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남 조 차장-1 이동석



(1)
“그때 겨우 고등학교 2학년인데 말주변이 좋으면 얼마나 좋았겠어? 겨우 적당한 낱말이나 찾아다 붙이는 그런 수준 아니었겠어? 그런데도 그 녀석 진지하게 듣더니 고개를 끄덕이는 거야.”
“….”
“며칠 뒤였지. 난 그놈이 진짜 그러리라고는 생각지 않았어. 점심시간이었는데 애들 눈에 안 뜨이는 곳으로 나를 데려가더군. 그러더니 불쑥 핸드백을 내미는 거야! 제 엄마 핸드백이지. 내가 꾸민 일이긴 하지만 순간 당황이 되더라구. 그렇지만 어쩌겠어? 내디딘 걸음인데 시작할 수밖에.”

(2)
고교 2년생 조(趙)는 제 짝을 얼러 어머니의 핸드백을 훔쳐 오도록 사주했던 것이다. 그가 다닌 학교는 50년대에 한국에서 손꼽히던 명문 고교였으므로 거기에 명문가의 자녀가 많은 것은 자연스런 일이었고, 그틈에 가난하지만 머리가 뛰어난 10대가 섞여 있음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조는 당시 연탄 배달, 신문 배달로 학비를 버는 어려운 학생이었다. 어느날 조는 점심시간마다 위화감이 느껴지는 제 짝의 도시락을 보고 한 가지 맹랑한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저 집의 돈을 끌어낼 수만 있다면, 그걸로 한번 멋있게….’
이런 저런 궁리 끝에 어떤 결론을 내린 조는 짝으로부터,
-어머니는 언제나 계(契)를 하신다는 사실
-어머니의 핸드백에는 돈이 항상 가득하다는 사실
-어머니의 핸드백은 그리 삼엄한 경계 속에 있지 않다는 사실을 알아내었다.
조는 얼굴이 밋밋하고 평면적인 기마 민족 상인데 두 눈이 약간 앞으로 튀어나와 강한 인상을 주는 사람이다. 말을 시작하면 발음이 분명하며, 잇고 끊음이 정확한데다 구사하는 단어와 문장이 품위있고 세련돼 있어서 상대를 서서히 마취시키는 마력을 지니고 있다. 거기 더해서 한번 말을 시작하면 도도히 흐르는 강물처럼 논리가 유장한데다 약간 튀어나온 두 눈알을 이리저리 굴리는 시각적 효과마저 작용하므로 몇분이 지나면 상대는 점점 소금에 절인 배추가 되어가는 것이다. 그때 고교 2학년이었다고는 하지만 조의 그러한 천부적인 능력은 그때도 능히 제 짝 하나쯤은 쥐었다 폈다 할 수 있는 수준이었을 것이다. 아무튼 조의 짝의 어머니의 현금 가득한 핸드백은 예상보다 빨리, 그리고 쉽게 조에게로 넘어왔다.

(3)
“그 돈이 얼마나 됐는가 하면, 종로의 신신백화점에 작은 사무실 내고 전화 한 대 놓고 그 일을 진행하는 데에 부족함이 없을 만큼이었지.”
“무슨 일이었습니까, 도대체? 고등학교 2학년 어린애들이 어머니 핸드백 훔쳐서 백화점에 사무실을 차리다니요. 전화는 또 뭡니까? 그때 전화라면 하늘의 별따기였을텐데….”
“자네 종삼(鍾三) 아나? 종삼 가 봤어?”
‘종삼’이란 70년대 초까지 종로 3가 뒷골목에 있던 유명한 사창가였다. 여간한 강심장이 아니면 그 골목을 지나 다닐 수 없을 정도로 화끈하고 극성스러운 곳으로 알려졌다.



(4)
“아니 그럼, 고등학생들이 돈 훔쳐서 종삼 옆에 사무실 내고 전화 놓고 부잣집 자식들 행세하며 고작 사창가를 출입했다는 겁니까? ”
“그것이 당신의 맹점이야. 상상력이 절대 빈곤하다는 것이지. 그러고도 PD 할 수 있겠어? 우리들은 말야, 학교 파하자마자 재빨리 사무실에 도착해서 창녀들을 하나씩 하나씩 전화로 불렀지. 웃돈 줄테니 빨리 출장나오라고 말야. 웃돈 준다니까 신이 나서 사무실에 들어오는 그들에게 우리는, 먼저 고향이 어디냐고 물었지. 다음엔 고향 가는 차비가 얼마냐고 물었고. 그리고 누런 봉투에… 고향 가는 차비를 넣어 주는 거야. 이제는 이런 생활 끝내고 집으로 돌아가라는 간곡한 부탁과 함께 말야. 그 돈은 물론 우리가 훔쳐낸 돈이었지.

… 자~, 한 잔 마셔 쭉~ 옳지! 술도 공부야. 몇 시야 지금? 세시? 앞으로 세 시간이면 나머지 일분 편집 하겠지?

우린, 차비만 주면 차비만 있으면 누구나 갈 수 있는 곳이 고향이라고 생각했던 거지. 고교생들의 현실 인식은 거기까지가 한계였던 거야. 창녀들은, 누나뻘이 되는 종삼의 창녀들은, 처음에는 어안이 벙벙해하다가 다음에는 어처구니 없는 표정이다가 끝내 우리의 순진무구한 뜻을 알게 됐을 때 주르르 눈물을 흘리더구만…. 내 짝 그놈도 많이 울었지. 나라고 별 수 있나?

어이, 당신 알아? 그들이 50년대의 우리들 누님이었다는 걸 아느냐구? 종삼에서, 청량리, 동두천, 의정부에서 자신의 몸 팔아 동생들 학비 대는 그런 누님들이 있었다는 걸 아느냐구?

방송하겠다면 말야, 더구나 TV 다큐멘터리를 하겠다면 말야, 적어도 그런 현실 인식은 있어야 하는 거야. 오늘이라도 당장 밤 열한시 넘어 막차 버스를 타 보라구. ‘노량진 영등포 가요~’를 외치는 여차장의 목소리가 그 시간엔 땅속으로 기어들어가지. 피곤하고 졸리니까! 하루 종일 만원버스의 문에 매달려 곡예를 하다가 이제 막차야! 긴장이 풀렸어! ‘노량진 영등포 가요~’를 겨우 내지르고서 문에 기대어 꾸뻑 졸다가 차가 출발하는 순간 열린 문 밖으로 떨어져 죽은 여차장도 있어! 그들 중에도 동생 학비 때문에 떨어져 죽은 누님이 있었단 말야.

그때 사무실을 나서는 창녀들에게 물어 봤더니 70퍼센트가 고향의 동생 학비 때문에 그짓을 한다더군! 나머지 30퍼센트는 섹스가 하고 싶어서, 그러나 방법이 없어서 그걸 한다는 것이었고.”

(5)
도대체 고교 2년밖에 되지 않는 녀석들이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느냐고 감탄할 여유마저 주지 않고 그분은 눈을 움직이며 나를 누님이라는 존재에 대한 인식 속으로 끌고 들어가는 것이었다. 그분은 선배 PD요 교양팀의 차장이었다. 밤새워 편집하는 날 새벽이면 방송사 뒷골목 소주랑 오징어랑을 파는 구멍가게에서 안으로 문걸어 잠그고 나를 교양하는 것이었다.
“당신은 시야가 좁아! 온실에서 컸기 때문이지. 세상 공부가 필요한 사람이야.”
그런 구실로 말이다.
그분을 우리는 “꽁드레 조(趙)”라고 불렀다. 여기서 우리란 1973년 그 회사에 입사한 쫄병 PD들(나도 포함된다)과 2~3년쯤 먼저 들어온 선배 PD들을 말한다. 꽁드레 조는 당시 우리들의 팀장(차장)이었다. 꽁드레 조는, 적어도 그를 제대로 알기 전까지는, 그저 입담 좋고 순발력 뛰어나고 아는 거 많은 사람으로만 생각되었다. 그러나 그로부터 30년 세월이 지나는 동안 그분을 생각할 때마다 가슴이 두근거리곤 했던 것은 그분이 남긴 숱한 말과 숱한 행적들 때문이었다. 누구에게라도 그대로 전해주고 싶을 만큼 뭉클하고 통쾌하고 숙연해지는 많은 이야기들...

글쓴이 이동석은 다큐멘터리 연출가로, 전문 프로덕션 리스프로의 대표이다. KBS및 MBC 우수프로그램상 및 보도금상을 다수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