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남 조 차장-2 이동석




(1)
소년 조(趙)는 여덟 살 되던 해에 한국전쟁을 만났다.
바람 부는 어느 날 어스름녘에 서울 삼선동 보리밭 고랑에서 사람 뒹구는 모습이 보였다. 趙소년은 살금살금 다가갔다. 뒹구는 사람은 하나가 아니라 둘이었다. 한 사람은 엎드리고 또 하나는 그 밑에 깔려 있는데, 엎드려 등을 보인 사람은 흑인 병사로 보였고 그 밑에 깔려 소리를 내지르는 사람은 알 것 같기도 모를 것 같기도 한 어떤 누나였다. 소년은 겁이 났다. 흑인 병사가 누나를 죽이는 거라고 생각했다. 소년은 동네로 달려가 동무들을 끌고 왔다. 보리밭 고랑이 최대한 가까운데까지 다가가 모두들 누나야! 누나야! 소리를 지르며 흑인 병사를 향해 돌멩이를 던졌다. 벌떡, 흑인 병사가 일어나 소년들을 향해 달려왔고 소년들은 뿔뿔이 흩어져 죽어라 도망쳤다.
“그땐 그것이 뭔지도 모르고 돌을 던졌지. 어떤 누나 죽는다는 생각밖에는. 지금도 기억에 생생한 것은 그 병사가 바지도 입지 않고 벌떡 일어서서 달려왔다는 거야. 그러니 그 모습이 어땠겠어? 점점 커가면서 그 장면 장면들이 머리에 떠오르고 그 누나의 신음이 되살아 날 때마다 그것이 무언지, 그런 일이 왜 생긴 것인지를 생각하게 됐지….”

(2)
대학을 졸업한 청년 趙는 잠시 무역회사를 차렸다. 대부분 그랬듯이 1960년대의 무역회사라는 것은 보잘 것 없는 오퍼상에 불과했지만 趙가 외국인 바이어를 대하는 자세 속에는 그 날 그 장면의 영향이 들어 있었다.
“편의상 미국 바이어를 잭슨이라고 하자구. 김포공항에서 잭슨을 맞으면 나는 시간을 이리저리 끌다가 해질 무렵에 돈암동 신흥사로 데려가는 거야. 신흥사? 그냥 쉽게 갔다올 수 있는 절이니까.
어이 이동석-, 사람이 가장 멜랑콜리(melancholy)해지는 시간이 언제인지 아나? 훈련소에서 집 생각이 가장 많이 나는 시간이 언제였어? 해가 뉘엿뉘엿한 그 시간이었지? 그래, 그 시간이야. 그 시간이 사람을 가장 약하고 감상에 빠지게 하고 애수에 젖게 하는 시간이래. 멜랑콜리하다는 거야.
당신이 잭슨이라고 해봐. 처음 와 보는 낯선 나라에서 해 저무는 모습을 보며 적막한 숲속으로 들어간다. 숲속에 저희들 나라에서는 볼 수 없는 품격과 무게를 지닌 한옥 사찰이 저녁 햇빛을 받은 채 버티고 서 있다. 땡그랑 땡그랑 처음 듣는 풍경 소리가 그 정적을 흔들고 회색빛 승복의 까까머리 스님들이 말없이 합장하며 걸어다니는 모습을 본다. 어떻겠어, 이것만 해도 잭슨은 허물어지지 않겠어?
대웅전 문턱을 넘자 눈앞에 황금불상의 거역할 수 없는 위엄, 그렇지만 인자한 미소를 띠고 있는 부처님과 마주서는데, 난생 처음 맡아 보는 신비한 향 내음이 스며든다. 잭슨은 바람맞은 해삼이 되는 거야, 해삼! 그런 잭슨을 확인 사살하는 게 뭔지 아나? 시간 맞춰서 울리는 범종 소리지. 덩~덩~덩~. 황혼에, 향 내음에, 범종 소리에…, 제놈이 언제 경험했겠어? 그 황홀경을 말야. 그때부터 잭슨은 내 수중에 있는 아이야, 아이…. 자, 잔 비었어. 막걸리 좀 부어 봐!”

(3)
청년 趙사장은 그 미국인 바이어, 정확히는 신흥사의 이국적인 분위기에 더욱 멜랑콜리해진 미국인을 데리고 요정으로 향한다. 요정으로 향하는 차 속에서 조 사장은 한마디를 흘린다.
“서양에 클레오파트라가 있다면 동양에는 양귀비가 있다. 당신은 오늘 밤 한국의 양귀비와 술을 마시게 될 것이다.”
그는 마담에게 이른다. 이 방에는 이놈 저놈 가리지 말고 그저 아무나 하나만 들여보내라고. 우리들 눈에 서양인은 다 비슷해 보이듯 그들 눈에도 동양인은 다 비슷해 보인다. 그런데 그중에 누군가를 찍어 특별히 미인이라 소개하면 그 여인은 더욱 더 미인으로 보인다는 설명이다. 더구나 대접받는 그 미국인의 정서는 지금 이국의 애수에 녹녹히 젖어 있는 상태가 아닌가! 그 방에 들어온 술 치는 여자에게 조 사장은 이른다. “나는 이 미국인에게 당신을 한국의 양귀비라고 소개했다. 당신은 지금부터 한국 대표이니 대표로서의 품위와 성실함을 잃지 않길 바란다”고.
“술 몇 잔 돌리고 나는 슬그머니 나오는 거지 뭐.”
“나오다뇨? 한국말 모르는 미국 남자, 미국말 모르는 한국 여자를 어쩌구 나와요?”
“역시 당신은 아직 멀었어. 만국 공통의 언어가 뭔지 아나?”
“…….”
“바디 랭귀지! 손짓 발짓 다해서 이야기하고 그래도 만족스럽지 않으면 스킨십으로 말하는 거야.”
“그렇다 치구요, 그렇게 해서 거래가 특별히 잘 됐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이봐! 아무리 영업을 잘한다 해도 제품이 신통치 않으면 오래 가지 못하는 거야. 그렇지만 내가 그만큼 머리를 짜내면서 상대를 제압해 놓는 이유가 뭐냐 하면, 이 나라를 깔보지 말라 이거야. 비록 겉으로 보이는 힘은 너희에게 뒤져 있을지라도 내연하는 힘과 정신성은 이제 겨우 200년 돼가는 너희 나라와 비교할 수 없다는 내 나름의 자존심이지.
여자만 해도 그래. 당시 한국에 오는 외국놈들은 당연히 여자를 끼고 잤어. 싸니까, 얼마든지 있으니까. 종삼 청량리 회현동 다 그런 곳 아냐? 그들과 거래하는 한국놈들은 메스껍지만 그들을 여자 있는 집까지 안내해야 했지. 내 주장은 이거야. 기왕 돈 받고 몸 파는 바에는 여자 몸값 올리자 이거야. 모든 여자를 양귀비요 클레오파트라라고 소개하자 이거야. 저희들이 알아? 저희들이 구분할 수 있어? 그놈들 바가지 팍팍 씌우자 이거야…. 나는 그래야만 속이 풀려…. 나는 왠지 그래야만, 그날 삼선동 보리밭 고랑에서 그 누나를 덮치고 있던 흑인 병사를 한 대 갈겨 주는 것 같아…. 그리고 그 누나에게 덜 미안해져. 알겠어, 내 기분?”
그 대목을 얘기하면서 조 차장의 눈은 나를 뚫어지게 바라보는 것이었다. 그 눈으로 당신의 뜻, 당신의 생각, 당신의 철학 등을 내 몸 속에 꽂아 넣으려는 듯했다. 통일로 연변 막걸리집은 조 차장의 목소리로 하여 닭도 주인도 한낮의 졸음을 잃었다. “난 회사가 당신을 잘못 뽑았다고 생각해. 세상 물정을 아나, 술을 먹을 줄 아나. 그런 사람이 세상 얘기하는 다큐멘터리 프로그램들을 어떻게 만들어? 걱정이군. 자, 술 마셔. 술도 공부니까.”

(4)
막걸리 잔을 입에 대었다 내려놓으며 나는 그날 뒷이야기를 재촉했다.
“왜? 그 여자가 불쌍해서, 아니면 잭슨이 불쌍해서?”
“그렇잖아요? 무책임한 짓이었으니까요.”
“무책임? 아니야, 아니야. 이튿날 오전 내 사무실 전화가 때르릉 울리더군. 나는 직감으로 알았지, 누구 전환지. 여자였어. 기어드는 목소리로 만나자는 거야. 어디 계시든 찾아오겠대. 오라구 했지. 당연히 오라구. 전화 끊자마자 중국집에 자장면 두 그릇 시간 맞춰서 가져오라고 주문했어. 여자가 들어왔어. ‘선생님 어제 같은 인간적인 대우와 많은 돈은 처음 받아봤습니다. 너무 고마워서 제가 점심 대접하겠습니다.’ 나는 이렇게 말했지. ‘오히려 내가 감사합니다. 우리 한국 대표께서 품위를 잃지 않아 좋은 대접을 받았고, 더구나 그분의 기분을 좋게 하셨다니 우리 회사에도 큰 도움이지요. 오히려 내가 큰 점심을 살 것이로되 시간이 부족하여 여기서 자장면으로 대접하는 것을 양해해 주십시오.’ 그 여자, 펑펑 울더군. 울면서 먹더라도 기분좋게 먹으면 체하지는 않는 법이야. 둘이 마주앉아 부르튼 자장면을 먹었지.”

(5)
훗날 그 분은 PD가 되었고, 살아 숨쉬는 수많은 작품들을 제작했으며, 애숭이 PD인 내가 속한 교양팀의 차장이 되었다.

글쓴이 이동석은 다큐멘터리 연출가로, 전문프로덕션 리스프로의 대표이다. KBS 및 MBC 우수프로그램상 및 보도금상을 다수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