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얼굴 은총의 샘가에서 사랑의 현(絃)을 켜다 이인영


베데스다 현악 4중주단
연주회

아, 가을이다. 열어놓은 창문으로 밤바람이 들어왔다.
아름다운 선율이 바람결에 흐르고, 머리 올을 스치며 들려오는 앙상블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클라리넷까지 5명이 모처럼 연습하던 날, 그 자리에 있던 건 행운이었다.
눈을 감고 떠올렸다. 비바람이 몹시 불던 그날도 베데스다 현악 4중주단은 20년 만에 창단 멤버가
함께 단상에 올랐다.
예술의 전당 콘서트홀. 휠체어를 탄 3명의 남자와 다리를 좀 저는 1명의 남자. 바이올린, 비올라, 첼로가
현을 떨며 소리를 내었을 때 저절로 청중들은 숨들을 죽이고 호흡을 가다듬었다.
하이든 '현악 사중주 작품 76-2', 모차르트 '클라리넷 오중주 가장조', 드보르자크 현악사중주 '아메리카'가 청중을 초대했다.

제1 바이올린(차인홍. 44. 미국 라이트주립대 교수 겸 지휘자)과 첼로(이종현. 43. 대전시향 단원)가 환상적인 선율을 풀어내자, 제2 바이올린(이강일. 46. 수원시향 단원)과 비올라(신종호. 45. 구리시
교향악단 음악감독)가 안으로 안으로 조용히, 때로는 깊숙히 인도하며 완벽한 화해와 자유를 청한다.
얼핏 우수가 지나간다. 그들의 집중력은 대단해서 영혼들이 와서 부딪고 싸안는 소리가 들린다.
아름다움의 원천은 무엇이었을까? 많은 일들이 있었고 많은 인연과 덕들이 오고갔다. 한 사람 한 사람
모두가 자랑스런 얼굴이요 아름다운 모습이다.

상처 입은 소년들


"엄마… 같이 죽자!…" 어린 신종호는 면회 온 어머니에게 매달렸다. 엄마의 눈동자가 커지더니
눈이 발개졌다. 외할머니 등에 업혀 학교 다니던 그는 할머니가 돌아가시자 어쩔 수가 없었다.
장사 해야만 하는 어머니, 군인 아버지…, 초등학교 4학년 때 엄마 품을 떠나 대전 성세재활학교에
오게 되자 어린 마음은 한없이 서러웠다. '왜 집도 아닌 곳에서 살아야 하나?'
매일 집과 엄마가 그립기만 했다.
'나는 뭐가 될 것인가?' 2살 때부터 소아마비를 앓아 다리를 못쓰는 차인홍도 어머니 등에 업혀
졸업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섬세한 소년은 깊은 충격을 받았다.
이강일도 돌봐 주는 누나 등에 업혀 졸업했지만 중학 시험에는 번번이 실패했다.
아니, 받아 주지 않았다. 할 수 없이 이곳 성세재활학교에 올 수밖에 없었다. '왜 친구들처럼
중학교에 못 가고 장애인들과만 살아야 하는가?' 그 놀라운 사실에 그의 가슴은 슬픔으로 가득찼다.
그리고 이종현. 그는 그날 처음으로 고백을 했다. 부모를 모른다는 것이다. 나이도 이름도 물론
고향도…. 가슴에 꽁꽁 간직한 얘기. 저 밑바닥 어디쯤에 잠궈놓은 영상들. 가끔 음악이 애잔한
파문을 일으키면 떠오르려 해 애먹이던 그 진한 그리움. 엄마, 아버지, 누나…. 집도 있고, 시장도 있고, 바다인지 냇가도 있고 철길도 있었다. 그저 기차가 타고 싶어 타 버렸다는데 그게 모든 것과의 이별이었다.

아이야, 어디서 너는 온몸 가득 비를 적시고
왔느냐, 네 알몸 위로 수천의 강물이 흐른다.
찬 가슴팍 위로 저 세상을 향한 강물이 흐른다.
갈밭을 헤치고 왔니. 네 머리카락에 걸린 하얀 갈꽃이
누운 채로 젖어 있다. 그 갈꽃 무너지는 서산을 아비는
네 몸만큼의 짠 빗물을 뿌리며 넘어갔더란다. 아이야
아비의 그 구름을 먹고 왔느냐.

-기형도의 '아이야 어디서 너는' 중에서 -

베데스다, 샘이 솟다


학교 마당에서 햇빛을 쏘이며 아이들은 옹기종기 있었다. 다른 날과 다를 것도 없는 그날,
서울대 음대를 졸업한 강민제 선생님이 유성으로 목욕을 가다가 택시 안에서 그 아이들을 보았다.
핏기 없는 창백한 아이들.
'웃음기 없는 쟤네들에게도 음악을 가르쳐 주었으면.' 그는 그 생각을 날려 보내지 않았다. 그가 성세재활학교에 찾아온 것이다.
학교에서는 특활반이 생기고 악기를 켜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음악이 들려도 외면하고 홀로
괴로움에 묻히는 사춘기를 맞고 있기도 했지만, 소년들은 서서히 악기에 흥미를 갖기 시작했다.
지기 싫어서 하든 매료되어서 하든 아이들은 열심을 내었다.
그러나 10대 후반 그들은 직업 연수를 위해 일본으로 보내져 인쇄 기술 등을 익혀야만 했다.
1년 일본 연수를 마치고 온 그들을 안타깝게 여긴 역시 서울대 음대 출신 고영일 선생님이 결국
그들을 끌어냈다. 1976년 오랜 아픔 끝에 '베데스다'란 이름으로 현악 4중주단이 창단되기에 이른다.
'은총의 샘물'이란 뜻이다. 천부적 재능과 섬세한 실력을 인정한 고영일 선생님이 눈여겨 본 덕이었다.
합숙이 시작되었다. 한옥을 빌려서. "몹시 추운 겨울날 나의 연습실 연탄광에(따로 연습해야만 했거든요) 찬바람이 불면 연탄가루가 확 날리곤 했어요."
백인 사회에서 100:1의 경쟁을 뚫고 오케스트라 지휘자가 된 차인홍 씨가 말했다.
열심히 손가락을 움직이지 않으면 손이 언다. 손이 곱지 않으려면 더 열심히 해야 한다.
그래야만 계속 연습할 수가 있다. 추워도 하루 10시간씩은 연습을 했다. 새벽 6시부터.
무슨 말이 필요하랴…. 16, 17, 18세의 청소년들. 그들은 아픔과 고난 속에 꽃을 피우고야 만 것이다.
한 아이는 부엌에서, 다락에서, 방에서 연습해야 했다. 고영일 선생님은 그들이 얼마만큼 강해야
살아남을 수 있는지를 가르쳤다.
그들이 절묘한 선율을 선사하는 것은 온갖 역경과 아픔을 겪어 왔기 때문이다. 1976년 5월, 첫 연주회가 성공리에 끝났다.

마침내 꽃은 피고


미국 신시내티 대학으로의 길도 열렸다. 그곳 졸업생인 서울대 신동옥 교수가 베데스다의 우수성을
알리고 주선했다. 1982년 테잎으로 오디션을 거친 그들은 세계적인 실내악단 라살 현악 4중주단의
초청을 받아 드디어 미국 입성을 하게 된 것이다.
그들에게는 남다른 인연들이, 덕들이 곁에 오곤 했다. 신동옥 교수의 친구인 장정자 이사
(아산재단 이사 겸 서울현대학원 이사장)와 아산재단 관계자가 그들 얘기를 듣고는 적극 그들을 후원했다.
음악을 사랑하는 장정자 이사는 어머니처럼 각별한 애정을 기울여 줬다. '은총의 샘'에서 치유와 사랑을 받듯이, '고통과 배려와 노력'이 늘 박자를 맞추며 이들을 놓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미국 유학길에 이종현은 따라갈 수 없었다. 다른 3명은 검정고시로 자격을 획득했으나 그는
시험 보는 날 늦는 바람에 홀로 남겨졌다. 소외된다는 것은 상상을 초월하는 외로움이었다.
익산의 보석공장에서 기능공으로 일하며 고생 끝에 서울 시립대를 거쳐 미국 신시내티 대학원에 유학,
결국은 합류하게 된다. 만나야 할 인연은 만나게 되나 보다.
라살 4중주단으로부터 개별 사사를 받을 수 있었고, 나중에 합류한 이종현과 더불어 4명 모두 뉴욕
브루클린 시립대 대학원 석사과정도 마쳤다. 특히 차인홍은 그곳에 남아 사우스캐롤라이나 주립대 박사과정(지휘 전공)을 거쳐, 드센 장벽을 뚫고 교수는 물론, 휠체어에 앉아 지휘하는 오케스트라
지휘자가 되었다.
베데스다는 미국 아스펜 음악제와 일본 태평양뮤직페스티벌에 초청되어 연주했고, 카네기 웨일홀에서
뉴욕 데뷔 연주를 갖기도 했다. 가는 곳마다 찬사가 따라왔다. 첼로의 거장 피에르 푸르니에는
'베데스다 현악 사중주단의 음악을 통해 삶과 예술의 기쁨을 찾을 수 있다'고 격찬한 바 있으며,
베를린 필하모닉의 콘서트마스터 레몬 슈피터는 '이 연주자들은 실내악에서만 얻을 수 있는 최고의
앙상블 수준을 이루고 있다'고 평했고, 마이니치 신문은 '부드럽고 사람의 목소리와 같은 놀라운 소리와 앙상블'이라며 칭송했다. 세계적인 실내악단으로 성장한 것이다. 실력으로 당당히 평가받은 것이다.

날마다 행복한 사람들


다들 결혼도 했다. 연애하여 어렵게 어렵게 모두 반대를 무릅쓰고 부모의 승낙도 얻지 못한 채 결혼했다.
차인홍은 피아노를 전공한 조성은 씨와 7년 연애했고, 이강일은 이분이 씨를 두 번 보고 반했으며,
신종호는 일본에 홀로 여행갔다가 야마우찌 아즈코 씨를 소개받아 5일만에 결심했고, 이종현은 보석
가공하고 첼로 레슨 하던 시절 김종희 씨를 만나 결혼했다. 그 어려운 음악과의 갈등, 훈련, 신체 장애
등을 모두 극복한 그들이 연애도 모두 성공, 아름다운 아내들과 행복한 가정을 꾸려나가고 있다.
조성은 씨는 '잊혀지지 않는 하루 하루의 연속이며 감사한 나날의 연속'이라고 말했다.
쇼윈도에 비친 자신을 보고 '내가 이랬나?' 깜짝 놀랄 정도로 장애를 잊고 사는 이들이 일러 준다.
"사회가 뭘 해 줄까 생각 말고 부딪혀 보세요. 계단 많아도 겁내지 말고 젊은 청년 둘 잡아 도움을 청하세요.
그래야 그분들도 뿌듯하겠지요… 다리에 잠시 감기 걸렸다 생각하세요"라고.
'받은 만큼 모두에게 음악을 선사하고 싶은 소망', '1년에 한번은 꼭 모여 더 깊어진 음악을 나누는 소망'을 가진 그들. 그러나 진정 바라는 것은 음악적인 성공 외에도 인간적인 성공이다. 언젠가 대전 교도소에서
연주할 때 눈물을 많이 흘리던 여자 수인(囚人), 빨개진 눈을 껌벅이던 소년원 학생 등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음악을 통해 감명을 주었다는 것이 무엇보다 기뻤다.

수원 영통, 이강일 씨 집의 밤늦은 시각. 첫만남인가 싶게 모두 함께 어우러져 정신없이 웃으며 유쾌한 시간을 보냈다. 첫 고백도 있던 그날. 부인들도 천사 같은 웃음을 지어 가슴이 또 설레었다.

글쓴이 이인영은 아산재단 편집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