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얼굴 '외국인노동자의집, 중국동포의집' 대표 김해성목사 이인영



귀한 아기

제16회 아산상 사회봉사상 수상자 ‘외국인노동자의집·중국동포의집’ 대표 김해성 목사(44)를 만나러 가는 날, 여름을 보내는 비가 추적추적 내렸다. 6층 건물의 환한 불빛들이 안온한 빛으로 방문객을 감싸준다. 지난 25년 간 민주화, 빈민, 노동자, 인권을 위해 투신해온 김 목사와 최소한의 자리만 차지한 비좁은 응접 의자에 마주 앉았다.

1980년대, 노동운동가와 기업의 홍보담당들은 대립해 있었다. 운동권과 어용이라는 어정쩡한 이름 아래. 한 시절이 잘 흘러 조금 각도만 돌리면 모두가 하나이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아름다운 사람을 만나러 온 것이다.

“고 녀석 버르장머리 없네. 어른이 와도 잠만 자고….” 김 목사가 제왕절개로 첫아기를 낳은 앳된 산모 소냐에게 말을 건넨다. “아뇨.” 하던 그녀의 입이 한국말이 어려운 듯 오물거리다 말고 그냥 행복한 미소를 둥실 짓는다. “감사해요.” 곁의 아기 아빠도 미소를 감추지 못하고 인사를 한다. 방글라데시인 부부다.

꿈을 안고 한국에 온 가난한 불법체류자들은 건강보험이 적용 안 돼, 병이 나면 감당이 되지 않는다. 치료를 못 받아 폐렴으로도 죽고 맹장염으로도 죽는다. 이들 부부도 이곳 도움이 없었으면 절망 상태에 빠지고 말았을 것이다. 다행히 무료로 수술받고 귀한 아기를 얻었다. 희망이 젊은 부부 가슴 속에서 다시 피어나고 있다.

강변로를 질주하는 차들은
언 귓청을 울리는데
고맙다 이 거품 흐르는 강물 위에
시린 발 저으며 찾아온 그대
-박노해의 ‘겨울새를 본다’ 중에서-

섬세한 소년

전북 익산의 작은 산골마을 봉개. 한 자락엔 호남평야가 펼쳐져 있고 마을 앞에 익산강이 흐르는 곳. 언덕 위엔 교회도 하나 소박하게 자리하고 있었다.
할머니 기도소리가 새벽녘이면 조용조용 잠을 깨웠고, 가족들은 늘 고운 말만 썼다. 아버진 영어교사를 그만 둔 후 장미 심기, 홀스타인 젖소 기르기 등 독창적인 시도를 하셨고, 어머닌 힘든 농가 살림 와중에 틈틈이 마루에 신문을 놓고 정독하는 게 취미셨던 분이었다.
그리고 목사가 없어 설교며 예배를 이끌고 존경받던 고씨 성을 가진 장로님. 그 분은 늘 싸리비를 들고 교회 마당을 쓸고 유리창을 닦으셨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의 다른 색깔이 보이는 햇볕 드는 마당을.

“난 이담에 크면 고 장로가 될 터예요.” 아이의 꿈은 자라났고 김씨 댁 두 아들은 모두 목사가 되었다.
초등학교 5학년 때 서울로 전학했다. 책보를 어깨에 둘러매고 간 학교에서 “소풍 가냐?”고 놀림을 받던 그날부터 여러 아픈 일들이 섬세한 소년을 울렸다. 하지만 청년기를 거치며 느꼈던 세상의 부조리는 반대로 정의로운 기질을 절로 갖게 했다.

한신대학교에 입학하자마자 그는 대학에서 해야할 자신의 사명을 알아냈다. 1980년 5월, 비상계엄령이 전국으로 확대되고 그도 목숨을 바칠 각오로 민주화운동에 앞장섰다. 친구가 광주 도청에서 총에 맞아 죽는 일이 발생하자 수배를 피해 친구 집에서 TV나 보던 자신이 몹시 비겁하다고 느껴 죄책감에 허우적댔다. 잠도 자지 못하고 정신세계는 혼탁해져 갔다. 외삼촌이 헤매는 조카에게 추천해주었다.
“성남에 한 번 가볼래?”

성남 ‘주민교회’는 철거민, 노점상들을 위한 빈민선교를 하고 있었다. 그는 ‘산자교회’와 노동상담소 ‘희망의 전화’를 창립하여 눈 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을 보냈다. 그 때가 24세, 거침없는 나이였다.
상담소에서는 노동조합결성, 임금체불, 산업재해 등 한국인 노동자들에 관한 모든 일을 상담하였다. ‘매맞는 목사’ 김목사는 지금까지 경찰에 맞아서 입원한 것만 13번이나 된다. 그러나 세월이 흐른 지금, 그가 경찰청 인권수호위원, 집회시위자문위원장, 경찰종합학교 강사를 하고 있다니! 아이러니 속에 숨은 진실을 찾았을 때처럼, 그가 빛나는 건 당연하다. 용서가 행동 속에 녹아 흐르고 있다.

성한 독에 물 붓기

86년 목사안수를 받았던 김목사. 그의 사랑은 이미 우리의 노동자, 빈민에게만 머물러 있을 수 없었다. 88년 올림픽 이후 외국인 노동자들이 국내로 대거 유입되었고, 그중 불법체류자들은 신분적 약점 때문에 멸시, 임금체불, 산업재해, 사기, 폭행 등 비인간적인 대우를 일부 받기도 했다. 코리안드림이 절망으로 이어지며 한국에 대한 이미지도 점차 나빠지던 때였다.

어느 춥던 겨울. 에리엘 갈락 씨의 오른팔이 절단됐고, 중국동포 허순필 씨가 아파트 신축현장 16층에서 추락해 사망했다. 하루 아침에 팔을 잃은 젊은이 에리엘 갈락 씨. 불법체류자라도 보상을 받아야 마땅했다. 허순필 씨도 그랬다. 회사 처마 밑에 꽁꽁 언 채 서있는 유가족들을 보았다. 소장을 찾았으나 문전박대 당하기는 김목사도 마찬가지였다. 가슴이 몹시 아팠던 그는 그동안 쌓아온 인간관계를 활용해 장례도 주선하고 보상도 받게 했다.

‘성남에 가면 다 해결된다’고 외국인노동자들 사이에 소문이 났다. 노동상담소는 자연스레 외국인노동자와 중국동포들 관련 일을 상담하기 시작했고, 1994년 ‘외국인노동자의 집·중국동포의 집’을 성남에 설립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너무 많은 상담을 개별적으로 해결한다는 것은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라는 걸 알았다. 제도를 바꾸기 위해 ‘외국인노동자보호법’ 제정운동을 시작했다. ‘손떼라’는 압력이 들어왔고 결국 그는 구속되었으나 외국인노동자들의 이색적인 농성이 시작되었다. 그들은 몸에 쇠사슬을 두르고 ‘김해성 목사를 석방하라’고 외쳤다. 이 일은 전세계 인권단체의 주목을 받았고 그는 풀려났다.

2003년 국회에서 ‘외국인근로자 고용 등에 관한 법률’이 통과됐다. 1999년 국회에서 통과되었던 ‘재외동포법’은 1948년 이전 출국자는 동포에서 제외시킨 법이었으므로 그 개정을 위해 애쓰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이 누구인가. 애국지사나 이 땅에서 살 수 없어 나간 사람들의 자손들이 대부분이다. 헌법재판소에서 헌법불일치 판결을 받아내고 시련 끝에 국회를 설득, 2004년 만장일치로 개정시켰다. 동시에 ‘살색 없애기 캠페인’을 전개하여 국가기술표준원이 이를 살구색으로 바꾸었다. 살색은 인종차별을 일으키는 명칭이므로.

현재 ‘외국인노동자의 집·중국동포의 집’은 7지역 9개소가 있고, 교회, 쉼터 및 세계신학대학 등이 운영되고 있다. 쉼터에서는 매일 400여 명이 무료숙식을 제공받고 있고 세계신학대학에서는 기독교 영성의 새 삶을 위해 150여 명이 공부하고 있다. 그는 2001년 문화일보의 (새천년 한국을 이끌 차세대 100인), 2004년 한겨레신문의 (한국의 미래를 열어갈 100인), 2005년 서울신문의 (한국을 움직이는 101인)에 선정되었다.


허기진 마음 밭

그 동안 1,200여 명의 장례를 치렀다. 이중 300여 명은 초기에 치료하면 나을 수 있는 가벼운 질병으로 목숨을 잃었다. 홀로 무던히 참고 앓다 시기를 놓쳐 귀한 생명을 잃거나 편히 누워 임종할 자리조차 없는 그들을 보며, 그들만의 병원이 절실히 필요함을 깨달았다.
주위의 우려와 반대를 무릅쓰고 2004년 7월 23일 ‘외국인노동자전용병원’을 개원하였다. 이 병원은 정부의 지원 없이, 뜻 있는 이들 및 의료진의 후원과 봉사로 1년째 기적적으로 운영되고 있다.

밀입국자까지 합해 50만 명에 달하는 외국인 노동자 중에는 한국에서 상처받고 원망하며 돌아가는 사람들이 많다. 그들 중에는 고국에서는 일류대학을 나온 최고의 지성인이며 그 나라의 지도자들이 될 사람들이 많기에 우리 나라의 미래를 위해서라도 ‘친한 인사’들이 되어서 돌아가도록 해야 한다고 김 목사는 말한다. 그는 국제회의에 참석하여 한국의 인권활동을 알리고 이미지 개선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외국인 노동자의 부검 참관, 시신 송환을 위한 방부 처리 등도 도와온 김해성 목사는 입맛을 잃어 못 먹는 환자에게 만두국을 사다 한 숟가락 두 숟가락 떠 먹이기도 한다.

인간에 대한 깊은 자비와 사랑이 이방인의 허기진 마음과 배를 채워준다. 가족 같은, 연인 같은 따뜻함이 묻어나 아픈 사람들이 편안한 미소를 짓는다. 힘들게 마련한 이방인의 뜰에서 꽃이 피어날 차비를 하는 것이다.

손을 마주 잡고

고가차도에서 몸을 날린 중국인 노동자는 유서에 ‘한국이 슬프다’고 썼다. 그러나 병원에서 만난 회계학을 전공했다는 우즈베키스탄 청년 환자는 이런 말을 했다. ‘정말 감사해요. 이렇게 무료로 치료해주고 가족처럼 대해주는 곳은 들어본 적이 없어요.’ 이제 진실한 감사가 슬픔의 비통함을 누르고 향기로움을 이 나라에 선사할 것이다.

우리 선조들이 먼 이국 멕시코의 에네켄 농장과 하와이의 사탕수수 농장에서 흘렸던 고된 땀방울을 거울 삼아 새로운 의식의, 평화를 사랑하고 서로를 위하는 한국인으로 자부심을 느낄 날을 기다리고 싶다. 김해성 목사가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과 함께 이 일을 하고 있다.

김목사가 카메라 앞에 섰다.
추적추적 내리던 비는 맞을 만한 가랑비로 바뀌어 있고 행여 같이 찍힐까, 비 맞을까 들어간 소나무 밑에서 올려다보니 하늘이 예쁘다. 지붕을 만들어준 네 그루의 소나무엔 보석같은 이슬들이 맺혀있고, 나무는 서로 서로 손을 마주 잡거나 어깨동무를 하고 있다.

“글·이인영(아산재단 편집장) 사진·김용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