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얼굴 제천영육아원 제인 화이트 원장 이인영

곰인형을 안고
“여기가 제천영육아원 맞나요?”
소나무와 아카시아 향이 어우러진 수풀의 냄새에 파묻힌 이름 모를 건물이 마음을 당겼다.
“간판이 없던데요?”
“…우리 아이들이 안 좋아해요. 그래서 버스에도 이름을 안 붙여요.”
오는 사람마다 묻고, 그 때마다 대답해주는 번거로움을 택한 사람. 제16회 아산상 사회봉사상 수상자 제인 화이트 원장(69세)은 지난 40여 년 간 1,200여 명의 아기를 돌봐온 제천영육아원에 굳이 간판을 달지 않았다. 없는 것이 있는 것 보다 진해서 더 선명히 보여지는 것일까.
손에 들어온 사진을 들여다본다. 햇빛이 들어온 한옥 마당. 손수레엔 트렁크와 짐이 얼기설기 실려 있고 20대 중반의 이국 처녀는 큰 곰인형을 안고 있다. 눈이 부신 듯 눈을 찌푸리고 보일 듯 말 듯한 미소를 짓고 있는 그녀. 충북 제천 명동의 첫 번째 집으로 이사했을 때 사진이다.
부모님이 계신 고향을 떠나 앞으로 펼쳐질 세상의 고초에 곰인형 하나를 끌어안고 마주선 아가씨. 평화가 넘쳐흐르는 세계를 꿈꾸고 있나 보다.

허공보다 넓고 바다보다 깊은 우리의 마음속에 둥근 해가 높이 떠올라 삼라만상을 밝게 비추니, 거룩한 세계가 눈앞에 펼쳐져 있다. -성철스님-

가난과 풍요
화이트 원장의 고향은 미국 위스콘신주 메드슨시의 한 마을이다.
“부자집 딸이 아니었기 때문에 여기서 사는 게 힘들지 않았어요.” ‘귀족으로 태어나 어려운 곳에서…’가 아니라는 얘기를 하고 있다.
그러나 그녀는 풍요로운 기운을 부모 형제 고향 분위기로부터 받고 자랐다. 가족들이 농사를 지어 양식을 해결하고, 이해심 많은 기계공 아버지 밑에서 자연과 벗하며 지냈다. 가난했기에 아르바이트로 했던 옆집아기 돌보기와 교회가기가 어린 날들을 채워줬다. 중·고교시절로 이어진 베이비시터의 길은 그녀가 1,200여 명의 어머니가 되는 길로 이끌었다.
“제가 아기를 참 좋아하는 걸 알았어요.”
14살의 꿈 많고 소박한 소녀가 하나님에게 사랑을 드리고 싶어 순결한 서약을 했다. ‘아이들을 위한 선교사가 되겠어요.’
누가 그 날이, 한국의 수많은 버려진 아기들이 그 먼 곳의 그녀에게서 평생의 사랑을 받게 되는 날인 줄 알았을까?
시카고 크리스천 라이프 칼리지를 졸업한 그녀는 한국전쟁시 참전했던 오빠로부터 한국의 참담한 실상을 전해 듣고 결심을 했다. 학교 동기 잭 홈 목사의 소개를 받아 1962년 월드 선교사로 한국에 오게 된 것이다.

첫 번째 아기
제천에 가기로 한 건 사랑의 대상을 찾아가는 여정에 충실했기 때문일 것이다. 1960년대 초반 충북선, 태백선, 중앙선의 경유지인 제천역엔 버려지는 아이들이 많았다. 버려지는 아이들이 가장 많은 곳에 가겠다고 마음먹었던 그녀는 잭 홈 목사가 있던 ‘소년의 집’에서 몇 개월 있다 제천으로 떠났고, 더 이상 갈 곳을 찾지 않았다.
1963년 눈보라치던, 매섭던 한 겨울밤.
첫 번째 아기가 그녀의 품에서 울다 천사의 모습으로 안도의 잠을 잤기 때문일까?
고름투성이의 버려진 아기를 품에 안고 들어와 목욕시키는 처녀.
방 5칸과 우물이 있는 집을 빌려 자신의 손으로 대야의 풀을 찍어 도배를 하고 전깃줄도 손보고, 빨랫줄을 걸었었던 그녀. 삐쩍 마른 아기를 방에서 씻기고 기저귀를 채우고 들여다보는 어린 엄마. 낮에 손봐둔 알전구가, 노란색 불빛으로 살짝 만드는 음영과 한 여성이 보여주는 실루엣을 이 세상의 가장 아름다운 모습으로 그날 밤 하늘로 올려 보내지는 않았을까?
한국에 있는 제인 화이트에게도 봄날은 오고 갔다.
많이 도와주던 원주의 한 미군으로부터 청혼을 받았다. ‘갈등 조금…’이라고 표현했지만 ‘누가 그 일을 할까? … 애들 있는 곳에 더 많은 사랑이 있었다’는 말은 그녀가 젊은 날엔 사랑의 고민도 했던 것을 엿보게 한다. 그래서 더욱 고맙다. 여성으로서 모든 것을 포기하고 아이들 곁에 남기로 결정한 그녀이기에.
‘밤이면 아파 우는 아기들 병원에도 달려가야 하고….’ 아기들과 주로 대화해서일까? 그녀의 말은 짧게 끊기지만 여운이 스스로 길게 얘기해 준다. 장애 아기들이 많이 버려졌던 그 시절. 아기가 몇 차례씩 수술을 하면 그녀는 곁을 지키며 너무 가엾어 눈물을 흘려야 했다.
8살까지 대두증을 앓다 생명을 잃은 재경이는 아직도 잊지 못하겠다며 ‘너무 귀여워요’라고 말했다. 머리가 크고 손발이 붙었다는 아이 재경이를 떠올리는 어머니. 한 남자를 택하지 않고 수많은 재경이를 택한 이유의 표현은 ‘귀여워요’였다. 그녀는 53명의 아이들을 가슴에 묻었다.



다른 아기들처럼
이국 처녀에게는 노글노글한 삶이 기다리지 않았다.
손이 트도록 밤새 기저귀를 빨아대고, 아기들을 위한 일엔 안 통하는 말로도 팔을 걷고 따질 줄 알아야 하며, 불이 나는 등의 어려움도 헤쳐 나가야 했다. 이웃의 눈총 속에서도 아이들은 늘어만 가고, 그 때마다 방 하나씩 더 큰 집으로 몇 차례나 이사 다녀야 했다.
1969년의 어느 날, 제인 화이트 원장은 아기들을 새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자신의 품만이 아니라, 따뜻한 가정의 평범한 포근함을 살아도 될 아이들이 바로 눈앞에 있었다. ‘새 가정을 만들어 주자!’ 는 생각이 그녀를 붙들었다. 어렵사리 홀트아동복지회를 통해 해외입양을 주선하고 국내입양도 알선했다. 지금까지 740여 명은 국내외입양, 200여 명은 수소문 끝에 친부모의 품으로 돌려보낼 수 있었다.
매일 손으로 보듬어 확인하던 그 아이들이 양부모 밑에서 잘 자라 미국, 유럽 등지에서 활동하는 것을 보면 기쁘기 한량없다는 화이트 원장. 4~5년에 한 번씩은 미국에 가 아이들도 둘러보고 상담하는 등 사후프로그램도 운영한다. 대학생, 가수, 은행원 등 건강한 사회인으로 성장한 아이들은 이곳을 찾아오는 경우가 많다. 세계 여자프로복싱 챔피언이 된 킴메서는 한국에서의 대전료를 희사하기도 했다.
지금은 갓난아기부터 중학생까지 90여 명의 아이들과 함께 살고 있다. 자원봉사자들의 도움으로 음악악기 교육도 시키며 열심히 키우고 있다. 그래도 중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을 보면 걱정이 앞선다는 제인 화이트 원장. 졸업한 후에 어쩌나 싶어 후원기금, 장학기금 등을 마련해 자립을 돕고, 대학도 꼭 보내고 싶어 한다.

기분 좋은 집
“ 다녀~ 왔습니다.”
놀이터 마당에서 그녀를 만나자 웃는 유치원 아기들.
“ 말 잘 들었어? 안 들었어?”
소지품을 검사하는 제인 화이트 모습이 어느 엄마랑 다름이 없다.
“일등해서 이거 상 받았어요.”
달리기 대회를 했는지 자랑하는 아이의 얼굴에 기쁨이 번진다.
늘 되돌아가서 이야기를 나눠야 하는 곳. 그리고 다시 떠나도 돌아와 이야기를 할 때까지 기다려주는 사람이 있는 곳이 ‘우리 집’ 아닌가. 그래서 그녀는 ‘우리 집’을 단단히 지었다.
1981년 고암동 현 위치에 땅을 구입하고 집을 지을 때 시멘트 포대수, 장롱 문짝도 헤아리며 감독을 철저히 했다. 어떤 후원으로 어떻게 짓는 집인가! 미국의 친지와 동창과 교회의 후원자들, 한국의 개인 후원자 및 지역 기관장, 시멘트회사 등이 협조해 갖게 된 게 아닌가.
부엌에 들어가자 20년이 넘은 음전한 색의 타일이 천장에까지 붙여있다. 부엌이 얼마나 청결한지 기분 좋은 느낌이 오간다. 영아들 방엔 오래된 두꺼운 나무 창틀이 숨을 쉬고 유리창, 커튼이 뒷산 녹음을 배경으로 어찌 다정한지 그녀의 손길이 묻어 있는 듯하다.
‘아가야, 울지 마, 뚝~! 저기 나무가 보이지~’ 하며 창을 배경으로 아기를 안고 서성거리는 그녀도 떠오른다. 벽지도 방방이 다 다르게 발랐다.

놀이터 초록 단풍나무 아래 그녀가 홀로 앉았다.
병아리같이 삐악 대는 아기들이 햇볕 드는 마당에서 놀고 있고, 자신이 살아온 집도 보인다.
“집 없으면 하느님께 가면 돼요.”
이곳에서 나이 들어 이제 할머니가 되고 몇 년 후엔 은퇴해야 하지만 아이들만 생각하고 살아온 평생. 집도 절도 없고 자신을 위한 준비란 없다. 아기들이 따뜻이 살고 있는 집이 이곳에 저렇게 있고 그저 평화로운 미소 하나면 족한 하루가 그녀를 둘러싸고 무심히 흘러가고 있었다.
혼자 떠난 순례 길의 휴식처럼 앉은 마당에 고요한 한낮이 왔다가 갔다.

글·이인영(아산재단 편집장) 사진·김용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