되는 것이 그들의 처지다. 그것이 못내 안타깝다. 그래서다. 약물로든 수술로든 치료가 가능함에도 손을 놓고 있는 ‘숨은 간질환자’들을 병원으로 이끌어, 새로운 삶을 살 기회를 주고 싶다. 외래환자를 진료하면서 느끼는 고됨이 아무리 커도, 수술을 앞두고 느끼는 긴장이 도무지 사라질 기미를 보이지 않아도, 그가 간질치료라는 가시밭길을 벗어날 수 없는 이유다.

‘전국1등’, 그리고 전국체전

그는 남다른 이력의 소유자다. 중학교 시절 전국에서 동시에 실시된 모의고사에서 말로만 듣던 ‘전국 1등’을 한 적이 있고, 비슷한 시기에 전국 체전에 배드민턴 대표로 출전한 이력도 있다. 전국 1등과 전국체전 출전. 하나씩만 놓고 봐도 보통 사람들의 이력서엔 적히기 힘든 경력을, 무엇보다 도무지 한 사람이 동시에 갖기 힘든 경력을 나란히 갖고 있는 것이다. 이렇다 할 재능 없이 한 세상을 살아가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여간 ‘얄미운’ 경력이 아니다.

공부와 스포츠를 병행하는 일은 이후에도 계속됐다. 의과대학에 입학한 뒤로도 스포츠를 향한 그의 실력과 애정은 줄지 않아서 테니스와 탁구, 농구, 야구 등의 경기에서 줄곧 단과대학 대표로 뛰었다. 못하는 게 없는 사람을 향한 ‘얄미움’을 가라앉히고 나면, 그토록 활동적인 그가 연구실과 수술실에 틀어박혀 지내는 것에 대한 ‘안쓰러움’이 남는다. 하지만 좀더 이야기를 나눠보면 안쓰러움은 이내 사라진다. 상대를 이기고 기존의 기록을 깨기 위해 애쓰는 스포츠처럼, 간질이라는 상대를 이기기 위해, 기존 치료법의 한계를 깨기 위해 하루하루 분투하는 일. 스포츠를 할 때와 같은 마음으로 그는 의학을 해오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그의 의학이 ‘승부근성’으로만 점철돼 있는 것은 아니다. 계속되는 진료와 수술. 늘 환자와 그의 가족을 대해야 하는 그는 어떡하면 ‘따뜻한 의사’가 될 것인가를 고민하고 또 고민한다.

“마음은 그렇지 않은데, 경상도 남자라 그런지 자꾸 무뚝뚝한 표정을 짓는 것 같아요. 말투도 그렇고요. 말 한 마디라도 따뜻하게 건네는 의사가 되자고 요즘도 매일 결심합니다.”

‘결심장소’는 아마 이곳이지 싶다. 연구실 바로 옆에 있는,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창. 힘든 수술을 마치고 돌아온 날의 외로움을, 아픈 환자들을 온종일 바라보고 온 날의 슬픔을, 그리고 수술과 진료라는 빡빡한 일정 사이에서 자꾸만 나태해지려는 스스로를 떠나보내기엔 강물이 흐르는 이곳이 참으로 적절해 보인다. 강물을 바라보며 사는 사람이 그만은 아닐 텐데도, 간신히 가라앉았던 시샘이 다시 샘물처럼 솟는다.

글·박미경(자유기고가) 사진·이영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