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얼굴 들꽃피는마을 김현수 목사 이인영


하늘이 모처럼 푸르러 푸근한 날 아이들을 만났다. 초대받지 않았지만 점심 휴식 시간에 들꽃피는학교 홀에 들어갔다. 예쁘장한 눈매가 야무진 여학생이 피아노를 치고 몇몇 친구들은 노래를 따라 불렀다. 최대한 편한 자세의 아이들. 노란 염색 머리, 별 목걸이, 귀걸이를 해도 이 학교는 무방하다.

아이들, 열려 있다
남녀 학생 10여 명이 무관심하고 싶다는 표정으로 꺼칠하게 힐끗 본다. 저만한 또래의 청소년들. 누구네 자식 할 거 없이 반항하기 위해 준비된 아이들. 그래도 공유한 기억은 미소를 짓게 한다. '좀 전, 시간대는 달라도 같은 반찬과 밥을 먹었잖니….'
PC를 열심히 치고 있는 소녀 옆에 가 반대 방향으로 앉았다. 보통 속 얘기 하려면 몇 달이 걸린다던데 편한 에너지의 교집합이 순식간에 기습적으로 이뤄졌나 보다.
"PC내용 안 볼게…"
"보셔두 돼요."
"추석에 아무데도 안 가니?"
"아뇨, 세 군데나 가야돼요. 아빠 집, 엄마 집, 친척 집. 엄마가 좋구요, 아빤 재혼했어요. 아빤 여자가 많아요. 그래서 싫어요."
아니, 뭔 일일까? 황송해서 할 말을 잊는다. 고1이라는데 눈을 바라보니 너무 순하다. 어찌된 일인지 그 소녀의 브리지한 긴 머리를 간간이 만져도 되게 되었다. 가출 청소년, 결손가정 청소년을 가르치는 대안학교 들꽃피는 학교에서.

우리는 이쁜 아이들이야
우리는 이쁜 아이들
우리는 이쁜

아아 이뻐라
우리는 열려 있다
-황동규 '사랑의 뿌리' 중에서

바로 이 얼굴
이 학교를 세운 김현수 목사(49세)는 소위 운동권 출신이다. '바로 저 얼굴이구나!' 그의 맑은 얼굴을 새삼 바라보았다.
겁없이 유인물 돌려 가을학기 학교에 가면 휴교령이 교문 앞에 크게 나붙게 한 사람.가을 축제의 낭만 같은 소린 얼어붙고, 때론 부끄러움에 수근거리게 한 사람, 다방으로 몰려다니면 으레 나오게 마련이던 이야기, 프락치며, 카메라에 찍혔을 거라는 둥, 우리도 뭐 동참해야 하는 거 아닌가 해서 언어의 반찬에 불안을 넣어 만들어 주던 사람.
민주화 운동, 데모, 긴급조치 위반, 노동자, 투쟁, 좌경화, 민중민주주의…. 세상을 관념이 아닌 실천의 대상으로 보았던 용기 있던 피끓는 청춘들. 감옥에 갔다와서 고향집으로 갔다는 소문거리는 의레 제공되고…. 바로 그들 중 하나인 그를 정치가가 아닌 목사로 마주하게 되었다.
"어용이었는데요…." 갑자기 웃음소리가 그의 들꽃학교 안에 울려퍼졌다. 분단의 비극처럼 같은 세월을 타고났어도 졸업하면 한쪽은 회사의 발전을 위한다는 책자를 만들고 한쪽은 선봉에 서서 투쟁을 했다. 구경꾼은 아니었지만 누구처럼 숟가락의 사유에서 거리가 생겼던 걸까?

젓가락은 둘인가 하나인가
젓가락은 둘이면서 하나다
모았을 땐 하나
벌렸을 땐 둘
모았다 벌렸다 하는 것이 젓가락이매
남과 북도 우선 당분간은 그럴 일이다.
-김지하의 '수수께끼'

나눈다는 것
1977년 한신대에 다니던 그는 긴급조치 9호 및 반공법 위반으로 구속 수감됐었다. 하늘이 잿빛으로 바뀌는 걸 그때 그는 보았다. 유인물이 평화통일 등 너무 폭 넓은 내용을 담고 있었던 탓에 정치범 교도소에서 또 다른 차원의 삶을 맞게 된 것이다. 대학 신문엔 연일 동아언론 탄압 내용이 범벅이 되었던 그 시절에….

저녁 후면 '시와 문학의 밤' 도 창살 너머, 낭송으로 열었다. 말로 바둑도 두고, 비전향 장기수를 보며 민족 분단의 아픔을 다시금 뼈저리게 느끼기도 했다. '감사한 그 시절'이라고 그가 표현했다. 그곳에서 경제, 철학, 역사, 세계사 등 많은 공부를 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철창 안에서도 젊은이들은 꿈을 접지 않는다. 그도 그랬다. '난 농민들과 같은 가난한 사람과 살아야 겠다.'
가난한 사람들이란 누구일까. 밥을 고민하는 사람들. 뭔지 빼앗긴 거 같아 허전한 사람들. 그 때문에 혁명세력이 생겨나고 사람들은 거칠어진다. 어쩌면 나눈다는 건 같다. 그들의 편이 돼서 밥을 챙겨 주겠다는 것과 있는 걸 나눠 복지사회를 만들자는 것. 정치가 무력하면 민간이 나서는데 젊은 혈기의 사람들은 그 시간을 앉아서 기다릴 수 없다는 것. 그것이 그 시절 학생운동이요, 데모 아닌가?

품고 가르치고
출감하니 10.26후 1980년 민주화의 봄이 왔고, 그는 사목의 길로 들어섰다.
'새벽에 가 보니 교회 지하실에 아이들이 웅크리고 잠을 자고 있었어요."
1994년 가출 청소년들과의 만남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들꽃피는 마을, 학교의 시작은 어쩜 피아노 아래 얼기설기 누워 노래 부르는 것이 아닌, 얼기설기 구부리고 자는 바로 그것이었다. 가난의 자녀들. 숙식이 해결 안돼 찢어진 가정의 앳된 청소년들이 갈 곳을 잃은 것이다. 아무리 쫓아도 가지 않던 제도권 밖의 아이들. 약물 중독으로 신음하던 아이들.
"목사님 아침 밥 좀 사 주세요! 배고파요." 문을 잠궈도 아침이면 달려왔다. 어찌하랴. 유인물 대신 아이들을 봉고차에 싣고 함께 구질구질 엉켜 사는 그 삶을 택했다.
아파트에서도 살았지만 불량청소년 불러들이냐고 비난하는 주민들의 반대로 쫓겨나와 폐농가, 수목원에서도 살고 봉고차 인생도 되었다. 파출소에 가도 보호자로 자신을 지목하던 아이들. 젊다는 건 나이가 문제되지 않나 보다. 감옥에서 나와 노동자가 많은 안산 지역에 민중교회를 세우고 노동 사목을 하던 그 시절에 만난 아이들을 도망다니지 못해 차라리 끌어안았다.
내 가슴에 안는 건 고통과 희생을 함께 안는 일. 우선 김 목사 부부의 희생이 요구되었다.
늘 한뜻으로 살아온 동지 같은 그의 아내 조순실 씨는 여학생 2명을 맡아 하나의 가정을 꾸렸고, 김현수 목사는 남학생 6명과 가정을 꾸렸다. 남들같이 부부가 저녁에 TV도 보고 오손도손 보글보글 된장찌개를 끓여 먹는 평범한 일은 그들에겐 허락되지 않았다. 김 목사도 저녁이면 밥을 해 먹이고 청소년들을 돌보아야 했다. 바로 그룹홈이다.
지금은 그런 그룹홈이 늘어나 안산, 봉평, 진천 등지에 10 가정이나 된다. 14명의 생활교사 선생님들이 40여 명의 학생들과 함께 살아간다. 유학 가려다 다시 주저앉은 부부에, 여름 도보여행 체험학습때 봉사하다 정들어 이 길에 들어선 27세 된 젊은 총각 선생님도 있다.
김목사 내외뿐이 아니다. 85세 된 그의 노모도 한 가정을 꾸리고 있다. 대학 가서 감옥 가는 걸 보신 어머니가 아들을 도와 한 가정을 꾸리신다니! 남들처럼 오롯이 효도하고, 아내와 딸과 꿀단지처럼 살고 싶은 마음을 그는 어찌 다스렸을까? 아니 그도 그지만, 아내는? 어머니는?
대부분 아이들을 학교에 다시 보냈지만 복학이 불가능한 아이들을 위해 1997년 들꽃피는학교도 세웠다. 인성교육을 중심으로 검정고시 교육, 특기교육, 봉사활동 등을 시킨다. 희생 속에 핀 들꽃피는마을은 아이들 저녁을 품어 주는 마을이요, 들꽃피는학교는 그 마을 아이들을 낮이면 따뜻하게 가르치는 학교다.


남다르다는 것
강원도 횡성 갑천면. 별이 잘 보인다는 태기산 기슭이 그의 고향이다. 그는 어린 날 솔방울로 싸움하고 돌 달궈 감자 구워 먹었던 원시 무공해 소년이었다. 부모님은 농사를 지었다.
어느 날 정점처럼 숨을 멈추게 했던 그 적막을 그는 지금도 기억한다. 소 꼴을 많이 베기 위해 자꾸 들어간 깊은 산. 무아지경에 빠진 그가 허리를 들었을 때 주변에 고요 외에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낚시대를 드리우고 있던 날도 그랬다. 고개를 들어보니 친구는 간 데가 없고 적막 속에서 버려진 그가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남다르다는 것. 집중하여 실천한다는 곳엔 남모를 쓸쓸함과 철저한 고립이 내재되어 있나 보다. 그게 선의에서 시작되었다 해도…. 어차피 대중은 날씨만 어둑해도 가도 되니까. 별이 쏟아지는 산골의 소년은 외로울지라도 자신의 할 일을 온 몸으로 해내는 '현실성 있는 돈키호테' 였다.
"EMI, 제일학원에서 칠판 지워 주고 공짜 학원 다녔어요."
서울 성북역 뚝방 따라 판자집이 어마어마하게 집대성을 이룬 곳에서 외삼촌과 살며 검정고시로 고교를 졸업한 김현수 목사.
EMI라니? 웃음이 나온다. 정통종합영어를 배우던 종로의 유명한 단과 학원 아닌가?분명 EMI에서 봤을 거야, 아님 학교 앞에서? 학원 선전 유인물을 학교 앞에서도 돌렸다고? 친숙한 느낌의 이유를 헤아리기 위해 재삼 평화로운 그의 얼굴을 살펴본다. 그래서 유인물 돌리기에 계속 익숙했나.

손 꼭 잡고
학교 옆 와동체육공원 소나무 숲에 시원한 바람이 불었다.
공장에 위장 취업했던 전형적인 노동운동권 여학생 출신 아내 조순실 씨는 경기여고와 서강대를 나온 재원. 들꽃피는마을 공동대표로 철저히 낮은 사람들을 위해 몸을 증거하며 살아온 그의 후원자며, 친구, 동지, 애인이다. 그녀는 이젠 투쟁이 아니라 넉넉해진 미소로 아이들을 감싼다. 두 여성, 어머니와 그녀가 있었기에 그의 삶이 풍요로울 수 있었다.
노동자, 근로자…. 어휘를 찾다가 불쑥 물었다.
"요즘노조 어떻게 생각해요. 경영권도…?"
" 00 기업은 놀라울 정도로 진보적입니다. 긍적적이지만 그만큼 조합원의 책임도 크지요."
좁혀져 가는 거리는 사람이 만든다. 대상이 있으면 그를 불러 오든지 내가 다가가야 한다. 나누려는 마음과 책임감을 가지고…. 부부는 먼저 다가가기 위해 오늘도 손을 꼭잡고 걸어가고 있었다.
1990년대 정말 기도하고 싶어 찾은 하나님. 경제적 권익 쟁취도 떠나고, 정치적 권리 획득도 떠나고 오롯이 인간 본성의 문제에 매달려 찾은 하나님은 언제나 등 뒤에 쭉 계셨었다. 해방신학, 민중신학을 거쳐 찾은 하나님은 '진리의 하느님이라기보다 죄인들의 하나님, 친구 같은 하나님' 이라고 귀한 말을 들려준다.
말없이 미소로 바라보는 두 사람. 상처받은 아이들을 이 세상 중심에 들이밀기 위해 그들은 오늘 또 어떤 모의를 하려는 거지?

글쓴이 이인영은 아산재단 편집장이다.

새롭게 짓고 있는 '들꽃피는학교'를 후원하고 싶으면 국민은행 247-21-0690-503 김현수
문의/ TEL: 031-486-883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