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산과 나 정주영회장님, 추억한가지 박동규



아산 정주영 회장님과의 인연은 너무나 우연한 기회에 이루어졌다. 벌써 이십년도 훨씬 지난 여름이었다. 시를 사랑하는 독자와 시인이 모여 ‘해변 시인학교’를 강릉 근처 사천초등학교에서 열고 있었다. 이 해변 시인학교를 처음 시작한 것은 1979년 여름 구룡포에 있는 조그마한 초등학교 교실에서였다. 여름만 되면 해변을 찾아 떠나는 이들이 바닷가에서 놀기만 하고 돌아오는 세태에서, 시와 더불어 삶의 가치 있는 것들을 생각해보고 무엇인가 느끼고 돌아오는 그런 좀 다른 행사를 해보고 싶어서 해변 시인학교를 열게 되었던 것이다. 이런 취지에서 바닷가에 가까이 있는 초등학교를 빌려 교실 바닥에서 시인과 독자가 함께 기거하며 운동장 한 구석에 식당을 차려놓고 밥을 지어먹으며 생활을 하는 독특한 캠프였다.

그 해도 사천초등학교에 200여 명의 시인과 독자들이 모여 들었다. 서울을 떠나 사천에 도착하였을 때는 오후 세시쯤 되었다. 버스에서 내려 각 교실에 참가자들을 배정하고 교사 뒤편 공터에 흰 천막을 치고 돌을 주워다가 아궁이를 만들었다. 그리고 저녁 준비를 위해 장작을 사서 날랐다. 그렇게 바쁘게 첫날을 보냈다. 다음날 오후였다. 한 낮에는 바닷가로 나가 모래사장에 둘러 앉아 이야기도 하고, 더우면 물 속으로 뛰어 들어가기도 하며 즐기다가 네 시쯤 돌아왔다. 이 사이에 본부팀은 저녁식사 준비를 해야 했다. 식사를 맡아 해줄 요리담당 아주머니 몇 분을 미리 서울서 선발해서 함께 와서 지냈다.

그런데 문제는 마당에 솥을 걸고 200여 명이 넘는 참가자들의 식사를 준비하기가 정말 어려웠다. 조리 시설이 되어 있는 것도 아니고 수돗물조차 비닐호스로 끌어와야 하는데, 물조차 풍부하지도 않았다. 이런 여건 때문에 나는 바닷가에 나가지 못하고 이를 지켜보며 도와주고 있었다. 햇볕이 따갑게 내리쬐는 텅 빈 운동장에 검은 승용차가 들어섰다. 그리고 차문을 열고 회장님이 내리셨다. 내가 다가가자 “여기가 해변 시인학교입니까?”하고 정중하게 물었다. 그리고 나서 등나무 이파리가 하늘을 가린 운동장 한 쪽 쉼터에 앉으셨다.

회장님이 찾아온 사연을 말씀하셨다. 강릉 앞바다에서 현대그룹 신입사원의 연수회를 해마다 열고 있어서 자신이 꼭 참석하는데, 올해에도 연수회에 참석했다가 속초에 잠시 바람 쏘이러 갔다가 오는 길에 사천 읍 입구에 걸린 ‘축 해변 시인학교’라는 플래카드를 보고 참가하고 싶어서 들어오셨다는 말씀을 했다.

정 회장님을 뵌 것은 이 때가 처음이었다. 회장님은 회비가 얼마냐고 물었다. 내가 얼마라고 하자 포켓에서 회비를 꺼내 주셨다. 어머니와 회장님이 인사를 나누었다. 등나무 아래서 회장님이 어머니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작은 트럭이 장작을 싣고 와서 학교 입구에 부려 놓았다. 리어카로 다시 장작을 실어 뒷마당 아궁이가 있는 곳으로 옮겨야 했다. 아직 많은 사람들이 바닷가에서 행사를 진행하고 있을 때라서 시인 몇 명만이 학교에 남아 있었고, 이들이 리어카를 끌어야 했다.

리어카를 끌고 교문으로 가자 회장님은 벌떡 일어서시더니 리어카 있는 곳으로 다가가셨다. 그리고는 리어카에 맨 손으로 장작을 담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앞장서서 리어카를 끄시는 것이었다. 나는 어찌 할 바를 몰랐다. 회장님이 장작을 리어카에 싣고 뒷마당으로 가시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곁에 있던 시인들도 그냥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날 몇 차례 리어카에 장작을 싣고 조리장으로 옮겨놓으셨다. 내가 중간에 말렸다. 그러자 회장님은 “나도 회원인데 거들어야지”하며 웃으셨다. 그날 저녁 회장님은 수많은 시인과 독자들 사이에 끼어 식판을 들고 차례를 기다렸다가 밥과 국을 담아 운동장 담장 밑 조그마한 아이들 의자에 앉아 식사를 하셨다. 무국을 드시며 “심심해서 옛날 생각이 난다”고 하시며 두 번인가 더 청해 드셨다.

이렇게 해서 그날 저녁 시작 강의에 참가하셨고, 이 인연으로 이십년 가까이 해변 시인학교에 찾아오시게 되었다. 어느 해 죽도에서 해변 시인학교를 열고 있을 때였다. 회장님이 참가한 시인들에게 저녁에 생선회 파티를 열고 싶다고 하셨다. 그러나 짜여진 일정이 있어서 밤 열한시가 지나야 모든 일정이 끝나기 때문에 그 때가 되어야 하겠다고 말씀드리자 “그럼 그때 하지”하셨다. 그리고는 차로 가셨다. 나는 학교 밖으로 나가시는 줄 알고 행사에 몰두했다.



열한시가 가까이 되었을 때 한 시인이 나에게 다가와 회장님이 차 안에 혼자 계신다고 말해주었다. 나가 보니 차 안에서 의자를 뒤로 젖혀놓고 눈을 감고 계셨다. 시인들에게 회 한 접시 대접하고 싶으셔서 차 안에서 몇 시간을 기다리고 계셨던 것이었다. 그날 밤 해변에서 회장님과 시인들과의 멋진 만남이 이루어졌다. 이 만남이 인연이 되어 해변시인학교 때 마다 꼭 한 끼의 식사를 회장님이 베푸는 관례가 되었다. 그 후 해마다 여름이면 한 해도 빠지지 않으시고 참가하여 독자와 시인과 함께 보내셨다. 어느 해인가 저녁 무렵 “회장님은 왜 이 모임에 오세요?”하고 어느 독자가 물었다. 그러자 회장님은 ‘진실함’에 관해서 깨닫고 살펴보고 바로잡을 수 있는 기회가 된다는 말씀을 하셨다. 소박하게 시인들과 어울려 밤 시간을 보내는 일에 회장님이 그런 의미를 부여하고 계신 것을 알게 되었다.

장작을 싣고 리어카를 끌고 학교 뒷마당으로 가시던 회장님을 뵌 후 해마다 회장님을 뵐 때마다, 높게는 문학이 지닌 삶에 관한 치열한 정신과 그 분이 일을 통해서 얻은 모든 것들이 인간다운 삶의 실현이라는 이상으로 살아가시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정 회장님을 추억하면서 수많은 사연이 숨어 있지만 이 사연이 내 짧은 글로 해서 빛을 잃을까 겁이 날 뿐이다.

아산 정주영 어록 (1915년~2001년)

“물은 담겨지는 용기에 따라 모양이 달라집니다. 병에 담으면 병 모양이 되고, 대접에 담으면 대접 모양이 됩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의 재주란 대동소이합니다. 다만 그가 어떤 자세와 노력으로 살아가느냐, 자기 자신을 어떤 용기에 담으려고 생각하느냐에 따라 인생의 성패가 결정됩니다.” - 1971년 ‘사원들에게 당부하는 말’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