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산과 나 한결같이 소탈하고 한결같이 多情 하야 .


붓은 들었으나 필자가 어찌 감히 아산 정주영 회장님을 어디에서부터 어디까지를 이야기할 수 있을까. 참으로 한평생을 모든 면에서 탁월하셨으니 한마디로 그 능력은 20세기를 풍미한 초인이셨다고 말씀드릴 수밖에 없다. 그 분의 철저하고 능동적인 추진력은 심지어 이 갈라진 한반도에서는 물론, 온 세계에 용틀임하는 실한 뿌리를 뻗어 내리고 하늘 높이만큼이나 무성한 거목(巨木)으로 우뚝 서 계셨다. 그 멈춤 없는 개척정신에 우리는 존경을 드리며 추종했다.

필자가 아산 정주영 회장님을 처음 뵙게 된 것은 가끔 자리를 같이 하는 몇몇 문화예술인들과의 식사모임에서였다. 문인, 화가, 조각가, 도예가, 음악가 등 다양하였으며 대개는 서로 이미 알거나 혹은 낯익은 분들이었다. 회장님은 가끔 이러한 자리를 만들어 그 힘든 사업관계의 머리아픔을 잠시나마 잊고 싶어 하신 듯 했다. 언제나 이 같은 모임은 발랄하고 다양한 화제가 만발하니 자연 웃음꽃이 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럴 때마다 그분은 누구보다도 즐거워하셨고 행복해 보이시기까지 했다.

어느 날, 그분께서는 필자가 맡아 하고 있는 <인도문화연구소>에 관하여 물으시며 “남자들도 하기 어려운 인도관계 연구를 주도하고 있음은 대단하군. 혹시라도 연구소의 공간이 필요하다면 지금 비어있는 무교동 현대건물의 6층에 방 하나가 있으니 가보고 써볼만하면 사용하도록 해요”라는 참으로 생각지도 못했던 크나큰 호의를 베풀어 주셨다. 사실 필자로서는 회장님의 갑작스러운 제의에 깜짝 놀라 제대로 대답도 못 드렸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날 이후, 모든 일은 일사천리로 준비가 되어 비좁았던 우리 연구소 자리에서 밝고 환한 무교동 입구 현대빌딩(현대가 서울에 제일 먼저 짓고 사용했던 건물) 6층의 방 하나로 이사를 하게 된 것이다. 넓고 쾌적한 그 연구소 자리에서 필자는 한국과 인도의 학문과 문화예술 분야의 적극적인 교류를 실천코자 수많은 일들을 계획하고 추진하고 실천해가며 삶의 큰 뜻과 보람을 펴나갔다.

이렇게 한창 일에 열중하고 있던 어느 날, 회장님께서 그 현대건물 사무실과 또 같은 건물에 들어 있던 한국지역사회교육협의회 사무실을 둘러보신 다음, 그 곳 임원 몇 명을 대동하시고 6층에 자리한 우리 한·인문화연구소를 찾으셨다. 그러나 필자는 그 날도 역시 타자기 앞에서 정신없이 무엇인가를 쳐대고 있어 누가 문을 열고 들어섰는지도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다. 회장님께서 그 건물을 떠나신 후에 회장님과 같이 올라왔던 한 분이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전해주는 것이었다.

“우리가 연구실 문을 열고 들어서도 전혀 알아차리지 못하고 일에 열중해 있는 모습을 보시고는 회장님께선 손가락을 입에 대시면서 소리 내지 말라는 시늉을 하시고는 살짝 내려가자고 하셨어요. 우리가 간 것은 전혀 모르셨지요?”

필자는 정말 몰랐고 정말 놀랐다. 한창 일에 열을 올리고 있는 필자에게 방해가 될까 하여 아무 소리 내지 말자며 되돌아가신 그분의 아버님 같은 따뜻한 자상함에 나는 그저 민망하고 가슴이 뭉클했다.


아산 정주영 회장님은 바로 시인이셨다. 언젠가 몇몇 문인들이 같이 모인 자리에서 그분께서는,

“내가 얼마나 문학을 좋아하는지 아시오? 소년시절엔 시도, 소설도 많이 읽었소. 아마 내가 장사를 하지 않았다면 기막힌 시인이 됐을 거야. 사실 내가 써놓은 시들도 여러 편 있는데…”

라고 자랑스러운 듯이 그리고 조금은 우리 글 쓰는 사람들이 부러우신 듯이 말씀하셨다. 이렇게 본인께서 직접 “나도 여러 편 써놓은 시가 있다”고 하셨는데 아직 그 원고가 어디에 간직되어 있는지 또는 누가 간직하고 있는지 혹시라도 그것을 찾을 수만 있다면 우리는 그분의 시집을 만들어드리고 싶은 마음 간절하다.

사실 얼마나 하시고 싶은 일들이 많으셨을까. 그 중에서 시를 무척 좋아하셨으니 시인친구들을 가까이 하셨다. 지금은 고인이 되신 선배시인 구상 선생님과는 각별한 친분도 갖고 계셨다. 1979년, 서울에서 개최된 세계시인대회 때에도 그분께서는 멋진 정원에서 성대한 만찬을 베풀어주셨다. 세계 각 나라에서 모여든 시인들은 화기애애한 가운데 그분을 환호하며 모두 감사하고 있었다. 기억컨대 그날은 정 회장님의 가장 행복했던 날 중의 하루가 아니었을까 생각되었다.

아산 정주영 회장은 당신께서 못 다한 교육에의 열망을 1969년, <한국지역사회교육협의회>를 설립하여 적극적으로 교육의 후원자로 우뚝 서셨다. 한 나라의 발전에 교육의 중요성을 실감, 차세대의 젊은 일꾼들을 건전하게 길러내기 위하여 많은 사재를 털어 그 일에 열정을 쏟으셨다. 이 협의회는 전국으로 지회를 두고 명실공히 지역사회교육의 선두에 서서 지역개발에 박차를 가할 수 있도록 뜨거운 횃불을 올리고 주도하셨다.

필자도 자연스럽게 회장님의 권유가 있어, 이 협의회 이사진에 끼어 매달 갖는 조찬이사회에 참석하게 되었다. 때로 그분께서 지향하시는 교육사업의 목적달성을 위하여 우리는 모두 일사분란하게 연구하고 논의하고 또 뛰었다.

조찬이사회는 대개 아침 7시였다. 꽤나 이른 시간임에도 정 회장님을 위시하여 이사진은 어김없이 그 시간 전에 당도하여 있었다. 필자는 서둘렀음에도 불구하고 그만 조금 늦어버렸다. 안내를 받고 방문 안으로 급하게 뛰어 들어가자 순간 필자에게 쏟아지는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아찔하고 당황하여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러나 회장님께선 그저 빙긋이 웃으시며 “지각생이군”하시며 어색한 방안 분위기를 바꾸어 놓으셨다. 후에 안 일이지만 그날의 필자처럼 지각하는 이사들은 거의 없다는 것이었다. 특별히 필자가 협의회를 위하여 한 일이 있다면 열심히 작사를 하여 협의회 회가를 만들어 놓은 일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아산 정주영 회장님께선 산행을 즐기셨다. 해마다 가을에는 우리를 앞세워 오대산을 향했다. 아름답게 물든 나무숲을 헤치며 맑은 계곡을 끼고 걸어 내려오기를 즐기셨다. 또 1990년 여름, 회장님은 60명으로 구성된 친선사절단을 이끌고 중국방문길에 오르셨다. 북경의 자금성, 이화원을 비롯하여 끝내 소망하던 백두산에 올라 천지를 굽어보며 모두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당시 몹시 흡족해하시던 모습이 지금도 눈앞에 선하다.

그리고 세월은 지체 없이 또 흘러, 어느덧 회장님께서 팔순에 이르시어 잔치를 베푸셨다. 나는 회장님께 드릴 선물로 축시를 써서 중앙대학 전인평 교수에게 한국전통음악으로 작곡을 부탁하였고 그날 연회장 무대에서 남창(男唱)으로 부르게 했다. 이 축시는 여덟 마당으로 되어 있으나 여기에는 끝의 두 마당을 적어 다시 한번 회장님을 기쁘게 해드리고 싶다.

지나온 80星霜 世界萬邦에 깃발 꽂고
한 時도 쉬임 없이 활기찬 일터에서
한결같이 소탈하고 한결같이 多情하야
나라에는 忠臣이며 父母에는 孝誠이요
친구 간엔 有信이며 一家親戚 和睦이라
어화둥둥 친구여 내 친구여
아리아리 얼쑤 아라리요

來日도 오늘처럼 아침 되면 해가 뜨리
어제의 고생살이 오늘의 洪福이라
子子孫孫 이룩한 일 하도나 많사오니
그 意志 그 熱情 기리 앞장서소서
이룩하신 큰 業績 기리 빛나오리다
어화둥둥 친구여 내 친구여
아리아리 얼쑤 아라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