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기로운 세상 열려라,말문! 울려라,메아리! 메아리복지원 박무덕 이사장 방은경



메아리처럼
6.25 직후인 1954년, 경남 사범대에 재학 중이던 박무덕은 어렵게 마련한 대학 등록금을 날치기 당했다. 며칠 후 그 돈을 찾았는데, 범인이 불우한 청소년이었다. 이후 그는 등록금과 가지고 있던 약간의 돈을 몽땅 털어 고향인 안동에 ‘새길원’이라는 시설을 설립하여 부랑아 60여 명과 함께 생활하며 교육을 시켰다.
2년 후 중단한 공부를 계속하기로 결심하고 학자금 마련을 위해 강원도 탄광촌으로 갔다. 광부의 생활을 하면서도 그는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있는 아이들을 위해 지성학원을 설립하여 초등학교 과정의 교육을 실시했다. 버는 돈은 아이들의 교재, 학용품 구입 등에 들어가 그 자신은 도토리묵으로 주린 배를 달래며 생활하기도 했다. 그의 이야기는 우연히 탄광촌을 찾은 서울의 한 신문사 기자에 의해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당시 자원교사로 찾아왔던 송창길 여사와는 부부의 연을 맺게 되었고, 움막 교실은 1962년 국민모금운동을 통해 조성된 기금으로 새 교사가 세워졌다. 이름은 메아리학교. 그러나 이 학교는 국가에 헌납돼 화전초등학교의 분교로 운영케 되었다.
1963년 경주에서 불우청소년들을 대상으로 한 제2 메아리학원(야간 중학과정)을 운영하다가 5년 뒤 울산에서 메아리 재건학교(야간 중학과정)를 열었다. 1972년부터는 청각장애아들을 위해 특수교육을 시작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사랑이 싹트는 소리
“청각장애아들이 정상인들의 말뜻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 여러 가지 피해를 입기도 하고, 타인에게도 의사 전달을 제대로 하지 못해 오해를 당하는 일들을 보면서, 까맣게 잊고 지내왔던 어린 시절 고향 친구가 생각났습니다.”
그는 각 지역의 특수학교도 방문하고, 특수학교에 가지 못하는 어린이에 대한 실태 조사도 했다. 당시 특수학교 기숙사비가 한 달에 쌀 15되 정도였는데, 이를 부담할 수 없어 특수학교에 가지 못하는 아이가 많았다고 한다. 이들 부모님과 주위를 설득하여 특수교육을 시작한 것이 1972년의 일이다. 이후 경남·북 지역의 청각장애아동들을 위해 구화 위주의 특수교육을 실시하였고, 1994년부터는 청각장애아들에게 직접 소리를 찾아주는 ‘귀문화사업’을 실시하여 50여 명의 청각장애아동들이 인공달팽이관 이식수술과 청각 재활 훈련을 통해 청력을 되찾게 되었다.
막대한 비용이 드는 인공달팽이관 이식수술비의 재원을 마련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하지만 그가 백방으로 뛰어다닌 결과 도움의 손길이 하나 둘 생겨나기 시작했고, 2002년부터는 국가사업으로까지 시행되어 울산광역시로부터 예산지원을 받고 있다.
“수술보다 중요한 것이 수술 후 청각 재활 훈련입니다.”
인공달팽이관 이식수술을 받은 후에는 재활 훈련 과정으로 들어가는데, 소리의 감지, 소리의 변별, 소리 인지, 이해 과정의 4단계로 언어 습득이 이루어지며, 듣고 말할 수 있기까지는 2~3년이 소요된다고 한다. 선천성 청각장애아들도 2~3세 때 수술을 받으면 청각·언어장애를 극복할 수 있으며, 수술적령기인 10세 미만의 나이에 해야 효과가 극대화된다.

울려라, 메아리
메아리복지원에는 수술한 아이들의 내실있는 교육을 위해 청능훈련센터와 생활관을 짓는 공사가 한창이다. 박 이사장은 시끄러운 공사장의 소음도 들을 수 없는 아이들이 안쓰럽다.
아이들이 생활하는 방문마다 붙여져 있는 ‘열려라 말문!’이라는 문구는 그의 바람을 잘 나타내 주고 있었다. 그의 바람대로 아이들이 소리를 찾고, 말문이 열려 메아리복지원에는 항상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메아리치는 그런 날을 상상해본다.

글쓴이 방은경은 아산재단 편집실에서 근무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