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남 태평양 전선(戰線)에서 2 이동석



<전편줄거리>
태평양전쟁 막바지에 일본군 태평양함대 사령부가 있던 남양군도의 섬나라 팔라우에서 연합군은 사투 끝에 일본군을 궤멸시켰다. 이 나라 300여 개의 섬 중에 끝에서 두 번째 섬 펠렐류에서 일본군이 항복하던 날, 섬 중앙의 자그마한 신사산 봉우리에서 갑자기 어느 일본군 병사의 절규가 시작되었다. 병사는 동물처럼 울부짖으며 기관총을 들고 닥치는 대로 방아쇠를 당기는 것이었다. 몸을 은폐한 연합군 저격수가 날뛰는 일본군 병사를 조준하고 방아쇠를 당겼다. 총알은 정확히 병사를 향했고 병사는 깡충 솟구쳤다가 풀잎처럼 쓰러졌다.

연합군이 산에 올라 주검을 확인했다. 병사는 뜻밖에도 여자였다. 일본군 옷을 입은 한국 여자였다. 그녀는 종군위안부였던 것이다! 전쟁이 끝나는 순간 망가진 몸, 잃어버린 자아, 찢어지고 헤쳐진 정신, 그리고 영원히 되찾을 수 없는 정조, 그런 혼돈에 사로잡혀서 여자는 미쳤다. 그녀는 일본군 시체 옆에 나뒹굴던 기관총을 부여잡고 살아있는 모든 것을 향해 총알을 갈겨댔다. 그리고 그녀는 어느 방향에 조국이 있는지도 알 수 없는 남양군도의 산 위에서 이름 석자 남기지도 못하고 저격수의 총에 맞아 들짐승처럼 죽어간 것이다.

40여 년의 세월이 지난 뒤 그 기관총이 전쟁기념물로 그 봉우리에 보존되어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李PD가 현장을 확인하러 그 섬과 그 산을 찾아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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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사산(神社山)은 야트막했다. 단숨에 오를 수 있어 보였으나 정글이 무성했고 이따금씩 팔뚝만한 도마뱀들이 어기적 어기적 기어다니며 발걸음을 가로막곤 했다. 해는 거의 수평선에 닿아 있었다.
아! 정말 그 산 위에 기관총이 있었다. 가파른 봉우리 입구에 박제된 독수리처럼 기관총은 산 아래를 겨누는 자세로 콘크리트로 고정되어 있었다. 개머리판은 떨어져 달아나서 없었고 총구는 붉게 녹슬어서 막혀 있었으며 가늠자도 방아쇠도 붙어 있지 않았다. 나아가서 그 총을 마지막으로 쏜 사람이 조선인 종군위안부였다는 설명은 더더구나 없었다.
40년이 넘는 세월이었다. 쇳덩어리가 녹슬고 또 그 녹이 떨어져 나갈 만큼 충분히 기나긴 세월이었다. 그 세월 저편에서 하루에 40~50명씩 성(性)에 굶주린 일본군의 정액받이가 되었다가 드디어는 발광해서 기관총을 난사하다 사살된 이름없는 조선인 처녀의 이야기 따윈 이 나라 사람들에게는 그냥 잊혀져도 상관없는 ‘사소한’ 이야기였을지 모른다. 그러나 만일 그 이야기가 사실이었다면 ‘사소한’그 처녀의 시신을 누군들 수습했을 리 없었겠고, 따라서 그 처녀의 원혼은 아직도 이 산 어딘가를 떠돌고 있을지 모를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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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군위안부…. 지금은 그렇게 부르지 않는다. ‘Military Sexual Slavery By Japan’이라고 부른다. 일본이 일으킨 태평양전쟁이 확대되고, 남경대학살(南京大虐殺)로 살인과 피맛을 알게 된 일본군 병사들이 군율을 무시할 만큼 미쳐 날뛰기 시작하자 일본군부는 병사들의 심상을 진압할 방법으로 섹스를 사용한다. 날뛰는 군인들의 동물성을 잠재우기 위해서 그들의 전장마다 여자를 보급키로 결정한다.
일본은 저들의 처녀는 아껴둔 채 조선반도와 중국, 동남아 등지에서 여자들을 강제 동원한다. 강제 동원된 여성들은 여성이 아닌 ‘군수품’으로 분류되어 군함에 쑤셔넣어진 채 중국 대륙, 동남아, 남양군도 등지로 수송된다. 전선에 도착한 여성들은 성병 여부를 검진받아야 했는데, 중국 전선에 도착한 여성들을 검진한 ‘아소 데쓰오’라는 군의관은 조선 여성들의 몸이 가장 정결하다는 보고와 함께 이들을 ‘일본군 병사들의 위생적인 공동변소’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영문 모르고 붙들려온 조선의 처녀들은 그날부터 ‘위생적인 공동변소’가 되어 굶주린 일본군들의 정액을 받아야 했는데 평일에는 20~30명, 휴일에는 40~50명씩을 감당하는 처절한 나날을 되풀이하는 것이 통례였다.

임질 매독으로 죽고 매맞아 죽고 총맞아 죽고 스스로 목숨을 끊어서 죽고… 그렇게 죽은 조선 처녀들의 숫자는 파악할 수 없이 많다. 사이판 앞바다에선 일본군 수송선이 연합군의 기뢰에 맞아 침몰되자 그 배에 탔던 ‘2,000명으로 보이는’ 처녀들 전원이 배와 함께 수장되었다는 증언도 있다. 일본 규슈 지방에서는 ‘원하는 대로’ 해 주지 않는다는 이유로 군검(칼)을 들고 위안부의 유방을 도려 내거나 배를 가르고 창자를 꺼내어 휘두르는 만행을 자행하기도 했다는 것이다.

이땅 경기도 어느 곳에서는 모녀 단둘이 살았는데 어머니가 과년한 딸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동굴에 피신시킨 채 남몰래 음식을 날라다 주었다. 그러다가 어느날 어머니는 앓아 눕게 되었고 혼수상태를 헤매다가 깨어나 동굴로 달려 갔더니 딸은 그만 굶어 죽은 시체가 되어 있었다 한다. 이렇듯 형언할 수 없이 많고 묘사할 수 없이 비극적인 조선 여인의 통한사(痛恨史)는 여기 팔라우에서도 이렇게 쓰라린 사례를 남겨 놓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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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 여기에는 이 기관총을 마지막으로 쏜 그 사람이 종군위안부였다라든가 한국 여자였다라는 기록이 전혀 없는데 대체 그 사실을 어떻게 믿어야 하겠습니까?”
“그게 원주민들의 증언인데요…. 이 나라 사람들이 도대체 한국을 어떻게 알겠습니까? 한국이라는 나라가 여기서 얼마나 먼 나라입니까? 또 얼마나 작습니까? 여기 왔던 징용자, 종군위안부, 그런 사람들을 보고 만나면서 한국이라는 나라를 알게 된 거 아니겠습니까? 때문에 그때 총맞아 죽은 여자가 한국 여자인지 아닌지 알 수는 있었겠죠. 한국 여자가 아니었는데도 한국 여자였다고 사실을 꾸며놓을 리는 없지 않을까요?”
“여기 사시면서 원주민들이 한국인 징용자나 종군위안부들을 만났다는 이야기를 들어보셨습니까?”
“물론이죠. 여러 사람들한테서 들었죠.”
“어떤 이야기들이었습니까? 어떤 말끝에 그런 이야기들이 나왔습니까?”
“아리랑요! 내 딸 이름이 아리랑이거든요. 딸을 낳고 이름을 뭐라 할까 고민하고 있는데 대뜸 어느 노인이 아리랑 노래를 부르는 거예요. 그러면서 이름을 아리랑으로 하라는 거예요.”
“우리 민요 아리랑 말입니까?”
“물론입니다. 발음 정확하고 멜로디도 비교적 정확하게요!”
“어떻게 그 노래를 배웠답디까?”
“이 PD 님 내려가서 이야기 하시죠. 해가 넘어갑니다. 모기가 모여들어요. 저런! 벌써 볼에 몇 대 맞으셨네요.”

4
김정곤 씨는 일행을 재촉해서 하산을 독려했다. 이미 볼뿐이 아니라 손등, 팔뚝, 정강이에 모기의 횡포가 보이기 시작했다. 나는 몇 번이고 봉우리를 뒤돌아보면서 산을 내려와야만 했다. 머릿속에서는 어느덧 새로운 화두가 커져가고 있었다. 아리랑! 원주민 노인은 그 민요를 어떻게 배우게 되었을까?

<다음호에 계속>

글쓴이 이동석은 다큐멘터리 연출가로, 전문 프로덕션 리스프로의 대표이다. KBS및 MBC 우수프로그램상 및 보도금상을 다수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