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산과 나 40년 교직생활에서 만난 큰 스승 김인자



내 생애에서 고 아산 정주영 회장님을 만나게 된 것을 나는 개인적으로 영광이며 특별한 축복으로 여기고 있으며 나의 삶의 현장에서는 아직도 그를 영향력 있는 스승처럼 자주 모시기도 한다. 아산은 질 높은 교육 실현에 대한 관심이 높은 분이였다. 그가 이 땅에 처음으로 지역학교 운동을 정성을 다해서 가꾼 흔적을 여러상황에서 엿볼수 있다. 그는 자주 지역사회학교 후원회장직 (현재 지역사회교육협의회)만은 끝까지 지키고 싶다 하였다. 여러 곳에서 지역별로 교장 교사 연수를 수없이 개최했을 때도, 그가 한국 안에 있을 때는, 2박 3일 중에 한 번은 꼭 참여하여 얼마나 교육자가 중요한지 역설했다.

1970년 초 내가 그를 서강의 특별 연사로 초청했을 때였다. 우리 나라는 잘 살수 있게 된다는 그의 말에 대해 어떤 학생이 질문 시간에 무슨 근거로 그런 말을 할수 있느냐고 했다. 나는 약간 초조하게 그의 답을 기다렸다. "나라가 잘 살려면 자원과 재원이 풍부하게 있어야 하는데 우리 나라는 그런 것이 없다는 이야기인가? " 하고 반문한 아산은, "그러나, 온 세상의 재원과 자원을 활용하는 것은 인재이며, 나는 그 인재를 양성하는 교육에 있으면 가능하다고 믿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또 서강대에서 그에게 박사학위를 수여하던 날, 어떤 학생들이 반대시위를 하니까 그는 "그렇지, 내가 서강에서 공부를 안 한 것은 사실이니까 그럴수도 있겠다."며, 별로 신경도 안쓰고 편안하게 받아들이면서 언제나 교육자왕 배우는 사람에게 후했던 그의 지도자다운 모습을 나는 잊을 수 없다.

또 내가 몇 번. 몇분의 대학교 총장을 모시고 그의 사무실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그는 약속된 시간을 어긋낸 적이 없었으며, 우리가 그를 떠날 때는 그가 복도에 있는 승강기까지 우리를 배웅했는데 승각이 문이 닫힐때 까지 고개 숙여 정중히 전송하는 모습에서 그가 얼마나 교육을 존중하였는지를 콧등이 시큰해지는 감격으로 느낄 수 있었다. 나는 단촐한 외국 손님 초정 자리에서 가끔 통역을 했는데, 그는 정치가나 사업가 보다 교육자에 대해서만은 늘 극진했다.

또, 그의 조선사업의 시작을 반대한 사람들이 많았을때. 교육에 대한 그의 높은 관심이 고마워서 나는 조건 없이 그의 조선사업의 가능성을 믿고나름대로 교수 평가단에서도 열심히 홍보했다. 교수 평가단의 앞장에 서서 울산 모래사장에 있었던 조선손 가건물 현장에 갔을 때, 그는 말 많은 교수단 백여 명 앞에서 얼마나 설득력 있게 멋있는 설명을 손수 했는지 모두 감탄하고 한 방에 다 녹아 떨어졌다.

그 후 배가 완성되어 진수식 전야제에 나를 잊지 않고 갑자기 초정해 주어 나는 서너 분의 수녀들과 함께 갔었다. 그 자리는 십 명 내외 되는 단촐한 모임이었으며, 우리는 깊이 정신 서계와 교육의 중요성을 이야기 했고, 고마운 사람 중에서 당신의 아내가 당신을 마음놓고 뛰도록 해 주어서 감사하다는 말도 잊지 않았다. 밖의 폭죽과 자축의 불이 대낮같이 밝은 광경을 우리는 창을 통해 멀리에서 바라보며 담담하게 감상했다. 그는 일할 때와 감사와, 감상과, 명상을 구분할 줄 아는 따뜻한 분이었다.

아산이 소양강 댐을 건설하는데 그 당시 한국의 시멘트 생산량으로는 충분한 공급을 받지 못할 것 샅아 일본으로 부터 그것을 수입해야 할 형편이었단다. 아산은 우리가 어려울 때마다 이웃 일본만 덕을 보는 것이 안타까웠다. 그는 소양강 근처에서 별 수가 없을까 하고 '간섭 없는 홀로 궁리하기 시간'을 며칠이나 가졌었단다. 그때 거닐다가 발뿌리에 걸린 돌이 굴러가는 것을 보면서 번개 같은 통찰이 생겼단다. "물은 돌을 뚫기도 하지만 돌로 물을 막을 수도 있다. 저 산모퉁이를 파서 물을 막자" 하고는 한국 최초의 토사 댐을 그곳에 만들어 냈다고 들었다.

나는 초등학교만 나온 그의 창의력과 위기관리 능력에 놀라 그의 주변에서 끊임없는 아이디어를 제공하는 아이디어 뱅크 맴버가 누구인지 궁금해했다. 지금의 서울시장 이명박 씨에게 그들이 누구인지 내가 물었다. 수 십 명의 전문가와 박사들이 정 회장 한 사람의 창의성을 못 당한다고 그때 그는 나에게 말했다. 정 회장은 가난하게 태어났고 학력도 미달이었던 분이였다. 그러나 그의 능력이나 창의력은 오랜 세월을 두고 수없이 많은 실패와 도전으로 닦아 낸 예술품이였다.

그가 말년에 말도 제대로 하고 싶은 만큼 할 수 없게 되었을 때도 금강산을 다녀온 다음 내가 그에게 금강산이 어떠했나요 하니, 띄엄띄엄 "조물주가 금강산 만들고 남은 찌꺼기로 설악산을 만들었나봐." 했다. 또 김정일을 만나보니 어때요. 하니까 "내가 보러 가려니까 '어르신네를 제가 뵈러 와야지요' 하고 자기가 나를 먼저 찾아왔어." 했다. 나는 어떤 질문을 해도 그 보다 더 창의적인 답을 한 지도자를 만나 본 적이 없다. 그는 분명 보이는 상황 이상의 것을 볼 수 있는 안목과 사람이나 상황을 언제나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밝은 눈을 가진 이들 중의 한 분이였다. 젊음과 늙음은 자연 현상이지만 성숙은 선택이다. 젊음은 특권이 아니다. 다만 성숙으로 가는 출발일 뿐이다. 늙음은 성숙의 상징이며 구부러진 허리와 주름은 성숙하려 노력한 이에게 수여되는 보상이며 훈장이다.

수없는 훈장과 월계관을 쓴 아산, 그는 나의 40여 년의 교직생활에서 만난 위대한 스승이였다. 빈대만도 모한 인간이 되어서는 안된다. 바덴바덴의 이야기, 아산재단이 탄생하기까지의 이야기, 작은 초등학교 체육관 모금 바자에 오기 위해 새벽 네 시에 대전 갔다 열시 시작 시간에 대어 오던 그의 관심에 어찌 보답하고 싶은 마음이 인색할 수 있나? 나는 지금도 그의 가족과 그의 사업을 위해 간절한 기도를 바친다.

글쓴이 김인자는 한국심리상담연구소 소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