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얼굴 신천종합병원 주흥재 원장 이인영


나비 좇는 노의사
일단 밝다. 나비 박사로 불리는 주흥재 원장을 보니 ‘나비’ 하면 떠오르는 여러 이미지 중 선택이 된다.
넓은 들판에 부는 바람. 작은 싱싱한 꽃에 줌인이 되면 참 고운 색깔의 나비가 함께 있다. 깨끗한 햇빛을 받고… 누런 들녘에도 산의 참나무에도… 선명한 자연 빛이 사람을 유혹할 때 나비가 앉아 있거나 팔랑~ 날아간다. 참으로 가볍게 팔랑~
67세의 주 원장이 나비를 찾아 이리저리 뛰기도 한다. 망대를 들고. 나비랑 숨바꼭질을 한다. 아이처럼 마구 쏘다니다가 나비가 앉으면 정적처럼 숨을 죽인다. 하늘하늘 망사무늬의 하얀 나비가, 밝은 남색을 날개 중앙에 듬뿍 묻힌 부전나비가, 주홍부전나비가 직선으로 내려꽂히는 햇살에 먼저 잡힌다. 일제히 점과 선의 화사한 무늬도 반짝 도드라진다.
베르디가 81세에 열정적인 팔스타프 오페라를 작곡하고, 괴테가 82세에 소설을 쓰고, 누구더라 아, 박정자가 80세 여인이 연애하는 연극을 하고…. 거기에 못지않지 않은가. 끊임없이 열정적으로 진료도 하고 수술도 하고 자연을 쏘다니는 의학박사, 의정부 신천종합병원 주흥재 원장. 경희의료원장도 역임했다.
다행이다. 그의 호방한 웃음소리. 컬렉터는 싸이코틱 집착의 사랑을 얘기했어도, 한쪽에선 탈피와 자유의 나비가 날고 있다.
주 원장은 넓고 자유로운 자연 속, 당연히 파란 하늘이 뻥 뚫려 있고 달리고 쉬고 숨죽이고 다가가고… 혹은 기다리다 잠들고… 어느 작은 꽃이나 풀섶이나 나뭇잎에 앉은 나비 만나기를 좋아하는 것이다.

달이 지구로부터 달아날 수 없는 것은
지구에 달맞이꽃이 피었기 때문이다.
지구가 태양으로부터 달아날 수 없는 것은
이제 막 동그라미를 그려낸 어린 해바라기 때문이다.
아침에 눈을 뜨면 세상은
나비 한 마리로 내게 다가온다.
내가 삶으로부터 달아날 수 없는 것은
너에 대한 그리움 때문
지구가 나비 한 마리를 감추고 있듯이
세상이 내게서
너를 감추고 있기 때문
-류시화의 ‘나비’




철조망을 넘는 저 날갯짓
함남 북청이 주 원장의 고향이다.
“왜 북청 물장수가 유명한지 아세요?” 그가 구수하게 들려준다.
왜정 때 그래도 서울 부잣집엔 수돗물이 나왔는데 지방은 그럴 수가 없었다. 각 지방엔 공동수도를 불하해 주었는데 북청 사람이 그 하나를 얻게 되었다. 물지게꾼을 고용한 그는 높은 지역에 물을 공급해 주고 돈을 벌어 조카들을 서울로 유학보냈다. 조카는 사각모를 쓰고 판·검사가 되어 나타났다.
나중에 그 불하권은 또 북청 사람에게 넘겨졌는데, 그도 교육열이 높아 자녀를 서울로 보내 반듯하게 키우고… 이 일이 반복되자 사람들에게 알려졌다고 한다.
그곳 사람이어서인가? 그의 부모님은 물장수가 아니고 자작농에 과수원을 하였지만 교육열은 과연 뒤지지 않으셨다. 형도 백인제 씨를 도와 백병원을 설립한 유명한 의사가 되고, 주 원장도 서울의대를 나와 외과 의사가 되고, 둘째 형도 서울 공대를 나왔다.
아쉬울 것도 없을 것 같은 그. 하지만 그에게도 잊지 못하는 장면이 있다. 6.25가 터지고 이곳에서도 보일 듯한 포외진 바닷가 백사장, 그리고 배 한 척.
자식들을 이남으로 보내며 아버진 할머니 땜에 남게 되었다.
발바리 새끼 ‘쪼꼬’는 따라와 엄청 짖으며 난리를 쳤고, 바다에 뛰어들어 배까지 헤엄쳐 오다 돌아갔다. 그때 아버지가 갑자기 털썩 백사장에 주저앉았다. 여전히 난리치며 짖던 강아지와 주저앉은 아버지… 눈물로 바라봤다. 눈앞에서 점으로 사라지던 그리운 아버지… 그게 마지막일 줄이야….
철조망을 넘나드는 나비만이 자유로운 날갯짓으로 그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걸까?

한국의 나비를 찾아서
그가 본 대영박물관의 15권짜리 나비도감에는 한국의 나비, 남방남색부전나비 단 1마리가 실려 있었다. 원산이라는 지명과 함께.
주 원장은 이 나비를 찾아 제주도를 3년 헤맸다. 정작 우리나라엔 이 나비에 관한 어떤 설명도 없었다. 도토리 열매가 있는, 상록수숲 종가시나무에 날아온다니 그 나무를 찾아 헤매기도 힘들었지만 겨우 찾아낸 그해 겨울. 흰 눈 속에서 푸른 빛으로 가르쳐 주는 그 나무를 눈에 새겼다. 다음 해 여름, 나비가 찾아올 무렵 그도 만남을 위해 설렘을 안고 길을 떠났다.
급기야 채집하고 확인해 보니, 그 나비는 원산이 아니라 대마도에서 잡은 것일 가능성이 높았다. 국제적으로는 한국에 있는 나비로 알려졌으나 정작 발견되지 않고 있던 나비를 각고의 노력 끝에 발견해 자신이 발간한 책에 공식 수록하는 ‘대업’을 이룬 것이다.
작년에도 있느니 없느니 논란이 있는 ‘남방남색꼬리부전나비’를 잡았다. 남한에 200여 종, 북한까지 합쳐 250여 종 있는 나비. 그 나비를 알기 위해 애쓰고 외국의 나비도 채집한다.
그 세월을 40여 년. 소장하고 있는 표본만 해도 계산할 수도 없지만 3만 마리쯤은 되는데, 희귀종 외에도 멸종된 고운점박이푸른부전나비 등도 있다. 흔했던 나비들은 멸종되고 담색어리표범나비 등은 흔해졌다. 생태계가 앓고 있는 것이다. 희귀나비는 골동품 같이 귀하다.
의사로 열심히 환자를 치료하고 주말이면 나비를 찾아 나서고 관찰을 하고 연구를 한 주 원장. 공유하고자 한국나비학회도 만들었다. 나비를 찍기 위해 사진도 배우고 그 많은 땀과 시간이 묻어 있는 귀한 사진을 인쇄로 남겨 후학에게 전하고자 자비로 책도 냈다. 김성수 씨 등과 공동으로. 1998년 한국백상출판문화상을 수상한 ‘한국의 나비’와 작년에 낸 ‘제주의 나비’가 그것이다.
제주의 나비는 지금까지 기록된 제주도 나비 자료와 그동안 수집된 자료들을 총망라하여 원색도판을 중심으로 분류학 소견, 분포, 생태 특징과 환경 등을 다루었다. 얼마나 귀한 책인지…. 사진 하나 하나에 그의 기대, 설렘, 짐꾸리기, 포충망 등 도구 챙기기, 기름 채우기, 항공권 끊기, 길을 가르쳐주던 농부의 손끝, 바람결, 까치발걸음, 풀잎에 맨살 쓸리기 등이 같이 있다.



곱고 예쁜 이름
“어마… 살았네! ” 지나가던 임신한 아줌마가 바위계곡을 향해 말했다.
난간 없는 다리에서 뒷걸음질 치며 나비를 쫓다 차를 만나 피한다는 게 그만 떨어지고 만 것이다. 긴 망대를 든 채로. 천운으로 평평한 곳으로 떨어져 팔이 부러지는 걸로 끝났다. 숲을 헤맬 때는 군경의 총구 앞에 선 적도 있다. 만 정이 떨어질 수도 있는데 그래도 계속 한 걸 보면 그 재미가 과연 대단한가 보다.
순간을 보기 때문일까? 놓치는 것도 순간, 잡는 것도 순간이라는데…. 피난지 마산고 1년 때 생물 선생님이 내주었던 숙제, 곤충 채집이 이렇게 이어졌다. 본과 시절 낙제하지 않으려고 접었던 이 즐거움은 고2였던 딸의 생물 숙제로 되살아났던 것이다. “재밌게 사는 거, 그게 제일입니다.”
“예쁘고 재밌으니까.” 그런 대답도 했다.
오색나비, 먹그림나비, 수노랑나비, 은판나비, 유리창나비, 물결나비, 봄처녀나비, 시골처녀나비, 가락지나비, 굴뚝나비, 산제비나비, 왕그늘나비, 눈많은그늘나비, 왕자팔랑나비, 은줄팔랑나비, 각시멧노랑나비, 금강산귤빛부전나비, 작은주홍부전나비, 여름어리표범나비…. 누가 지었을까? 너무 곱고 예쁜 이름. 나비가 이렇게 예쁜 이름으로 불리는지 몰랐다.
아는 사람끼리만 그토록 예쁜 이름을 부른다. “그 강원도에서 각시멧노랑을 잡으려고….”이쯤 대화하지 않을까? 정말 궁금하다. 도대체 누구일까, 그 아름다운 이름을 붙인 사람.

석주명. 한국 나비의 아버지라고 불린다. 1940년 그의 논문은 영국왕립학회에서 발간하여 그곳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세계의 도서관을 통해 과학자들에게 보급되었다. 세계적인 천재 학자로 진정 자랑스런 한국인이다.
1930년대 스미소니안 박물관장과 대영박물관 관장이 기차로 몽골에서 경성을 가려다 발음이 게이죠(경성)와 비슷한 가이죠(개성)에 잘못 내렸다고 한다. 할 수 없이 하루를 묵게 되었는데 개성의 명물 송도고보 박물관을 둘러보게 된 것이다. 그리고 나비에 미친 중학교 선생님, 그를 소개받았다.
“기차를 잘못 내린 건 하느님이 석주명을 발견하라고 한 것입니다!” 관장들은 유명한 말을 남겼다. 동양의 조선에서 석주명의 나비 표본 20만 마리를 본 그들은 그 자리에서 주저앉을 뻔했다고 한다. 대영박물관의 나비보다 더 많았던 것이다.



나비 사랑이 준 선물
그 활발함과 열정과 밝음의 이유를 더 알고만 싶다. 아니 알 것 같다. 나비 사랑이 준 선물을.
남들이 별로 택하지 않았던 취미를 그는 택했다. 그 취미는 이 산 저 산, 이 계곡, 저 계곡의 길이 아닌 곳도 헤매게 하는데, 절로 등산도 되고, 달리기, 걷기도 돼 건강한 신체를 준다. 움직임과 멈춤의 동과 정으로 사람을 풍부하게 한다. 꽃, 잎, 나무, 산 등의 아름다운 자연과 나비의 아름다운 무늬와 색을 만나 사진 예술이 탄생하고 창조의 기쁨을 안겨 준다.
세월의 흐름에 따라 환경 파괴로 멸종이 된 귀한 나비를 그만이 갖게 되고, 사랑이 주는 호기심으로 해박한 지식은 절로 쌓여 전문학술인을 무색케 하며, 그의 지식은 나눠줄 수 있는 경지에 이르른다.
물론 희생은 있다. 부인과 가족과 함께 하는 시간이 적은 것. 다행히 그의 부인은 개업의라서 바쁘다. 같은 고향 사람으로 메이퀸 출신의 그녀를 누이동생이 잘 어울린다고 소개했다는데 한동안 뜸했었나 보다.
“의사 국가고시에 톱을 했더니 찾아왔더라구.” 웃어제끼는 주 원장. 그 웃음 속에 “아니예요”라며 손사래 하는 그녀의 밝은 모습이 상상 속에 떠오른다.

글쓴이 이인영은 아산재단 편집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