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기로운 세상 아이들의 통장은 성실 증명서, 김상업 씨 방은경



가족의 의미
1959년, ‘사라’호 태풍으로 모든 것을 잃은 김상업 씨와 어머니는 성우애육원에 들어왔다. 어머니가 이곳에서 취사원으로 일을 하게 된 것이다. 당시 일곱 살이었던 그는 그때부터 고등학교를 마칠 때까지 시설에 있는 아이들과 함께 성장했다.
“졸업식 때 한 번도 어머니가 오신 적이 없어요. 시설에 있는 다른 아이들은 졸업식 때 찾아와 줄 식구가 없는데 제 졸업식 때만 어머니가 오신다면 다른 아이들의 마음이 어떻겠어요? 어머니는 다른 아이들과 저를 똑같이 대하려고 하셨어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마산 수출자유지역에서 근무하던 때, 애육원에서 근무하던 선생님이 그만두셨다는 소식을 듣고 그는 곧바로 달려왔다. 마산에서 생활하면서도 아이들의 얼굴이 항상 눈앞에 어른거렸고, 과거 자신의 생활을 교훈 삼아 아이들에게 힘이 되어 줄 수 있을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아이들을 볼 때마다 어릴 적 자신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아 더 깊은 사랑이 느껴졌다고 한다.
그는 아이들에게 백 마디의 말보다도 행동으로 직접 보여주는 것이 효과가 크다고 생각하여 자신이 모범이 되려고 노력해 왔다. 때문에 술, 담배도 안 하고, 근검 절약이 몸에 배었다. 아이들이 쉽게 포기하지 않도록 ‘안된다, 할 수 없다’는 말도 하지 않는다.
“가족, ‘family’라는 단어는 ‘Father and Mother I love you’의 약자라고 합니다. 시설에 있는 아이들은 이 가족 중 하나가 결여된 아이들입니다. 저는 이 부족한 부분을 메꿔 주고 싶습니다.”
때로는 자상한 형이나 오빠로, 때로는 엄한 부모의 역할까지 맡아서 하며 아이들이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성실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헌신을 다해 왔다.

예금통장
그의 다이어리에는 아이들의 생일과 월급날이 빼곡하게 적혀 있다. 아무리 바쁜 일과 중에도 그는 잊지 않고 아이들의 생일날에 축하카드를 보냈다. 퇴소한 아이들의 친목 모임인 ‘성우회’를 결성하여 결속을 다지게 하고, 자립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경제력이 필요하다고 판단하여 아이들의 예금통장을 직접 관리해 왔다. 아이들이 매달 보내는 돈을 예금하여 이들이 결혼할 때 목돈으로 되돌려 주었다.
“예금통장은 아이들의 성실성을 보여 주는 일종의 증명서라고 할 수 있지요. 젊은 아이들이 매월 월급에서 꼬박꼬박 저축을 한다는 것이 쉽지 않은 일이거든요. 예금통장 하나 보여 주면 ‘이 아이가 그동안 성실하게 살아 왔구나’ 하는 것을 증명해 줄 수 있잖습니까.”
아이들이 편견 없는 세상에서 사는 것이 그의 소망이다. 하지만 아직도 고아원 출신에 대한 좋지 않은 편견 때문에 아이들은 상처를 받곤 한단다. 그는 아이들에게 고아원에서 자란 것을 부끄러워하지 말라고 얘기한다. 고아로 자란 것과 고아원에서 자란 것에는 큰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집을 짓다
1992년 정부 지원으로 성우애육원 원사를 건립하게 되었을 때, 당시 예산만으로는 1층 식당과 2층 아동 숙소만을 지을 수 있었다. 아이들을 위해 강당이 필요하다는 것을 절감한 김상업 씨는 자신의 아파트를 처분하고 전세방을 얻은 잔금과 저축한 돈을 합쳐 5,000만 원을 애육원에 희사했다. 때문에 성우애육원은 3층 강당을 지을 수 있었다.
이렇듯 그가 성우애육원에 열정을 쏟아부을 수 있었던 것은 그의 뜻을 항상 따라준 아내가 옆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이야기 도중 ‘아내가 제일 고맙다’는 말을 몇 번씩이나 했다. 신협에서 근무하던 그녀와 그는 업무차 자주 만나게 되었고, 그러다보니 정이 들고 자연스레 결혼에 이르렀다고 한다. 현재 신협의 전무로 재직하고 있는 아내는 그의 든든한 후원자이기도 하다.
최근에 그는 같은 법인내에 있는 다른 시설로 자리를 옮겼다. 새로운 일을 하느라 정신이 없지만, 그 와중에서도 성우애육원의 아이들을 항상 챙긴다. 그에게 성우애육원은 직장이 아닌 ‘집’이고, 아이들은 사랑의 끈으로 묶여진 한 가족이기 때문이다.

글쓴이 방은경은 아산재단 편집실에서 근무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