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얼굴 울보천사 날개달기 , 조규환 은평천사원 원장 이인영


일하는 행복 작은 비닐에 안내 종이를 끼워 넣는 단순 작업장. 부자유한 몸으로 하나 하나 집어넣는 그들은 진지했다. 신성한 노동. 그들이 작업을 하여 단돈 100원이라도 번다는 건 소중한 일이다. 놀지 않고, 상품을 창조하는 일에 미약하나마 힘을 보탠다는 건 어찌 보면 전체다. 그게 원활해지면 평생을 한다 해도 그들은 일하며 사는 사람이 될 수도 있다. 평생 감자만 깎다가 성인이 된 사람도 있지 않은가. 어릴 적 부모들이 그들의 비틀어진 몸을 보고 애태웠던 시간들. 그 당황했던 슬픈 눈동자까지 그토록 그들이 집중하는 그 작은 손놀림에 묻어 있다. 많은 일들을 겪고 초대받았다, 어우러져 살자고. 그리고 그들은 지금 노력하는 중이다.

나에게
“불쌍하게도”라고 했던 사람들에게
나는 “불쌍하지 않아요”
나를 보고
“시설이 없으니 못 온다”라고 말한 사람에게
나는 시설이 없어도 갈 수 있어요
나를 향해서
“노력해, 더더욱”이라고 말한 당신은
얼마나 노력하고 있습니까?
“노력해”라고 말만 하지 말고
우리 함께 애써 보면 어떨까요
- 뇌성마비 소년의 ‘당신에게’-

피난 시절 조규환 이사장(66세). 그의 눈은 어려운 사람들을 사랑하고서 휴식처럼 얻는 소탈한 빛을 띠고 있었다. 그 평화 같은 소탈은 열성을 베개 삼아 잔 뒤에야 오는 개운한 빛이었다.
1948년 이념 전투 통에 더 이상 살기 힘들어 어머니는 초등학생이던 그와 황해도 옹진에서 월남했다. 지금도 이북 고향에는 형제들이 있다. 그가 남다른 데가 있다면, 중요한 것, 꼭 해야 할 일을 놓치지 않는 영민함과 선함이다. 이미 아버지는 돌아가셨고, 어머니는 살아남기 위해 무거운 광주리를 이고 장사를 나가셔야 했다.
피난처 대구에서의 생활은 비참 그대로였다. 중학교를 가야 하는데 먹기조차 힘든 날들. 어린 그는 나무도 하고, 구두닦기며 할 수 있는 일은 다했다. 간신히 6개월의 중학 시절을 보낼 수 있었다. 새벽이면 아저씨들 틈에 줄 서서 막노동판에 뽑힐 차례를 기다렸다. 학교가 가고 싶어 눈물을 삼켜가며 일당을 쥐고 어머니에게 돌아가기 위해 꾹 참고 일했다. 그에겐 그 시절이 가장 슬펐던 걸로 기억된다. 이 슬픔이 싹터 이해심이 되었다. 아픈 이웃 속에 내가 보이고, 그래서 나도 덩달아 아파지는 것.
어찌어찌 야간 고등학교는 다닐 수 있었다. 형편없었던 실력. 영어라도 잘 하지 않으면 안되겠다고 눈치챈 그가 그야말로 청소년이 할 수 있는 힘이란 힘을 다 내었다. 새벽에 일어나 영등포의 일진 영어학원엘 갔다. 그리곤 직장에 가고 저녁엔 학교에 갔다. 이 세월은 야간대학교에까지 이어졌다. 그리고 토요일, 일요일이면 교회에 가서 봉사를 했다.
거기서 인생을 바꿔놓은 은평천사원 설립자의 아드님 윤삼렬 장로(훗날 장인)를 만나게 된다. 설립자 윤성렬 목사는 전쟁 고아를 위해 자신의 마지막 땅까지 다 바친 분이다.



아펜젤라 사람들 “복은 네가 만들어야 해. 행동해야 하느님이 복을 주신다.” 아펜젤라 할머니(초대 아펜젤라의 며느리)가 영어 실력이 좋은 그에게 어느 날 말을 걸었다. “여기서 일하면 좋겠네….” 한 마디도 덧붙였다.
감리교 아펜젤라 목사 가족. 개화기인 1885년 언더우드 목사와 함께 이 땅에 들어와 죽기까지 한국을 사랑한 사람. 44세에 목포에서 충돌한 여객선에서 빠져나오지 않고 사람들을 구하려다 함께 생을 거둔 걸로 알려진 사람. 배제학당을 설립하고 언더우드 목사와 연세대학교를 설립한 그는 하느님을 사랑하고 한국 사람을 사랑하기 위해 평생을 바쳤고, 독립협회와 독립신문을 긍정한 은인이다.
그분의 아들과 며느리, 딸도 다 이 땅에 남아 봉사하고, 외국에 있는 5대 손까지 이곳에 와 6개월씩 머물다 가며 틈틈이 봉사하고 후원금을 보내오는 등 지금까지 대를 이어 사랑을 실천하는 아름다운 가족들이다. 후손들은 다들 훌륭한 모습으로 각 나라에서 살고 있다.
아, 그렇다. 아펜젤라 사람들이 이 은평천사원도 도왔고, 가난한 청년 조 이사장도 은평천사원을 도왔다. 만남은 이렇게 찾아오나 보다. 사람도 만나고 인생의 지침이 되는 말도 만났다. 이화여대에 다니던 지금 아내(윤경숙 씨 -설립자의 손녀)도 성가대에서 만나, 평생 결혼 않고 살겠다던 공표만은 지킬 수 없었다.

울지 말고 ‘나도 사랑하고 살리라!’
‘결혼 안하고 고아들에게 한평생을 바치리!’
그의 결심은 대단했다. 고생 끝에 낙처럼, 50년대 말 남들이 부러워하는 미국 대사관 관리부에서 사무관으로 안정적인 직장을 가졌으니 좀 좋으랴만, 그는 그 길을 거부하고 사직서를 내고 떠났던 것이다. 은평천사원으로. 그리고 지금까지 40여 년의 세월을 한결같이 지켰다.

시장 한복판에서 울고 있는 아이.
울면서도 과자를 먹고, 중고 전자상 티비를 보며 울고,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울고.
생선들이 토막나고, 그릇들이 흥정되고, 앉은뱅이 수레가 지나
가고, 트럭이 경적을 울리며 겨우 빠져나가고, 땡중이 구걸하고,
그사이 몇 번인가 닭 목이 비틀어지고, 다시 전도사가 지나가고,
튀김들이 익어가고, 모든 걸 구경하는 아이가 울고, 서성이며 울고, 또 울고.
공중으로 첫 별이 꽂히고, 바람이 뒤섞인 냄새 사이를 휘청이며
지나가고, 시간이 지나가고, 가을이 오고, 그곳에 서서 아이는
울음이 젖어 연거푸 울고,
세월이 가고, 울고 있는 아이의 얼굴에 수염이 돋아나고, 주름이
패이고, 머리칼이 하얗게 바랠 때까지 그저 울고.

-배용제의 ‘울고 있는 아이’ 중에서

우는 아이는 나이 먹어서도 그저 울 수밖에 없다. 악순환 속에서 더욱 더…, 또 술 마시고 신세 한탄하다 보면 또 실수하고…, 1,000여 명 중엔 잘 된 이들에, 속 썩이는 이들에, 별별 사람들이 많다. 형무소를 수도 없이 들락거리며 마음 아프게 한 사람은 60세가 된 지금도 찾아오고, 칼 들고 싸움판 벌이던 사람도 “아버지” 하고 찾아온다. 가슴 졸이는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어려운 사람들은 자립하지 않는 한 수염이 나도 울 수밖에 없다는 걸 보았다.
물론 자립시킬 수 있었던 아이들은 커서 그에게 큰 기쁨도 안겨 줬다. 스탠포드대 박사로 미국 NASA(항공우주국) 책임자가 된 이, 교수, 의사, 목사 등 숱한 인재들이 각 분야에서 그들의 몫을 다하고 있다. 공부시켜 주고 아주 잘하는 아이는 유학까지 어떻게 해서든지 보냈으므로 꽃을 피웠다. 그래도 걱정은 늘 힘든 사람들을 향해 있었다.
세상엔 자립하기 너무도 힘든 아이들이 너무도 많은 것이다. 바로 장애아들. 입양 등으로 고아들이 줄어들자 그는 바로 장애아들에게 눈을 돌렸다. 1980년 장애아동 시설인 은평재활원을 세우고 그들을 돌보기 시작한 것이다. 고아처럼, 장애인도 열심히 도와 주면 평생을 울지 않고 ‘세금 내고 사는 떳떳한 사람’을 만들 수 있을 거라는 것과 그 일을 빨리 해야 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천사들 은평천사원에는 재활원, 특수학교인 대영학원, 장애인복지연구소, 복지관, 교회, 점자도서실, 탁아소, 재활병원, 체육센터 등이 장애인들의 재활을 돕기 위해 하나 하나 들어섰다.
재활원 식구들이 있는 방에 들어서자, 열심히 컴퓨터 시험 공부를 하는 친구, TV를 보는 친구들이 있고, 한쪽엔 작품성이 뛰어난 그림을 그리고 있는 친구들도 있다. 머리를 노랗게 물들이고 공부하는 친구가 수줍은 미소를 띠고 있다. 뇌성마비인가? “열심히 공부하세요” 하자 답으로 웃는 그의 모습이 지금 떠올려도 이쁘다.
“처음 시작할 때 여자 재활원도 같이 해야 되는 건데….” 그가 가장 가슴 아파하는 부분이다. 그때는 힘들어서 우선 남자 장애인부터 시작했는데 세월이 흘러 결혼할 나이가 되어도 연애할 대상이 없단다. 목 이하를 움직일 수 없어 침대에 누워 지내는 장애인 남녀가 얼굴만 돌려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사랑을 느끼며 행복해 하는 장면을 보고 그는 크게 깨달았다.
그 얘기를 듣고 봐서인지 가슴이 몹시 아프다. 이곳에 와서 30세가 되도록 설레며 사랑할 또래를 만날 기회가 없다니! 눈만 마주쳐도 얼굴이 붉어지는 풋풋한 사랑 한번 가슴에 담을 수 없었다고 생각하니 왠지 미안하다.
1978년 조 이사장이 미국에 갔을 때 85세이던 아펜젤라 할머니를 너무도 반갑게 다시 만났었다. 앞으로 장애인을 돕겠다는 말을 듣고 너무 좋아하던 할머니는 유산을 결국 이곳에 다 주었다. 은평천사원이 여러 사람의 도움으로 이렇게 올 수 있었다고 말하는 그. 아산재단이 정부 지원이 없던 1980년대 초부터 시설비며 장학금이며 오랜 세월 도와 주었다고 진심으로 감사의 말을 전했다.
조 이사장은 자기 재산이 없다. 집도 재산도 다 바쳤다. 지금 월급 중 반쯤도 이곳을 위해 다시 내놓는다. 지난번 아산사회봉사상 상금도 물론 체육관 짓는 곳에 보냈다. 부인의 긍정이 없다면 불가능한 일이다. 연애했다는 그녀는 신혼 때부터 시어머니가 98세로 돌아가실 때까지 이곳에서 모셨다. 자녀들에겐 1원도 안 주고, 학원도 보낸 적이 없으며, 사촌에게 헌 자전거라도 물려받으면 원생들에겐 새 자전거를 사주고 마는 조 이사장과 뜻을 맞춰 살아온 아름다운 여인이다. 유학은 안 보냈지만 자녀들도 다 잘 자라 주었다.

우리 함께 애쓰면 천사원 입구의 재활체육센터에 들렀다. 여느 곳처럼 지역 주부들이 에어로빅, 댄스 등의 안내판을 들여다보고 시간을 짜느라 여념이 없었다. 환한 현대식으로 잘 지어진 건물. 다른 점이 있다면 장애인들이 많이 섞여 있다는 점이다. 장애인들은 이곳에서 함께 어우려져 수영도 배우고 재활을 꿈꾼다.
조 이사장이 ‘천원 후원자가 10만 명만 되어도 많은 장애인들이 무료로 이용할 수 있을 텐데….’ 하던 말이 떠올랐다. 그리고 환한 인사를 하늘로 천장으로 쏘아대던 그들이 우리 모두를 향해 말하는 거 같았다.
“우리 함께 애써 보면 어떨까요?”

글쓴이 이인영은 아산재단 편집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