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산과 나 빈대에게도 배우라 김재규



입춘이 지나고 산행하기 좋은 때 아산 회장님을 따라 정족산 전등사에 갔었다. 전등사 입구를 들어서는데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우리 일행에게 쏠리면서 누군가가 “정주영 회장이다! 최불암, 박규채도 보인다”고 했다. 평소 TV 화면을 통해 익히 아는 얼굴들을 생각지도 않는 곳에서 만나게 되어 신기하기도 하고 그저 반가운 모양이다.

우리 일행 중에는 명문대학교의 총장, 학장, 교수도 있었고 당대에 명성을 날리던 시나리오 작가도, 이 시대를 대표할 만한 문인도 있었다. 그런데 항간의 사람들은 그들을 알아보지 못하고 또 알려고 하지도 않았다. 정주영 회장과 같이 온 사람들이니 보통사람은 아니라고 짐작했을 정도였을 것이다. TV에서 매력적인 재능으로 모든 사람과 자주 만나게 되는 최불암, 박규채 두 분을 사람들이 쉽게 알아보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아산께서 사람들의 기억을 이어줄 만큼 TV에 자주 출연한 것도 아닌데 대중들이 그렇게도 쉽게 알아보고 또 먼발치에서 보는 자체만으로도 왜 흐뭇해할까? 그것은 아산께서 일생 일구어 놓은 일들이 누구에게나 너무도 감동적이고 교훈적이라 사람들의 뇌리에 깊이 새겨져 쉽게 사라지지 않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모든 것은 시간이 흘러가면 망각하기 쉽다. 아산께서 주창하시고 몸소 실천하신 창조정신을 비롯한 숱한 일화, 교훈거리를 계승하여 더욱 발전시켜야 하는 일은 현대가족 모두가 맡아야 할 몫이라는 것은 말할 필요가 없다.

아산께서 만들어 놓은 교훈거리 덕분으로 나는 4년 반 동안 현대고등학교 교장 노릇을 노력하지 않고 거저 할 수가 있었다. 그것은 그 훌륭한 가르침을 학생들에게 그대로 전달만 하면 되었기 때문이다. 아산께서 가신 지 다섯 해 가까이 되었으므로 그 때 인용했던 두어 가지 교훈을 당시처럼 되씹어 보려고 한다.

빈대한테 배우다
학생 제군! ‘빈대한테 배우다’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는가? 오늘 아침에는 그 말을 쓰게 된 내력에 대하여 말하려고 한다.

우리 현대고등학교를 설립하신 아산 정주영 회장께서 인천 부두에서 막노동을 할 때 그곳 노동자 합숙소는 밤이면 들끓는 빈대 때문에 잠을 잘 수 없었다. 사람들은 빈대를 피하여 밥상 위에 올라가 자기도 했는데, 빈대는 밥상 다리를 타고 기어 올라와 물어뜯었다. 여러 사람들은 다시 머리를 짜내서 밥상 네 다리를 물 넣은 양재기 하나씩에 담아 놓고 잤다. 대단한 착상이었지. 그런데 편안하게 잠을 잔 것이 하루나 이틀쯤 되었을까. 다시 물어뜯기 시작했지. 양재기에 물이 있어 상 위로 기어오르다가는 물에 빠져 죽었어야 하는 빈대들인데 도대체 무슨 방법으로 살아서 다시 뜯어 먹나, 불을 켜고 살펴보다가 기가 막힌 광경을 보았지. 빈대들은 벽을 타고 천정으로 올라가 천정에서 사람을 향해 툭 떨어지고 있는 게 아닌가!

빈대도 물이 담긴 양재기라는 장애를 뛰어 넘으려고 저토록 머리를 쓰고 죽을힘을 다해 노력해서 뜻을 이루고 있지 않은가! 학생 제군! 아산 선생님은 빈대의 노력을 당신이 직접 본 좋은 교훈이라고 하셨다.

무슨 일에든 포기하지 않고 최선의 노력만 쏟아부으면 성공하지 못할 일이 없다는 것을 빈대한테서 배웠다고 하셨다.

대단치도 않은 난관에 부딪혀 체념하려는 사람을 아산 선생님은 ‘빈대만도 못한 사람’이라고 하셨느니라. 끝으로 아산 선생님은 ‘장애는 뛰어넘으라고 있는 것이지, 걸려 엎어지라고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하셨다. 그 말씀 깊이 음미해 보고 꼭 실천하기 바란다.


물속이 참 시원하더군!
학생 제군! 오늘 아침에는 현대조선소 창건과 관련된 교육적인 많은 일화 가운데 ‘물속이 참 시원하더군’하신 아산 선생님의 말씀에 대하여 이야기하려고 한다.

26만 톤짜리 유조선 두 척을 첫 주문으로 받아놓고 계약 기한에 배를 인도하기 위하여 2,200명이 넘는 종업원이 새벽에 일어나 밤늦게까지 24시간 돌관(突貫) 작업을 하던 때 일이다. 1973년 11월 어느 날 아산께서는 여느 날과 같이 새벽 3시에 일어나 지프차를 몰고 현장으로 가셨다. 밖은 비바람이 몰아쳐 앞이 잘 보이지 않았지만 익숙한 길이라 그냥 몰고 갔는데, 별안간 전날에 없었던 바윗덩어리가 시야를 가렸다. 급히 브레이크를 밟으며 핸들을 꺾었다. 그 순간 차는 한 바퀴 훌렁 넘어 수심이 12m나 되는 바다에 빠져버렸다. 가라앉는 차 속에서 ‘바다 깊이는 물론 지형도 훤히 알고 있고 차 문이 안 열리면 앞 유리를 깨고 나가면 되니 당황할 것은 없다’고 생각하셨다. 지프차의 빈틈으로 물이 들어오고 차가 완전히 가라앉자 문을 열어 보았다. 그러나 수압 때문에 문은 꿈쩍도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보통사람은 대개 기절하지. 아산께서 한쪽 문에 등을 대고 있는 힘을 다해 문을 밀자 왈칵 물이 밀려들면서 문짝이 열리고 바닷물이 코로 입으로 마구 들어오고, 차안으로 밀려드는 물살에 자빠지며 간신히 차 밖으로 나왔지. 12m 물 밑에서 숨 못 쉬고 갑갑했던 길고 긴 사선을 넘어 수면으로 떠오르는 순간, 막혔던 숨통이 터졌다.

“살았구나!”(학생들 일제히 박수)
거기에서 백사장까지는 약 800m. 가까운 안벽(岸壁)을 향해 헤엄쳤지. 사정없이 들어오는 바닷물을 들이켜 마시며 사력을 다해 헤엄치다가 콘크리트를 치기 위한 철근 하나가 삐죽 나와 있는 것을 붙잡을 수 있었지. 후려 때리는 파도에 그것을 놓치지 않고 버티는 것도 굉장한 일이었다. 아산 선생님께서 나이를 의식하지 않고 마냥 청년으로 생각하고 살아오셨으나 이때 연세가 쉰여덟, 곧 환갑을 맞을 때였다. 아산께서 초소를 향하여 “여아!” 소리를 질렀다.

마침 순찰 중이던 경비원이 달려와 아래로 내려다보며 “누구요?”하고 물었다.
“누군지 알아서 뭐해 임마! 빨리 밧줄 갖고 와!” 물에 빠져 딱한 처지이면서도 냅다 호통을 쳤다.
그제야 누구인지를 알아차린 경비원의 그 다음 말이 걸작이었다. “밧줄요? 밧줄이 어디 있습니까?”
밧줄 둔 곳을 현장 경비원이 회장한테 묻는 법도 있나? 화가 치밀었지만 우선 구조되는 것이 급해 좋은 말로 밧줄 있는 곳을 가르쳐 주었다. 밧줄로 허리를 잡아매고 뭍으로 나왔다. 다리가 후들후들 떨려서 주저앉을 지경이었지만 그런 모습을 보일 수는 없고 의연하게 걸었다. 순찰차가 달려오고 염려되어 쫓아온 임직원들에게 “걱정할 것 없어. 물속이 참 시원하더군!” 말씀만 남기고 차에 오르셨다.

학생 제군! 사람은 난관에 처했을 때 비로소 장부다운 됨됨이가 있나 없나가 나타난다고 했다.
깊은 바다로 빠져들어 가면서도 태연자약한 그 침착함이 거대한 수압을 뚫어낸 초인적인 힘이 되었다는 사실은 우리가 살아가는데 귀중한 좌우명이 되리라 믿는다. 더욱 바다 속에서 금방 사선을 오가 놓고 ‘물속이 참 시원하더군’ 했던 그 익살스러운 말은 마음의 여유가 없이는 아무나 할 수 없는 말이다.
그 여유 있는 마음으로 온갖 것을 생각하고 결국은 세계 제일 가는 조선소의 시작을 만들었으니 이것은 제군들이 긍지를 가지고 이어가야 할 유산이니라!

정주영 어록
(1915년~2001년)

“배우는 데는 두 가지 경우가 있다. 하나는 ‘그렇게 해야 되겠구나’ 하는 경우이고, 다른 하나는 ‘그렇게 하면 안 되겠구나’하는 경우다. 그러므로 사람은 언제 어디서나 항상 배울 수 있다. 누가 보든 안 보든, 출세 영달에 개의치 않고 꾸준히 배우며 일하다 보면 성공도 하고 사회발전에 기여할 수 있는 날이 오게 된다.” - 1971년 ‘사원들에게 당부하는 말’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