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얼굴 사랑은 전염성이 있지만 음성 나환자는 전염성이 없다 이인영


성심원 유의배 Uribe Luis Maria 신부


유 신부가 이 골목 저 골목 걸을 때면 사람들이 들어오라고 부른다.
먹던 포크를 쓱쓱 잠바에 문질러 쥐어 주며 같이 먹고 가라는 것. 수도 없이 불려들어가 얘기도 듣고 찌개며, 감자며…, 이것 저것 이집 저집에서 먹다 보면 배가 불러 하루에 한 끼를 수도원에서 먹으면 잘 먹은 거라니…. 그 세월이 다라니…. 그의 조용한 깊은 모습이 어찌 존경스럽지 않겠는가.
사랑은 전염성이 있지만 음성 나환자는 전염성이 없다

마음 가난한 신부님

갑자기 쌀쌀해진 날 오후, 경남 산청의 성심원에 도착했다. 여느 시골 농가와 다름이 없는데, 볕에 말리고 있는 무말랭이, 호박, 무청 등이 을씨년스러워 보이고 쓸쓸해 보인다. 같이 나눌 아들과 딸이 보이지 않아서일까…. 한센병(나병)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사는 가정사를 지나고, 빨갛게 피어 있는 사루비아 화단과 배추밭도 지나 성당으로 올라갔다.
내심 프란치스꼬회 신부를 만나 살아온 얘기를 듣는다는 사실이 기뻤다. 좀처럼 개인 얘기를 안 하는, 내적으로 수도를 하며 사는 사람들이라 그 시간이 귀함을 절로 알아서이다. 마침 성체 조배하는 시간, 신비의 빛이 역력한 곳에 희끗 희끗 쓸쓸한 뒷모습들 사이로 유의배 신부(56세)의 뒷모습이 보였다.
하느님을 만나는 침묵의 시간에 방해되지 않으려고 함께 몰입되어 있었다. 그러고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유 신부가 움직이더니 제단 앞에 무릎을 꿇고 엎드린다. 깊은 감동이 내부에서 올라왔다. 젊은 나이에 이곳에 와서 한센병 환자들과 이십 여 년을 산 그가 저렇듯 온 마음으로 하느님께 전하는 내용이 뭘까? 얼마나 가난한 마음일까….
그의 뒤에는 손가락이 떨어져 나가고, 눈이 멀고, 얼굴이 삐뚤어진 환자들이 그와 마음을 합해 그들이 믿는 하느님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무엇을 의논할까? ‘병을, 죽음을, 자녀를, 동무를, 고마운 이들을, 신부를, 먹고 살 일을…, 외로움을…, 슬픈 영혼을….’
밖은 아름다운 산에서 온 깊은 가을 바람이 마른 풀들 사이로 불어 청량한 느낌이 돌고 있었다.

고향, 게르니카

유 신부는 스페인 바스코 지방에서 자랐다. 바스코 지방의 작은 도시 게르니카와 스페인. 지리산 근처 여수, 순천, 벌교 지역과 우리나라를 대비하면 될까? 너무도 유사하다. 삼면이 바다인 것도 비슷한 스페인.
스페인 내전은 어찌 보면 더했다.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의 배경이 되고, 피카소가 그 처절한 비극성, 전쟁의 무서움, 민중의 분노와 슬픔을 표현해 ‘게르니카’라는 20세기 기념비적 회화를 창조했던 그곳.
세계 2차 대전이 일어나기 전 1936년 2월. 노동자, 농민의 지지를 얻은 스페인 제2공화국 인민전선 정부가 수립되자, 군부는 프랑코 장군의 지휘 아래 대지주, 대자본의 지지를 얻어 군사반란을 일으킨다. 파시스트적 국가주의자 프랑코는 히틀러, 무솔리니의 도움을 받았고, 제2공화국은 프랑스, 멕시코, 소련의 지원을 받았다. 한 나라 안에서 이념으로 세계적인 대리 전쟁이 일어난 셈이다.
유의배 신부의 어머니는 신앙심 깊은 쾌활한 아가씨였다. 몸이 약해 지도 신부가 수녀되기를 말리는 바람에 꾸준히 구애했던 아버지와 결혼했다. 아버지는 내성적이며 부드러우셨다. 두 분은 조화를 이루며 단란한 가정을 이뤘다.
그러나 작은 읍이었던 그곳은 비참해졌다. 게르니카에서도 표현되었듯 불타는 집에 죽은 어린이를 안고 통곡하는 어머니들…. 수많은 사람들이 피흘리고 죽었다. 그 와중에 유의배 신부네도 고통을 당했다. 아버지는 쿠키를 구웠는데, 잘 살던 할아버지 집과 두세 채의 집이 불타는 바람에 가세가 기울어 버렸다. 돈을 빌려 전세를 얻었는데 어려워진 살림에 아버지가 건강까지 잃고 말았던 것. 아버지는 위장을 버려 장례 준비까지 할 정도로 극도로 쇠약해지셨다.
어린 그는 결국 고아원으로 보내졌다. 그때가 9세 무렵이다. 한 1년을 그곳에서 보냈다. 그 때 보았다. 추운데도 땔감이 없어 떨어야 하고 마음 아픈 것이 무엇인지, 불쌍한 것이 무엇인지…. 이모들이 5명이나 있었는데, 자신의 자녀들과도 살기 힘들어 받아주지 않았던 그때의 비참함. 그리고…. 아, 보고 싶은 어머니….

가난하다고 해서 사랑을 모르겠는가
내 볼에 와 닿던 네 입술의 뜨거움
사랑한다고 사랑한다고 속삭이던 네 숨결
돌아서는 내 등 뒤에서 터지던 네 울음.
가난하다고 해서 왜 모르겠는가
가난하기 때문에 이것들을
이 모든 것들을 버려야 한다는 것을.

-신경림의 ‘가난한 사랑의 노래’ 중에서-

싹은 돋고

그러나 아픔 중에 그는 어린 싹을 준비하고 있었다. 불쌍한 사람을 위하고 싶다는 소망이다. 아버지 병도 나아지고 집으로 돌아온 그는 당연히 소신학교에 갈 생각을 했다. 신부가 되는 것은 너무도 자연스러웠다.
신앙이 몸에 배어 있는 어머니, 아버지는 여행할 때도 떠나기 전에 성당에 들러 15분씩 기도하고 떠날 정도였다. 스페인은 유서깊은 수도원이 많은 곳이다.
“프란치스꼬회에 가면 기차를 무료로 탈 수 있단다.”
부모님의 이 말은 절대적인 영향을 미쳤다. 물건을 사러 가시는 아버지를 따라 14㎞쯤 떨어진 바닷가를 가려면 기차를 탔다. 석탄을 집어넣고 칙칙 소리를 내며 멋지게 떠나던 기차를 그는 무척이나 좋아했었다. 기차가 먼저인지, 고아원이 먼저인지, 전쟁이 먼저인지…. 어쨌든 그는 떠났다.
“공을 차면 이곳 저곳으로 가듯이 이곳에 왔습니다.”
유 신부의 말이다. 공의 입장에서는 어디로 튈지 모르지만, 그래서 아무 곳이나 온 거 같지만 원의가 있다. 모든 것은 이미 계획되어 있다는 것이다. 방향까지도….

뭉뚝한 손

몹시도 조심스레 방에 들어갔다. 할머니랑 보글 보글 끓여 먹을 부엌의 냄비에 눈길이 갔다. 어릴 적 ‘쭛쭛쭛가 아이들 잡아간다’는 말을 들었던 기억이 잠재되어 있을 거고, 어느 순간에 두려운 눈빛으로 바보 같은 내가 나를 배반할지 모른다고 생각한 것도 잠시였다.
유 신부가 임완당 할아버지를 일으키고, 안아주고, 얼굴도 만져주고, 다정히 말을 건네는 모습을 보자 미소가 절로 생겨났다.
“안녕하세요. 할아버지!”
내가 들어도 맘에 드는 나의 목소리. 게다가 덥썩 손가락 없는 뭉뚝한 손까지 쓰다듬고 있는 나. 나 자신도 놀라고, 훈훈한 정이 감돌던 그날 그 방 안에서 눈도 먼 할아버지는, ‘듣던 목소리야…. 수녀님 맞지?…’ 하며 깊은 인상을 선물로 줬다.
유 신부가 이 골목 저 골목 걸을 때면 사람들이 들어오라고 부른다. 먹던 포크를 쓱쓱 잠바에 문질러 쥐어 주며 같이 먹고 가라는 것. 수도 없이 불려들어가 얘기도 듣고, 찌개며, 감자며… 이것 저것 이집 저집에서 먹다 보면 배가 불러 하루에 한 끼를 수도원에서 먹으면 잘 먹은 거라니…. 그 세월이 다라니….
그의 조용하고 깊은 모습이 어찌 존경스럽지 않겠는가. 사랑은 전염성이 있지만 음성 나환자는 전염성이 없다.

더 아름다운 세상을 위해

성심원에는 독신사, 가정사, 부부 요양소, 의원, 경로당이 있으며, 한쪽엔 중증 장애인 요양소가 건립중에 있다. 99%가 천주교 신자로, 신협도 있고, 축산을 통해 부수입을 올릴 수 있는 축산조합도 있다.
1957년 프란치스꼬 수도회에서 선교사를 한국에 보내 돌보기 시작한 지 40여 년의 세월이 흘렀다. 현재는 12대 원장인 김 프란치스꼬 수사를 중심으로 수도자, 수녀, 가족 등 400여 명이 고락을 같이 한다.
절망 속에 가족에게, 심지어 부모에게도 버림받거나, 스스로 가족을 버리고 죽어도 안 만날 것을 결심하고 떠나온 사람들. 떠날 때 그들은 전직 경찰, 교사, 장교, 내과 의사, 농부 등등의 과거 신분도 깡그리 다 버렸다. 누구나 자살을 시도했으며, 죽지 못해 살아남은 처연한 인생이었다.
그러나 이곳에 온 것은 어쩌면 은총의 시작이었다. 대리자 한 사람. 유의배 신부는 신학교 시절 70명의 지원자 중 최후 남은 5명 중 하나로, 24세에 신부가 되었다. 그는 아프리카나 아시아의 저개발국가에 가기를 희망하고, 특히 한국은 스페인과 같은 전쟁을 치른 아픔이 많은 나라여서 지망했다.
그때 청년 유 신부는 결심했다. ‘죽겠노라’고…. 타인의 이익을 위해, 이타적으로 살려고…. 그리스도가 자신을 위해 죽었듯이 이젠 그리스도를 증거하기 위해 자신이 죽겠노라는 것. 목숨을 걸고 더 아름다운 세상을 위해 바친다는 것이다.
한센병은 완치가 가능하며 조기에 치료하면 장애가 방지된다. 사람에겐 면역 기능이 있어 잘 전염되지 않으며, 보통 균은 3초 내에 죽고 더운 지방 등이 불리하다. 선진국으로 갈수록 줄어들기 때문에 우린 이미 줄어들고 있다.
이곳 가정사에서 같이 사는 자녀 중 9명이 지난 번에 대학교에 들어갔으며, 이곳에서 만난 한 할아버지는 아들이 신부라고 했다. 400명이나 되는 자녀 중 감염된 사람은 없다.

첫눈이 오다

새벽 6시 30분 성당에서, 수사들, 수녀들, 한센병 환자와 가족, 봉사자들이 미사를 드렸다. 은은히 성가가 울려퍼지고 참담함 속에 피는 꽃처럼 아름다움도 피어올라 왔다. 여명이 밝아 오는데, 왼쪽 창 밖으로 납골당이 삥 둘러서 있는 게 어스름 속에 보였다.
한센병 환자들은 죽으면 호강을 한다. 늘 가까이 아름다운 성가가 들리는 거리에서 성당과 이들의 사랑을 받는다. 살아서도 결코 자신들을 버리지 않는 신부와 젊은 수도자들과 예쁜 수녀들의 관심을 받으며, 임종시에는 기도와 사랑으로 깨끗이 염해 주는 유 신부의 손길을 받으며 천국으로 간다.
360여 명이나 염을 해준 유의배 신부. 남의 나라에 와서 한센병 환자들과 동고동락하며 임종시 못 가 뵌 친어머니를 그리는 따뜻한 남자. 같이 된장찌개에 숟가락을 넣어 푹푹 퍼 먹는 그가 너무 숭고하기까지 해 가슴이 벅차 오르더니, 귀가길 그날 때마침 찾아온 첫눈 속에서 환희가 함께 내리는 게 보였다.

글쓴이 이인영은 아산재단 편집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