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산과 나 국제PEN클럽 대회에서 만난 아산(峨 山 ) 공석하



아산 회장님을 뵈온 것은 1988년 9월 15일 저녁 식사 자리에서였다. 당시 올림픽 경기를 앞두고 국제 Pen 클럽 대회를 워커힐 호텔에서 개최하게 되었는데, 첫날에는 노태우 대통령의 만찬 초대가 있었고, 국무총리, 올림픽 경기위원장 등의 만찬 초대가 있었고 재벌 가운데는 아산 정주영 회장의 초대가 있었다.

1980년 소련에서의 올림픽 경기가 공산주의 국가들만 모인 반쪽 경기를 치르고 난 다음, 아산 회장님이 올림픽 유치 위원장이 되시어 유치에는 성공하셨지만, 1984년 미국에서 치른 올림픽 경기마저 민주 진영만 참석한 반쪽 경기가 되자, 역시 아산 회장께서 주최가 되시어 어떻게든지 반쪽 경기만은 피해 보자는 결의를 보이시었다. 그 첫번째 방법으로 국제 Pen 대회를 우리나라에서 유치하는 데 협조해 주시었고, 소련(러시아)과 중국의 Pen 회원을 초대해, 그 비용 일체를 부담해 주실 것을 약속해 주시었다.

당시까지만 해도 일반인이나 정치인들은 특수한 경우가 아니면 공산 진영을 여행할 수가 없었지만 국제 Pen 회원은 비교적 여행이 자유로운 편이었다. 국제 Pen 서울 대회가 확정되자, 소련과 중국의 Pen 회원을 통하여 서울 올림픽 경기 참가를 설득했고, 마침내 결실을 보게 된 것이다. 당시로서는 환희며 감격이었다. 그 가운데 아산 회장님에 얽힌 Pen 회원과의 일화가 많지만, 일부는 소설가이시며 Pen 대회 준비위원장이셨던 정을병 선생님의 보고서에 비교적 자세히 소개되었었다.

당시 나는 Pen의 이사로 있으면서 접대에 신경을 써 달라는 부탁을 받았지만 별로 할 일이 없었다. 대통령, 국무총리, 등등들께서는 비서진과 직원 20여 명을 거느리고 오는 통에 접근도 할 수가 없었고, 미리 파견된 능숙한 비서들이 준비를 마친 다음 오시기 때문에 도리어 접근이 방해가 될 뿐이었다.

그런데 아산 회장님의 만찬 초대에는 문 앞에 아무도 나와 있지도 않았고 안내자도 없었다. 그래서 정을병 준비위원장께 문의했더니 그냥 만찬을 시작하라는 연락을 받았다는 것이다. 나는 처음으로 안내자로서 모처럼의 역할을 하게 된 셈이다. 사실 자유로운 생활이 몸에 밴 Pen 회원들에게는 문 앞에서 10여 명의 높은 분들과 일일이 악수하고 또 들어가서 한동안 초대한 분의 인사까지 의무적으로 들어야 한다는 것은 상당한 부담이었다. 우리 회원들은 오랜만에 아무 부담 없이 즐겁게 식사를 즐길 수 있었다. 한참 식사를 하다가 보니까 맨 뒤 자리에서 아산 회장님이 혼자 식사를 하고 계시었다. 급히 찾아뵙고 인사를 드렸더니 다른 사람들의 식사에 방해가 되지 않게 해달라고 도리어 부탁을 하시었다.

식사가 끝나고 사회자의 부탁으로 아산 회장님의 인사가 있었다. 넥타이는 6 년 전에 길거리에서 사신 것이었으며, 신사복도 6년 전의 것이어서 헐거운 듯 보였다.(나중 사석에서 운전수에게 들은 것임)
“세계 각처에서 오신 국제 Pen회원 여러분, 저와 같은 장사꾼이 여러분들을 모시게 된 것만도 무한한 영광입니다. 또한 제가 번 돈으로 여러 분들을 초대할 수 있었고 여러 분들과 같은 자리에서 식사도 하고 같이 대화도 할 수 있다는 것만도 무한한 영광인 것입니다. 모쪼록 즐거운 시간이 되십시오. 또한 식사 후에는 나이트클럽을 빌리어 놓았으니 아무 부담 없이 피로를 풀어주시기 바랍니다.”
아산 회장의 인사말은 능숙하지도 않았고 앞뒤의 조리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어떤 인사말보다도 감동적이었다. 당시 중국의 최고 실력자 등소평의 아들이며 우리 Pen회원인 등림과 조자양의 아들이 일어나 “현대의 발전을 위하여 Pen회원 전원이 공동 노력합시다”라는 답변까지 있었던 것으로 기억된다.(6 개어 동시통역이 되었음)
저녁에는 나이트클럽에서 춤 파티가 있었다. 아산 회장께서는 당시 Pen 회장이셨던 전숙희 선생님과 춤을 추시고 또 젊은 사람들과도 스스럼없이 어울리셨다. 아산 회장의 춤 솜씨는 결코 능숙하시지는 않으셨지만, 정열적이셨다.

Pen 대회가 끝나는 날은 새벽 2 시까지 춤추고 놀았으니까. 도리어 내가 걱정되어 “오늘부터 올림픽 대회가 시작되는데 과로하지 마십시오”
“쓸데없는 소리, 공 선생 내가 고생시켰지. 올림픽 끝나고 고생한 분들을 모시고 한 번 와,”
1988년 9월 17일 새벽 2시, 워커일 호텔 앞에서 아산 회장님이 소나타에 오르시며 하시는 말씀이었다. 몇 시간 후면 세계 160개국의 젊은이들의 각축전인 올림픽 대회가 세계 유사 이래 가장 성대하게 열릴 것이다. 물론 나는 다시 아산 회장님을 찾지는 않았다. 다만 그로부터 누구보다 더욱 존경하고 사랑하였다. 지금까지.

글쓴이 공석하는 시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