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얼굴 새소망의 집 노주택 원장 이인영


산 고아
사무실. 츄리닝 바지에 하얀 티셔츠를 입은 생활보육사가 컴퓨터를 들여다보고 있다가 눈이 마주치자 인사를 한다. 아들이라고. 서글서글한 눈매를 한 30대의 그가 옆의 동료이자 친구에게 말을 했다. “나는 외톨이였어. 내가 산 고아였다니까.” 곁의 친구가 고개를 끄덕인다. 아동보육시설 새소망의 집 노주택 원장(77세)은 소파에 앉아 그런 아들의 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요새보다 조금 더 추웠던 어린 시절의 크리스마스. 트리에 색종이 고리가 달리고 종이 달리면 아이들도 싱숭생숭해지게 마련이다. 부모님도 부모님이거니와 거렁뱅이를 했든 소매치기를 했든 소망의 집에 오기 전 막 살던 시절의 자유도 그리워지고…. 분명 원장님은 선물로 뭔가 주실 거고 그때 ‘서울 구경’을 선물로 달라면 될 거였다.
정말 선물은 실현되고 용돈으로 1~2만 원씩을 받았다. 시청에서, 신세계로, 새로나백화점, 남대문으로 이어지는 순례는 재밌었다. 캐롤이 들리고 물건이 구색을 맞춰 갖춰지는 때, 아이들은 남대문 시장에서 팥죽과 떡볶이를 사먹고 그날만은 눈도 호강하고 입도 호강하고 귀도 호강했다.
그러나 소망의 집에 사는 단 한 친구. 그의 아들은 예외였다. 용돈을 주지 않았다. 불공평한 처사였다. 같이 구호물자 받고, 강냉이죽을 몇 년씩이나 먹고, 학교도 같이 보내고…. 말은 더 안하고….너무하지 않은가!
말이 별로 없는 노 원장은 그날 고백했다. 아들에게. “내가 너무했다.” 진심으로 미안한 마음이 들었나 보다.

나의 사투리를 아는 사람은
다만 나의 고향 사람들뿐이옵니다
아, 그와도 같이
나의 시를 아는 사람은, 오로지
나의 눈물의 고향을 아는 사람들뿐이옵니다
-조병화 ‘개구리의 명상 1’

고향
노주택 원장의 세 아들 고향은 이곳 새소망의 집이다. 친구도 이곳에 있고 추억도 이곳에 있다. 어릴 적부터 있던 언덕배기 그 장소, 그 교회, 그 아저씨, 그 아줌마는 지금도 있다. 주름진 얼굴만 달라졌을 뿐.
하지만 노주택 원장의 고향은 황해도 옹진 바닷가. 지금도 눈을 감으면 조기 잡던 바닷가며 어머니 얼굴이 떠오른다. 아버진 공무원이셨는데 성냥불을 대면 확 붙는 독한 술을 즐기셨다. 아버님은 좋은 고기가 생기면 교장 선생님 갖다 드리라고 하셨다. 그 교장 선생님이 그를 교회로 이끈 것이다. 하지만 장면은 안타깝게 그곳에서 맴을 돌고 어머니는 늙지도 않고 계시다.
전쟁. 강령중학교 4학년 때. 2주일만 갔다 온다는 게 영원으로 이어졌다. 아, 그리운 어머니. 통일이 되지 않으면 장가도 안 가리라. 어머니를 모시고 결혼하리라. ‘이 담에 커서 술 담배 하지 마라’ 그 말도 지키리라. 아들의 소망은 슬프게 커져만 갔지만 전쟁은 강인함을 요구하였다.
연평도 피난 시절. 무수한 사람들이 죽어갔다. 전쟁의 비극은 총격, 폭격만이 아니었다. 마실 물조차 부족한 상황에 전염병이 기승을 부렸다. 장티푸스로 환자가 발생해도 전염될까 무서워 선뜻 그 집에 들어가지 못했다. 그 때 어린 청년 노 원장은 눈물을 흘렸다. 죽음 때문이 아니라 생명을 바치는 아름다운 사랑을 목격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영상은 그 인생의 지표가 되었다.
한 오막살이집. 아이는 살아 있고 부모는 죽었다. 청년은 겁나 망설이는데 목사는 선뜻 들어가 아이를 안고 나왔다. 그리고 교회에서 환자들을 돌보았다. 바로 고아원 성육원의 원장 박 목사. 그는 이런 일들을 알고나 있을까? 그 날들의 그를 보고 자라난 노주택이란 나무를.
휴전선이 그어지고 그곳 피난민들은 충북 진천으로 옮겨왔다. 그러나 그의 내공은 커져만 가고 사랑으로 메꿔졌다. ‘저도 허락해 주십시오…. 저에게도 그런 사랑을….’

이봐, 누가 좀 불을 켜 주게나.
더듬거리면서 겨우 여기까지 왔네그려. 이렇게 깜깜해서야.
이젠 아주 글렀네. 무서워서 한 발자국인들 내놓을 수 있겠는가?
이봐 누가 좀 불을 켜 주게나.
- 이상 ‘누가 좀 불을 켜 주게나’

사랑의 대화
그렇다. 그는 불을 켜고 기다리는 사람이다. 이상의 말마따나 7년이면 세포가 다 바뀌어 이전의 몸이 아니듯 육친의 정에 매이지 않고 뛰어넘은 아버지가 되고자 하였나 보다.
노 원장은 밤 11시가 되도 아이들이 새소망의 집에 다 들어올 때까지 불을 켜놓고 기다린다. 언덕을 올라오다 불이 꺼져 있으면 얼마나 아이들이 쓸쓸하겠냐는 것이다. 기다리다 그는 그 한마디를 듣고서야 잠을 청하러 간다.
“다녀왔습니다.”
“오냐.”
참 심플하지만 확실한 사랑의 대화다.



무언가 있다
1966년 당시 부천 새소망 소년의 집 원장으로 있던 미국인 잭 홈 선교사가 그를 불러 총무를 맡겼었다. 마침 근무하던 대구 성광보육원이 정리되던 때였다. 잭 홈 목사는 한국에 와 선교할 지방을 택하려고 고심하던 어느 날 대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나가 보았다고 한다.
‘거지 소년 3명이 깡통을 들고….’ 깡통? 전쟁 후엔 깡통이고 그 전엔 바가지이고.
‘밥 좀 주세요~’ 하는 소리와 양철 숟갈 댕댕거리는 소리가 함께 들린다. 그 소리가 그들을 구했다. 처량하지만 밝게 울리는 가벼운 소리. 잭 홈 목사는 한두 끼 밥보다 자립을 도와주고 싶어 그들이 기거하는 곳을 찾아간다. 산굴에 6~7명의 거지 소년들이 동냥을 하고 넝마를 줍고 생계를 이어갔다.
이토록 소중한 만남과 시작이라니! 선교사는 급한 대로 10인용 천막을 사서 쳐주고 보호자가 된다. 국제 월드선교회에 요청하여 역곡동 지금의 자리도 매입하고. 이젠 우리도 외국을 돕는다. 난민들을 도우러 가기도 하고. 사랑은 고리가 되고 몇 배의 기쁨도 데리고 온다. 그 거지 소년 중 3명이 신학대학을 가서 목사가 되었다.
1977년 정부는 북한에서 해외 후원금 모집용 팜플렛을 수집하여 역선전한다는 이유로 외국 선교사의 육영사업을 막았다. 한평생 이곳을 사랑한 잭 홈 선교사는 고심 끝에 그에게 원장직을 맡기고, 국제선교 일을 하며 아이들을 돌보았다. 그러나 1980년대 정부는 국가 위상 등을 고려해 외국 선교사가 복지사업 하는 자체를 원치 않게 되었다. 잭 홈 목사는 결국 미국으로 돌아갔다.

노주택 원장. 이름대로 ‘개인 소유의 집 한 칸 없는’ 사람 앞에 버려진 아이, 폭력에 시달린 아이, 경제 사정이 안 되는 아이, 가출한 아이 등 그가 사랑하는 아이들, 하나님의 사랑으로 돌보아야 할 아이들이 175 명이나 있었다.
그는 바로 행동했다. 시청, 교회, 상공회의소를 통해 도움을 청했고 옆 대학의 하숙생을 받아 수입을 올리고, 채소도 가꾸었다. 직원들과 곳곳의 선배들도 도왔다. 위기는 해소되었고 밝은 기운이 다시 찾아왔다.

그리고 초창기부터 20여 년의 세월이 지나도록 동고동락하며 지내온 막강한 동료 네 가정이 든든하게 곁에 있어 큰 힘이 되었다. 그들도 노 원장이나 다름없이 이곳에 기거하며 아이들을 이곳에서 같이 키우고 고생시키며 살아온 둘도 없는 동지들이다. 둘이 세상을 떠나고 한 사람은 모자세대 원장으로, 김연태 사무국장은 늘 이곳에서 그를 돕고 있다.

이렇듯 새소망의 집에는 무언가 있다. 정스러운 것. 어른이 있고, 삼촌이 있고, 아주머니가 있고, 목사가 있고, 대학생이 있고, 고등학생도 있고 유치원생도 있고, 선생님이 있고, 언니가 있고, 형이 있고, 동생이 있고, 신혼 부부가 있고….
아들들에게 ‘이곳 아이들을 대학교 못 보내면 너희들도 안 보낸다’던 노 원장. 보건복지부에서 스위스에 갈 유학생 선발한다는 걸 알고 놓치지 않고 14명의 아이들을 챙겨 준 사람이다. 유학 길로 밀어 줘 경제학 박사, 물리학 박사, 해외 교수 등의 지도자를 배출시키고, 목회자 30여 명에, 사회복지사, 석사, 학사 외에도 외국 유수회사 부사장, 국내 중견 기업 간부 등 수많은 인재들을 키워냈다. 경제학 박사는 부랑인 수용소에 있던 아이다. 경찰청에 있는 한 아이는 넝마주이였다. 이곳 아이들은 다 부천 초등학교, 부천 중학교, 고등학교 선후배며, 친구며, 가족이다.

꽃들
그룹홈 형태로 같이 사는 부부 보육사 중에는 이곳 출신 선배가 많아 지금 9세대 중 5세대가 선배부부로 목사 보육사도 있다. 이들도 출퇴근 없이 생활하며 120여 명을 키우고 있다. 그들도 아기들을 낳으면 노 원장처럼 같이 키우길 바란다. 부부가 키우니 아버지 역할, 엄마 역할의 삶을 자연스레 배운다. 할아버지 같은 원장님, 사무국장도 다 한 식구인 게 맞다. 식당엘 가면 따끈한 바닥에 둥그런 앉은뱅이상이 여럿 있다. 언제나 반가운 얼굴이 있어 같이 맛있는 밥을 먹는 학생들.
노 원장이 표현한 대로 천사 같은 아내 김종해 씨(67세)가 모처럼 하소연을 하나 보다.
“여행은 못 가봤어요. 작년에 설악산 한 번 가려고 가방 한 번 샀다가 못 썼어요…. 입덧 하느라 먹지를 못해 구멍가게에서 시든 사과 세 개 사서 먹으려 했더니 여기 애들은 깎아 줬냐고 물어요….”
그녀가 벙글 웃으며 새색시 같은 얼굴로 모처럼 털어놔 속이 시원하다고 한다. 그의 가족들은 모든 걸 받아들이고 순명했다.
그 위에 꽃들이 피어나고 있었다. ‘여기서 나가기 전까지 꼭 이뤄야 할 것. 첫째, 성경을 한 번 다 읽는다. 둘째, 대학교를 가야 한다. 셋째, 태권도 유단자가 된다.’ 몸과 정신의 건강으로 사회에 일원이 되는 것을 넘어, 리드하길 바라는 노 원장의 소망이 피어나고 있는 것이다.
금년부터는 더욱 열심히 교육시켜 일류 대학에도 많이 보내고자 아동교육복지관을 건립하고 있다. 물론 대학에 안 가는 아이들은 직업교육을 시켜 취업하도록 힘쓴다.


아들의 웃음
아이들이 머무는 집안은 훈훈하고 엄마들은 TV 앞에 ‘시사프로 뉴스 볼 것’을 붙여놓은 집. 그 창 너머 감나무에 감이 파란 하늘에 묻혀 도드라지고 언덕 위 교회가 가을 빛으로 예쁘다.
“아버지를 존경해요. 1/10만 해도 잘 하는 걸 텐데….”
아들의 웃음이 왜 그리 깊고도 넉넉한지…. 가슴 한쪽이 뭉클하다.

글쓴이 이인영은 아산재단 편집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