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남 어느부인의 Juke Box 이동석



1

좋아하는 후배가 있습니다. 참 똑 떨어지지요. 잘 생기고 영리하고 재치있으며 좌중을 사로잡는 유머가 끝내줍니다. 광고 전문가인데 모모한 히트작들을 많이 만든 사람입니다.
이 사람이 몇 년 전 샌프란시스코에 연수를 갔더랍니다. 3개월 단기 연수라서 미국인 중년 부부집에 말하자면 하숙을 들었는데, 영어는 신통치 않으면서도 타고난 재치와 유머로 그집 내외를 단기간에 사로잡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다가 귀국 날짜가 다가왔습니다. 며칠 뒤에 떠난다 생각하니 짧은 연수 생활이긴 했지만 섭섭하기 이를데 없더라는 거지요. 샌프란시스코의 그 뛰어난 풍광을 두고 떠나는 것도 그렇고, 무엇보다 3개월 동안 정이 듬뿍 들어 버린 중년 부부와 다시 만나지 못하게 된다는 것이…. 그래서 이 사람은 미국인 부부에게 자신을 기억할 수 있는 추억거리를 만들어 주고 또 자신의 폼도 최대한 살릴 수 있는 묘안을 생각한 끝에 단골로 출입했던 한식집에 찾아가서 주인장께 도움을 요청했더랍니다.

“이러이러해서 저러저러한데 그러그러한 방법으로 도와 주실 수 없겠느냐?”
“거 참 갸륵한 생각이다. 그렇다면 (소곤소곤소곤)하도록 하자.”
“좋다.”
“그래? 좋다면 됐다.”

이 사람은 하숙으로 돌아가서 부부에게 말했답니다.
“그동안 참으로 고마웠다. 평생 샌프란시스코가 생각날 때마다 당신들을 생각하게 될 것이다. 내일은 두 분을 만찬에 초대하겠다. 날 잊지 말라는 뜻으로 한국 음식으로 모시겠다.”
“오우, 그렇게까지 우리를 생각하다니 고맙다.”
“고맙긴, 오히려 내가 할 소리다.”

2

약속 날 저녁 이 사람은 그 부부와 함께 차를 타고 약속 시간 정확히 한식당에 도착했더랍니다. 그런데 이게 무슨 일입니까? 식당문에는 ‘CLOSE’라는 표지판이 붙어 있었고 유리창 너머로 희미한 실내등 하나가 켜져 있을 뿐 식당은 정말 문을 닫은 모습이었답니다. 초청자의 입장을 생각한 미국인 부부가 오히려 민망해 하는데, 이상하게도 이 사람은 주저함없이 문을 밀고 들어가는 거였습니다.

그런데 이건 또 웬일입니까? 문을 밀고 들어서자 희미한 불빛 속에서 갑자기 우뢰와 같은 박수와 환호성이 울리고 모든 실내등이 일제히 켜지며 실내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일어서서 미국인 부부를 환영하는 것이었습니다. 어안이벙벙해진 부부는 감격하기 시작했고, 이 사람의 목에는 어느덧 힘이 들어가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더듬거리는 영어로,
“오늘 이곳은 당신들을 위해서 만든 자리다. 이 사람들은 모두가 나를 따르는 유학생들이다. 내가 늘 당신 부부를 자랑했더니 오늘 이 사람들이 당신들을 환영하기 위해서 이렇게 모였다. 오늘은 당신들의 날이다. 마음껏 즐겨 주기 바란다!”라고 연설하는 것이었습니다.

얼마나 근사합니까? 미국인 부부가 얼마나 감동먹었겠습니까? 사실 식당에 가득 모인 사람들은 이 식당의 단골 유학생들이었답니다. 이 사람과 알거나 모르거나 말입니다.
그날 둘이서 소곤소곤소곤할 때의 아이디어대로 식당 주인은 오늘 방문한 유학생들에게 ‘이러이러한 일로 저러저러한 자리가 마련되게 되었으니 여러분, 이렇게 저렇게 도와 줄 수 없겠는가?’ 하고 호소했더니 여러 유학생들이 흔쾌하게 ‘좋다, 그 사람을 돕자!’ 해서 이렇게 된 것입니다. 어쨌든 미국인 부부 그날 기분 째졌겠죠.

3

그 다음 날이었답니다. 출국 하루 전이지요. 그 집에서 환송의 뜻으로 정성껏 마련한 저녁을 먹고 나자 부인이, 예쁜 부인이 드라이브를 청하더라는 거예요.

“야 임마! 너 아까부터 부인 이야기 하려고 질질 끌어온 거지?”
“형은 끝까지 들어보지도 않고….”
“마, 들으나마나지 뭐….”
“나 말 안 할래요. 형 언제부터 저질 됐우?”
“너 얘긴 맨날 그렇잖아?”
“이건 좀 다른 얘긴데….”
“뻔하잖아? 얼굴 짱이고 애교 만점인 부인이 너에게 추파를 뿌렸다. 그렇지만 넌 과감히 뿌리쳤다. 가는 곳마다 여자들은 널 가만두질 못한다. 도대체 왜 그런지 모르겠다…. 그런 왕자병 이야기 아냐? 네 얘긴 우리나라 연속극같이 속이 뻔히 들여다보여!”
“아무리 그렇다해도 한창 커나가는 놈인데 이렇게 기를 죽일 수 있우? 드라마에도 특집이 있던데….”
“특집이고 뭐고 빨랑 끝내 빨랑!”

부인은 이 사람을 태우고 샌프란시스코를 드라이브하는데 야경 끝내주는 곳으로만 찾아가더랍니다.
고지대로, 호젓한 곳으로… 어느 곳에서는 차에서 같이 내려 영화에서처럼 어느 곳을 손가락질하면서 자상하게 설명해 주기도 하고…. 이 사람, 당시 상황을 얼마나 로맨틱한 표정으로 얘기하는지 말씀입니다.
난 도저히 흉내조차 낼 수 없죠. 마침내 이 부인이 차를 세운 곳은 어느 조용한 카페였다는군요. 가볍게 양주도 맥주도 파는 분위기 있는 술집 말입니다.(미국 사는 대경아, 그런 술집이 카페 맞냐?)
정말 분위기 있게 한 잔씩 마시고 난 뒤 부인은 일어서서 모든 손님이 잘 보이는 바(bar) 앞으로 걸어나가더니 이렇게 연설을 시작하더랍니다.
“여러분! 나와 우리 남편은 3개월 전에 어느 동양인 한 사람을 우리 집에 들도록 했습니다. 그 동양인은 처음에는 어색해했으나 불과 며칠이 지난 뒤에는 너무도 명랑하게 너무도 재미있게 우리와 가까워졌으며 이제는 우리의 가족의 일원이 다 됐습니다. 그런데 그가 내일 우리를 떠난답니다. 나와 우리 남편을 떠나고, 우리 집과 우리 마을을 떠나고, 무엇보다 우리 샌프란시스코를 떠난답니다. 그 동양인이 여기 이분입니다!”
예고없이 지적을 당한 이 사람은 엉거주춤하게 일어섰고, 카페 여기저기서 박수가 터져나왔답니다. 박수가 멎기를 기다려 부인은 연설을 계속했습니다.
“우리 부부는 정말 이분을 보내기 싫습니다. 그래서 나는 이분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이 무엇일까 며칠 동안 생각하다가 이 선물을 준비했습니다. 여러분, 나와 함께 이 선물을 이분에게 주시기 바랍니다!”
연설을 마치며 그녀는 한쪽 모서리를 향해 눈짓을 보내더랍니다. 잠시후 그 Juke Box에서 노래가 흘러나오기 시작했고, 카페의 모든 사람들이 환호를 지르며 일어서더니 이 사람을 바라보며 그 노래를 합창하더랍니다.

4

“형, 그 노래가 뭐였는지 아슈? 형이 좋아하는 가수 Brenda Lee가 부른 노래 ‘I left my heart in SanFrancisco’였죠. 멋있지 않아요 형? 그 노래를 합창하는 그들의 모습에 가슴이 뭉클해집디다. 자기 사는 곳에 대한 사랑과 자부심, 부럽더군요.”
이 사람은 지긋이 눈을 감고 얄밉게도 그 노래를 2절 끝까지 부르는 거였습니다. 지금 내가 속으로 샘을 내고 있는 줄도 모른 채, 건방지게도 선배가 맥주를 세 모금이나 마실 때까지도 그치질 않고….
글쓴이 이동석은 다큐멘터리 연출가로, 전문프로덕션 리스프로의 대표이다. KBS 및 MBC 우수프로그램상 및 보도금상을 다수 수상했다.

글쓴이 이동석은 다큐멘터리 연출가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