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산과 나 아산과 시심 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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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을 더듬으면 지난 1950년대 후반, 화양동 모윤숙댁 어느 저녁 모임에 좀 촌스러워 보이는 중년사내가 끼었다. 시골서 상경한 문인이려니 여겼더니 주인 마님의 소개인즉 자동차 정비공장이라던가, 운송점을 한다던가? 유망한 기업가라는 것이었다. 어떻거나 그런 것은 아랑곳 할 바 없는 당시 우리 문단의 원로들인 이헌구, 김광섭, 이하윤, 이무영, 박진 등과 나랑 그 졸개 문사 몇은 어쩌면 그에게는 허황하고 허랑하기 짝이 없는 담론과 기롱(譏弄)으로 시종(始終)했으나 그는 사뭇 진지한 자세로 경청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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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1975년 봄이던가, 울산 현대조선소에 문인들이 초대된 것이 이번엔 최정희, 정비석, 백철, 송지영 등 20여 명이나 되었는데 모두들 관광여행에나 나선 듯 신바람들이었다. 막상 현장견학은 눈뜬 장님으로 마치고 바다가 훤히 바라보이는 언덕 위 공관 마당에서 문인들은 이른 저녁부터 밤을 새워가며 흥청거렸다. 그 주석에서 아산과 담소하며 들은 조선사업 추진의 일화 중 영국은행에서 막대한 차관을 교섭할 때 “한국은 조선 경험이 없다”고 꺼리는 상대방에게 이순신 장군의 거북선이 그려진 지폐를 꺼내 보여주며 설득시켰다는 대목이 나의 뇌리에 아직껏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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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엔 1985년 여름, 강원도 주문진에서 열린 해변 시인학교에 아산이 불쑥 나타났다. 명목은 신문에서 구교(舊交)인 내가 자기 고향 땅을 찾는다기에 따라나섰다는 것이었지만 그는 수굿이 수강생들과 함께 시(詩) 낭독회에도 참여하고, 주최측 요청으로 특강에 나서서는 자신이 좋아하는 한시(漢詩)도 풀이하고, 이즈막 읽은 문학작품의 소감도 피력하여 박수갈채를 받았다. 일과를 마치고 나서는 황금찬 교장을 비롯한 참가 시인들과 어울려 바닷가 주막에서 이슥토록 술판을 벌였다. 그리고 그후부터 10여년 그는 해마다 여름이면 거의 거르지 않고 해변 시인학교엘 찾아와 시인들과 바다의 하루를 즐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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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렇듯 아산은 기업가로는 진기하게 문인들과 사귀기를 좋아했다. 아니 그는 스스로 시문(詩文)을 사랑하고 즐겼다.그는 천성 시심(詩心)의 소유자다!

글쓴이 구상은 시인이다. 이 글은 백인문집 ‘아산 정주영과 나’에서 발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