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산심포지엄 오늘의 한국 가족, 어디로 가고 있나? 박인숙



할아버지부터 손자손녀까지 3대가 한 집에 오순도순 어우러져 사는 것은 이미 기대하기 힘들게 됐다. 대신 한부모가족 재혼가족 독신가족 무자녀가족 기러기가족 노인가족 입양가족 소년소녀가장가족 동거가족 공동체가족 국제결혼가족… 같은 말들이 주변에서 자주 들린다.

‘오늘의 한국 가족, 어디로 가고 있나?’를 주제로 한 심포지엄이 8월 24일 서울 풍납동 아산교육연구관 강당에서 열렸다. 올해로 창립 29주년을 맞은 아산사회복지재단이 보다 바람직한 한국 사회를 위해서는 가족부터 건강해져야 한다는 판단에서 마련한 학술 토론의 장이다.

정몽준 재단 이사장은 인사말을 통해 “가족은 인류 문명이 만든 최고의 발명품인데 우리나라 가족은 지금 주변 환경에 의해 많은 변화를 겪고 있다. 중요한 쟁점이 잘 정리돼 지혜가 도출되고, 제도가 개선되는 계기가 되기 바란다”고 심포지엄을 마련한 배경을 밝혔다.

여름의 뜨거운 열기가 가시지 않았음에도 이 자리에는 이홍구 전 국무총리, 조 순 전 부총리를 비롯해 가족과 법을 연구하는 학자들, 여러 복지재단 관계자 등 다양한 청중이 참석해 가족문제에 대한 깊은 관심을 보였다. 출범 한 돌을 맞은 여성가족부 장하진 장관은 축사를 통해 “전통적인 가족의 기능이 약화돼 가족의 힘만으로는 다양하게 나타나는 문제들을 해결하기 어렵게 되었다” 면서 현재 진행되는 정부 가족정책의 기조를 설명하고, 바람직한 합의도출을 위해 심포지엄을 마련한 아산재단에 깊은 감사를 전했다.

너무나 유연한 한국의 가족
기조 강연에 나선 동국대학교 사회학과 조 은 교수는 강연 시작과 더불어 “한국의 가족은 사회변동에 대해 너무나도 유연하게 반응해 왔다”고 진단했다. 출산률 저하, 높은 이혼률, 만혼, 고령화, 독신가구 증가 등 가족관련 통계수치가 발표될 때마다 가족을 걱정하는 이야기들이 언론을 장식하고 국가위기까지 거론되고 있다. 하지만 산업화와 경제개발시대 국가와 기업의 요구에 맞춰 대가족에서 핵가족, 다시 소가족으로 유례없이 빠르게 진행된 한국 가족의 변화를 위기로 진단하기 보다는 오히려 유연성으로 주목할 필요가 있다는 관점이다.

만약 한국 가족이 위기라면, 부계 혈통주의에 바탕한 가부장적 가족이 위기인 것은 사실이라는 진단도 함께 내렸다. 아들을 통한 대 잇기를 걱정하기 전에 출산은 커녕 결혼조차 않으려는 세대의 등장과 함께 전체 결혼 대비 이혼건수 40.6%, 결혼하는 부부 4쌍 중 1쌍은 재혼인 상황(2005년 결혼통계)에서 호주제 폐지도 이뤄졌다는 것이다.

조 교수는 한국 가족의 미래와 관련해 가장 주목해야 할 부분으로 국제결혼의 증가와 국제가족의 양극화를 꼽았다. 아들 낳기를 선호한 결과 남성 10명 중 1명은 국내에서 신부를 찾기 힘들게 되자 베트남 등 외국에서 신부를 수입해 현재 농촌의 국제결혼 비율은 35.9%에 이른다. 반면 남편은 두고 아이들만 데리고 미국 캐나다로 나가 공부시키는 기러기 가족, 자녀에게 외국 시민권을 선물하기 위해 원정출산을 마다않는 초국적 가족이 늘어나는 양극화 현상도 글로벌 시대 한국의 커다란 숙제 영역으로 지적했다.

이 같은 정황을 종합할 때 가족은 더 이상 제도나 가치가 아니라 기능의 선택적 취사로 인한 라이프스타일이 되고 있다고 조 교수는 결론지었다. 전통적인 가족개념이 해체된 한국 가족의 유연성은 우리 사회의 내적 모순을 응축해 보여주는 동시에, 근본적 변화를 가져올 분화구이기도 하다고 조 교수는 강조했다.

법과 재구조화, 그리고 저출산 가족의 탈출
분야별로 세분화한 분석 아래 바람직한 전망을 살펴보는 주제발표는 한국가정법률상담소 곽배희 소장의 ‘가족제도와 가족관계의 변화’ , 서울대 소비자아동학부 옥선화 교수의 ‘가족해체와 재구조화’, 서울대 국제대학원 은기수 교수의 ‘저출산가족의 탈출’ 순으로 진행됐다. 각 발제마다 안호용(고려대 사회학과), 최혜경(이화여대 생활환경학부), 안병철(한양대 언론정보대), 김정옥(대구가톨릭대 생활복지주거학과), 이현송(한국외국어대 영어학부) 교수와 박수미(한국여성개발원) 연구원이 토론을 맡았다.

곽배희 소장은 지난 반세기 동안 다양한 층위로 지속돼온 가족법 개정운동 약사를 통해 한국의 가족제도와 가족관계 변화를 설명했다. 아버지에서 아들, 특히 장남으로 이어져온 혈통과 가족내 권력은 더 이상 경제적 책임을 다하는 가장, 육아와 가사를 전담하는 현모양처로만 살 수 없게 된 사회 속에서 점차 부부가 양성평등한 관계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 하지만 2008년 실시될 호주제나 부부재산제를 둘러싼 논란 등에서 보여지듯 가족은 가장 보수적인 동시에 사회변동을 그대로 보여주는 리트머스 시험지와도 같다고 곽 소장은 말했다. 다양한 가족형태를 포용하며 모두가 평등하게 법과 제도 그리고 정책의 혜택을 누릴 수 있도록 하는 세심한 판단과 노력을 곽 소장은 각계에 요청했다.



‘가족의 재구조화’를 중점 발표한 옥선화 교수는 2005년 출범한 여성가족부가 가족 개념에 대한 명쾌한 정의를 유보한 채 양성평등에 기초한 통합적 정책을 펼치는 등, 정부도 이미 다양한 가족을 포용하고 있다고 봤다. 또 2005년 전체 가구 중 1인 가구가 20%, 한부모 가구가 8.6%로 나타난 가운데 여자가구주 증가율이 31.4%로 남자(6.4%)보다 높은 점은 이혼 증가가 곧 가족해체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재구조화 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으로 읽었다. 옥 교수는 주위에 나와 다른 형태의 가족을 이루고 살아가는 사람이 있음을 이해하고 그들과 함께 호흡하려는 열린 자세가 무엇보다 중요한 시점이라고 강조했다.

2050년이면 인구가 줄어들기 시작할 것으로 예고되는 가운데 저출산은 가장 걱정되는 문제의 하나다. 은기수 교수는 청년층이 원만하게 결혼을 하지 못하고 결혼한 부부가 사교육비 부담 등으로 둘째자녀 출산을 꺼리는 점 등 1.08명에 불과한 세계최저 출산률의 원인을 자세하게 짚었다. 그러나 경제적인 상황과 아내에게 치우친 가사와 양육부담이 제도를 통해 개선된다고 해서 출산률도 회복되겠느냐고 은 교수는 반문했다. 너와 나의 공존이 아니라 끝없는 경쟁에서 살아남아야 한다는 생존경쟁만 이어지는 한 저출산은 극복되기 힘들기에, 바람직한 삶의 양식과 이를 가능하게 하는 가치관의 큰 틀을 찾아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2006년 여름, 지겹게 쏟아지던 비와 숨막히는 더위 속에서도 우리 사회는 한 가족에게 우레와 같은 박수를 보냈다. 경찰과 언론과 이웃의 아무런 도움을 받지 못하면서도 엄마 없이 자란 손녀와, 딸과 조카를 위해 있는 힘을 다한 가난한 가족에게 감동했다. 영화 속 ‘괴물’도 무너뜨린 그들이 가진 것이라곤 단 하나, 가족을 향한 사랑이다. 다양한 형태로 함께 사는 사람들이 가족을 향한 사랑을 키워간다면 우리 사회는 건강한 미래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